42화 바다가 보내준 하얀 꽃다발(3)
레온하르트와 황제를 걱정하게 한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회복한 황후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해변으로 나섰다.
그녀의 뒤를 그림 도구를 챙긴 시종들이 줄줄이 따라가고 있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또 거둬 가는 위대한 존재란다.”
황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응시했다.
발목을 파도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사르륵 사륵 모래가 휩쓸려 가며 묘한 느낌이 들었다.
황후는 푸른 바다가 하얗게 타올라 투명하게 부서지며 고운 모래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모습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중인 엘리자베스를 그리고 있었다.
커다란 스케치북 가득 목탄 특유의 느낌을 이용해 그린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모래성을 만들며 놀던 둘은 갑자기 몰려온 커다란 파도에 기껏 만든 모래성이 무너지자 잔뜩 실망하더니 이내 검은 바위 사이에 고인 바닷물과 해초 따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햇살이 따갑게 내리 즈음 다시 해변으로 내려와 파도에 발을 담그거나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전부 황후의 스케치북에 남아 있었다.
"어젯밤 일, 정말로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분명 해군 아저씨들이 마실 걸 주길래 마신 것 같긴 한데...."
“안 나면 그걸로 됐어.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 몰래 모래사장 위로 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슬쩍 적어 보았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있던 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리지?"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발자국 옆이 텅 빈 것을 알고 뒤를 돌아봤다.
엘리자베스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모래 위로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서 다가가려는 순간 파도가 몰려와 그녀의 손목까지 흠뻑 적시며 그의 눈앞에서 엘리자베스의 작품을 훔쳐 갔다.
“레온, 저기 저 탑 같은 건 뭐야?"
엘리자베스는 손등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가 기분 좋은지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로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시선 끝에는 등대가 있었다.
“등대? 밤이 되면 멀리 있는 배에서도 보일 만큼 밝은 불을 밝혀서 신호를 보내 주는 탑이야.”
“신호를?”
“어제... 아차, 그러고 보니 불꽃놀이다 뭐다 밤바다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겠구나. 지금은 수평선이 확실하게 보이지?"
어느새 엘리자베스의 곁에 털썩 주저 앉은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마다 반짝거려서 정말 예뻐.”
“네 눈동자가 저런 색이라니까?"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서 설명이나 마저 하라는 듯 재촉했다.
“밤이 되면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 되어 버려. 물론 밤하늘의 별을 가르고 나아가는 기분은 아주 환상적이지만... 낮에만 해도 선명하게 보이던 암초며 섬이며 전부 어둠 속으로 잠겨 버리는 게 문제지.”
“그래서 등대가 신호를 보내 주는 거야? 이쪽은 위험하다거나, 여긴 항구라거나.”
"나는 리지가 영리한 것도 좋더라."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의 얼굴 위로 물보라가 튀었다.
엘리자베스를 대신해 그의 얼굴에 하얀 따귀를 남긴 파도는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럼 레온은 내 등대야?"
"응?"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따라 파도가 올라오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간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고운 모래를 전리품처럼 가져다주는 파도를 보던 엘리자베스는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공작저에 있을 때... 나는 무조건 레온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레이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았던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왜...?"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의외로 담담하게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그냥 어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예법을 배우고, 답답한 옷을 입고, 그렇게 살다 어느 날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면 끝인 줄 알았어.”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엘리자베스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온이 나에게 길을 알려 줬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혼자서 생각하지 못하는 나한테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알려 줬어. 기억해?"
“...아침부터 공작저로 돌격했던 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부서지는 느낌이라 너무 무서웠어. 누군가에게 이게 맞는 일이냐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어.”
“하지만 문을 열라고 한 건 너였잖아?"
“그래도 된다는 걸 레온이 가르쳐 줬으니까. 나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그때 집사가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걸 보며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녀의 양쪽 새끼발가락은 발바닥 쪽으로 조금씩 휘어져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신었던 구두 탓이라며, 특별히 발톱 모양이나 걷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레온하르트는 몇 번이나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준 건 레온이야. 그러니 레온은 내 등대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 한 번에 햇빛 한 줌이 일렁이는 파도와 부딪혀 천 갈래 만 갈래 눈부신 빛으로 부서졌다.
"고마워, 레온.”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황후를 향해 달려갔다.
젖은 발바닥에 하얀 모래가 들러붙어서 따끔거리는 건지, 정말로 마음속 한 편이 따끔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머, 무슨 일이니 우리 아가?"
황후는 그녀를 반기며 자리와 함께 시원한 음료를 내어 주었다.
