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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1화 (41/130)

41화 바다가 보내준 하얀 꽃다발(2)

황후의 고향 방문 기념 파티는 황태자의 소드 마스터 각성 기념 파티를 겸해 더더욱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해군들은 소드 마스터와 대련할 모처럼의 기회라며 눈을 빛냈고,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명예를 위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황제는 파티에 모인 병력의 절반 이상과 싸워 이긴 제 아들을 보며 흐뭇하게 껄껄 웃었다.

제독과 다른 관료들 또한 제국의 미래가 밝다며 황제에게 축하주를 올렸다.

파티의 하이라이트는 술에 잔뜩 취한 해군들이 보여 주는 탭댄스 공연이었다.

지루한 항해를 견딜 겸 체력 단련을 위해 시작된 해군들의 탭댄스는 어느새 격식 있는 자리에서 선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그들만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치 한 사람의 다리처럼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춤을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손뼉을 쳤다.

이런 춤은 황궁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신기해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예의 해군들이 스텝을 가르쳐 주겠다며 레온하르트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막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을 내민 해군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이쿠! 이거 전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안 되겠는데요?"

해군들은 다시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대체 저 모습이 어딜 봐서 바다의 망령들도 잡는다는 해군이람. 리지, 이쪽으로 와. 거기 있다 너까지 술에 취하겠다.”

엘리자베스는 해군들의 말 한마디에 쩔쩔매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까르륵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파티는 처음이야.”

“즐거워?"

“무척!”

"다행이다. 어마마마께 감사 인사라도 드리러 갈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황후를 찾아 파티장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황후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황제 곁에 늘 그렇듯 온화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마마마!”

“응... 으응? 아, 우리 아가들이구나. 더 놀지 않고.”

"어마마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시기라도...."

황후는 이번에도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렇게 즐거운 파티는 또 오랜만이라 잠시 사람들에게 취한 모양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 아가들."

"어마마마....”

“내 사랑, 무슨 일이라도 있소?"

축하주를 말 그대로 받는 족족 마셔대던 황제가 황후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람들을 물리며 황후를 소파에 앉혔다.

“이렇게 좋은 날 내 사랑의 표정이 영 좋지 않구려.”

"그렇... 습니까? 실은 조금... 속이 불편합니다.”

“흐음... 조금 전 레온 녀석이 검을 꺼내서 놀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사랑은 워낙 여리니 말입니다. 황후, 정 그러하면 먼저 들어가 쉬겠소?"

창백한 안색으로 이마를 짚으며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어요."

“거기, 황후를 모시거라. 내 사랑. 금방 가겠습니다. 그러니 푹 쉬고 있어요.”

황제는 황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시종에게 넘겨주었다.

레온하르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황후의 뒷모습만 응시했다.

역시 미래는 바뀌지 않는 걸까?

설령 비극을 막는다고 한들 어쨌든 어마마마께선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하시는 걸까?

점점 멀어져 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에 황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온...?"

곁에서 엘리자베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마마마께서 모처럼 즐거운 파티인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 하시니 걱정이 되어....”

“여차하면 의사를 부를 것이니 황태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바마마야말로 어마마마의 말처럼 술에 너무 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제가 소드 마스터가 됐다는 소문이 저희보다 먼저 도착했을 거라는 데 내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어느새 그가 머리를 쓰다듬기에 훌쩍 자랐다는 것을 알고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잘 컸다.”

"네?"

"아무것도 아니다. 가서 네 약혼녀나 챙기거라. 저러다가 녀석들이 도를 넘은 장난을 치면 모두 곤란해지니.”

"리... 리지!”

레온하르트는 황제가 가리킨 손끝에서 리지가 작은 술통 모양 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식겁하며 달려갔다.

“그냥 물이었는데, 왜 그렇게 놀라서 달려온 거야?"

“물이었으니 다행이지 술이었으면 어쩌려고 그걸 넙죽 받아 마셔?"

"코가 있는데 술이랑 물도 구분 못 할까 봐?"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감히 황태자의 약혼녀에게 술(처럼 보이는 물)을 권한 해군들을 다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려봤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 그래도 저 사람들에게 탭댄스도 배웠어. 한번 볼래?"

“그사이 결국 배운 거야?"

“볼 거야 말 거야?"

레온하르트는 내가 졌다는 표정으로 해군들과 함께 엘리자베스가 발랄한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통통 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댄스가 특기인 엘리자베스는 바다의 춤 또한 어렵지 않게 배웠던지 처음 스텝을 배웠다는 사람치곤 제법 그럴듯한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때?"

레온하르트는 진심을 담아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박수를 쳤다.

사람들은 파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와 황후,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를 위해 건배하고 또 건배했다.

* * *

"황후, 아직도 속이 좋지 않습니까?"

황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황후의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황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사를 부를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더 계시지 않구요.”

“내 사랑이 이렇게 누워 있는데 술이 달아 봤자 얼마나 달겠습니까.”

황제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황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냥... 고향에 와서 너무 들떴나 봐요.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레온하르트 녀석, 이젠 머리를 쓰다듬기도 애매할 만큼 컸더군. 내 사랑도 알고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요 근래 엘리자베스가 사춘기에 들면서 그 아이의 속을 제법 썩이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저런, 멀쩡한 나무를 베어 버리는 일 만큼은 영애께서 지양했으면 하는데.”