이곳 특산품 중 하나인 유리 공예 기법을 아낌없이 발휘해 만든 아름다운 유리잔을 어항 삼아 조약돌 대신 둥글게 깎아 설탕에 졸인 과일을 넣고, 물고기 장식이 붙은 빨대를 꽂은 블루베리 주스였다.
햇살 아래에서 오랫동안 말을 한 탓에 목이 말랐던 엘리자베스는 금방 잔을 비워 냈다.
빈 잔 속에선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귀족 이상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다는 녹지 않는 마법이 걸린 얼음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나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보겠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케치북 속에 거친 선으로 그려진 레온하르트와 제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엘리자베스가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꼭 그림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 같아요.”
황후의 스케치북 안에 황후의 시선으로 본 황실의 모습이 가득했다.
가장 첫 페이지엔 그녀가 보지 못한 어린 레온하르트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신가요?"
"레온이 다섯 살 때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요 눈매만은 여전하지?"
그녀를 만나기 전날 밤까지만 해도 레온하르트는 작은 폭군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황실의 말썽꾸러기였다며 황후는 자애롭게 웃었다.
“지금의 레온과는 어쩐지... 다른 사람 같아요.”
똑같이 창가에 턱을 괴고 앉은 레온하르트의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달랐다.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 페이지 사이를 살펴보며 대체 뭐가 다른 걸까 고민했다.
“이건 우리 아가를 만나기 전 레온이고, 이건 그다음 날 레온이구나.”
"네에? 하루 만에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 크흠, 흠. 실례했습니다. 실언을 용서해 주세요.”
“실언이라니. 사실인 것을. 대신 레온에겐 비밀이다?"
황후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엘리자베스와 머리를 맞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따라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으흠, 흠! 다음 페이지를 보겠니?"
황제 폐하께서 긴 소파 위에 얇은 이불 하나만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황후는 얼굴을 붉히며 다음 페이지로 스케치북을 넘기고, 넘기고, 한참을 넘겼다.
“...폐하를 많이 그리셨네요."
“...비밀로 해 주련?"
엘리자베스는 괜히 먼 바다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빨리 넘기는 바람에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림 속 황제 폐하는 늘 황후를 보며 웃거나 다정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고서야 다시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등장했다.
환영식 무도회 날, 그녀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선물하며 행복하게 해 줘도 되겠느냐 허락을 구하던 레온하르트 앞에서 나는 이런 표정을 지었구나, 엘리자베스는 괜히 볼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손부채질을 했다.
“이날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사랑에 빠졌단다.”
"네? 저희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번에 알아챘다.
이제 겨우 굵은 줄기를 하늘로 뻗으며 파릇파릇한 잎을 피우기 시작한 두 연리지는 서로의 감정조차 아직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랑이 뭔가요?"
엘리자베스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물 었다.
황후는 페이지를 새로 넘기더니 엘리자베스에게 목탄을 쥐게 했다.
“화, 황후마마?"
"괜찮아, 그냥 우리 아가 마음속에 있는 걸 그리면 돼.”
“하지만 저는 그림은 그려 본 적이 없는데....”
“나도 처음에는 선 하나 긋는 것도 어려워했단다. 우리 아가만 알아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으로 새하얀 종이 위에 목탄을 가져다 댔다.
펜과 달리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목탄의 감촉과 소리는 조금 거칠고 또 난폭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무지개처럼 부드러운 선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금세 목탄으로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조금 더 이젤 앞으로 바싹 몸을 당겨 앉았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뒤에서 흐뭇하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는 상기된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마음속에 있는 것, 소중한 것, 지금 이 순간. 뭐든 좋단다.”
“소중한 것.”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말을 따라 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음속에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엘리자베스는 하얀 소맷자락이 목탄 때문에 검게 얼룩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황후는 서툴지만 제법 열심인 엘리자베스의 손끝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그림을 보며 어머나, 하고 작은 감탄을 터트렸다.
“저... 황후마마.”
종이 위로 콕콕콕 점을 찍어 불꽃을 표현하던 엘리자베스가 다시 황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 보고 싶어요.”
“그림을?"
황후는 흔쾌히 허락했다. 귀족 영애들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 정도야 예법에 어긋나지도 않고, 설령 어긋난다 한들 제국의 레이디 중 가장 으뜸가는 그녀가 허락한 일을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다만 이유가 궁금했다.
황후는 고향의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과 말을 달리며 느꼈던 바람의 감촉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비록 그 빛과 감각을 온전히 재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엘리자베스도 그런 걸까?
“왜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이유를 물어도 될까?"
엘리자베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어느새 시종들과 작살 낚시를 시작한 레온하르트만 빤히 쳐다봤다.
황후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리지, 레온을 좋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