“설마 엘리자베스가 그럴까 봐요?"

황후는 쿡쿡 웃었다.

"벌써 아이들이... 아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할 만큼 자랐네요.”

황제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황후는 등 뒤를 받쳐 오는 든든하고 따뜻한 품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기억나나요? 저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리고 다시 만났던 순간.”

“전부 기억하고 있지. 내 기억에 남은 건 오직 내 사랑의 모습뿐이었으니까."

“그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다 느끼고 있을까요?"

황제는 황후의 손을 겹쳐 쥐고 안심하라는 듯 손등을 토닥였다.

“장담하건대, 녀석들은 이번 여름을 평생 기억할게요.”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황후의 눈이 가물거리는 것을 본 황제는 다시 그녀를 눕혀 주었다.

요 근래 들어 황후께서 유난히 졸음에 겨워한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 있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해산물 앞에서 속이 불편하다고 하질 않나, 파리한 안색으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들어 있질 않나.

혹여 사랑하는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황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걱정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운 건 레온하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지... 리지...?"

결국 해군들이 일을 쳐 버렸다.

제독의 말 한마디에 나란히 모여 머리를 박은 해군들의 모습은 어떤 의미론 장관이었으나 그 모습을 감상할 여유 따윈 레온하르트에게 없었다.

“레온... 레온이다. 헤헷.”

"응... 그래, 나 레온 맞으니까... 방에 가서 좀 쉴까?”

“나... 너무 즐거워... 즐거운데... 즐거운... 데....”

레온하르트는 혹시라도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를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축 늘어진 몸을 둘러업었다.

“제독, 감히 황태자의 약혼녀에게 물인 척 물 탄 술을 마시게 한 녀석들의 처분은 제독에게 맡기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바다의 신 마나난의 이름하에 아주 다시는 잊지 못할 여름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제독만 믿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업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귓가에서 새액새액 가쁜 숨만 내뱉는 엘리자베스는 꼭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거품이 되어 사라질 듯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를 침대로 눕힌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남은 일을 시녀들에게 맡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레온... 가지 마.”

"리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가늘게 눈을 뜨고 레온하르트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물 한 잔... 마실래?"

“...술 안 탄 걸로.”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나도 몰라... 그냥... 투명하고, 냄새도 아무 이상 없길래 마셨는데....”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네가 또....”

“또?"

서늘한 물 한 잔을 마시고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네가 또 독을 마시고 쓰러질까 봐. 나를 대신해 그렇게 생을 마감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데.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또... 뭔가 사고를 칠까 봐...."

엘리자베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시녀에게 빈 컵을 내밀었다.

“...미안해.”

“응?”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다음부터 그러지 마. 그럼 됐어.”

“...레온은 항상 그런 식이야.”

“내가 뭘?"

시녀의 도움을 받아 파티용 드레스 대신 침의 위에 가벼운 숄을 걸치고 돌아온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대답했다.

"내가 뭘 하든 전부 받아 주고, 허락해 주고, 괜찮다고 하잖아."

“그야 나는 리지가 그렇게 해서 즐겁고, 행복했으면 하니까....”

“그럼 레온은?"

“나?"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목깃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대체 어떤 술을 물에 탄 건지, 엘리자베스에게선 아직까지도 술 특유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레온은, 내가 죽으면 행복할 것 같으니 죽는다고 하면 그래도 허락할 거야?"

“리지, 리지 일단 이것 좀 놓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목이 졸려 켁켁거리면서도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다시 울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속에 품고만 있던 말이 두서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즐거웠는데, 레온은? 레온은 즐거웠어? 행복했어? 레온이 정말로 좋아하는 건 뭐야?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일이야? 레온이 광대야? 나는... 나는 레온이 나를 즐겁게 하는 일 말고 다른 일도 즐겁다고 느끼면 좋겠어. 이래서야 꼭 내가 진귀한 보석이라도 된 기분이란 말이야. 벨벳 쿠션 위에 눕혀져서, 매일 깃털 먼지떨이로 먼지를 털어 내고 비단으로 광을 내는 그런 보석!"

“리지...?"

레온하르트는 이 또한 지나가는 엘리자베스의 사춘기 탓이라 치부하며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다.

“나도... 나도 레온을 즐겁게 해 주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레온이 전부 먼저 해 버렸으니까.”

나는 네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내 앞에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걸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 한데.

레온하르트는 식은땀만 흘리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한 가지만 말하게 해 줄래, 리지?"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 눈길 하나, 숨결 하나, 동작 하나에도 하루에도 수십 수천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 그만큼 너는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야. 그런 소중한 사람이 조금 더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웃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도와주는 일이 그렇게 나빠?"

엘리자베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내 소중한 리지. 네가 허락한다면 나는 너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 나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면... 그냥. 그냥 웃어 줘. 그거면 돼.”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온은... 정말 못됐어.”

한참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손수건에서 얼굴을 떼며 중얼거렸다.

“물 한 잔 더 마시고, 푹 쉬어. 내일은 백사장에서 모래성이라도 만들자.”

“어린애 아니라니깐....”

레온하르트가 덮어 주는 이불 아래에서 엘리자베스는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잘 자, 내 소중한 리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레온하르트가 입 맞추고 간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레온하르트, 정말로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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