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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0화 (40/130)

40화 바다가 보내준 하얀 꽃다발(1)

황제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놀아야 한다는 말에 씁쓸해하면서도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던 마음은 해일에 휩쓸린 해초처럼 하룻밤 만에 싹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밀물처럼 몰려온 바다를 향한 두근거림과 낯설고 설레는 경험에 대한 기대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기가 막혀 했지만 그래도 두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뻐근한 목덜미만 한참을 문질렀다.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해군 측에선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왔다.

모서리 하나마저 예리하게 각이 살아있는 하얀 상자 속에선 옷 두 벌이 나왔다.

하나는 언젠가 그들의 주군이 될 레온하르트를 위한 옷이었고 남은 하나는 엘리자베스를 위한 옷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화려한 어깨 견장과 모조 훈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코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깨 견장에 달린 별 개수를 보니 제독이 입는 코트였다.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레온하르트는 거울 속을 보며 그래도 그동안 검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보람이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군인에게 어울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턱을 당기며 근엄한 표정을 짓자 거울 속 젊은 제독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사교계에 새 바람을 불러올 것이 분명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 드레스치곤 조금 무거운 원단으로 만든 하얀 원피스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지런하게 감청색 선이 그어진 플리츠스커트가 달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정교하게 계산되고 또 다림질해 고정한 스커트 주름과 가슴에 달린 금빛 단추를 본 순간 해군들의 제복을 떠올렸다.

가슴팍에 달린 여섯 개의 금빛 단추는 마찬가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다.

원피스와 함께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 중 무엇보다 그녀가 마음에 든 건 깃에 장식하는 스카프였다.

해군들의 상징인 세일러 깃이 그녀의 원피스에도 붙어 있었다.

깃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어진 두 줄의 선은 네모반듯한 깃의 모퉁이에서 방향을 바꾸는 배처럼 우아하게 몸을 한 바퀴 돌리고 있었다.

"리본과 타이 중 어떤 장식으로 하시겠어요?"

엘리자베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타이를 선택했다.

선원들처럼 평범하게 묶은 스카프 끝에는 작은 진주 장식이 달랑거렸다.

레이스 양말과 검은 메리 제인을 신은 엘리자베스는 자그마한 세일러 햇을 비스듬하게 머리에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레온!”

"리지!"

두 사람은 상대방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감탄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에 보인 엘리자베스는 잠시 배 위에 올라온 하얀 파도의 요정 그 자체였다.

엘리자베스는 긴 은발을 두 갈래로 땋아 도넛처럼 고정시키고, 작은 세일러 햇을 왕관처럼 쓰고 있었다.

스커트의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쳐 입을 페티코트가 필요했지만 덕분에 스커트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낸 범선의 돛처럼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에 어울리는 푸른 스카프는 리본 모양이 아닌 해군들이 사용하는 타이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다부지고 활달한 표정을 본 레온하르트는 리본이 아니라 타이라서 다행이라고 내심 안도했다.

엘리자베스 또한 바닷사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삼각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순간 볼을 붉혔다.

낮고 진중하게 가라앉았지만 한편으론 오직 엘리자베스만 볼 수 있는 다정함과 상냥함을 담은 제비꽃빛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소년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자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어쩐지 처음인 기분이었다.

어린아이의 젖살에 가려져 있던 갸름하고 단아한 선이 드러나며 레온하르트는 수려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선 고운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황태자로 자라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위엄과 발톱을 감추고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배자의 시선은 각 잡힌 제복이 주는 단단한 이미지와 묘하게 어울리며 동화 속 바다의 왕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리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레온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만 보다 허둥지둥 그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보다 앞서 달리지 않으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았다.

“제법 어울리는구나.”

"레이디 엘리자베스,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어른들이 탄성과 함께 짧은 박수를 쳤다.

해군들은 미래에 자신의 주인 될 그를 향해 해군식으로 예의를 표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당황했으나 황제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여 마찬가지로 해군식 방식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늘은 해군들과 함께하는 작은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지막 날엔 선상 파티도 열 거란다. 기대되지?"

“선상 파티요?"

푸른 드레스를 입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 위에서 파티를 하는 거란다. 파도 소리가 오케스트라를 대신하고, 석양과 별자리가 샹들리에보다 더 아름답게 반짝이겠지!”

황후의 들뜬 목소리에 엘리자베스 또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 *

버터를 듬뿍 사용해서 구운 조개와 새우, 바닷가재는 물론 바다에서 나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가 파티장에 모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산물인데 생물은 보이지 않는군."

"예에, 황후마마께서 요 근래 들어 황궁에서도 날것은 잘 드시질 않으시길래 오늘은 작정하고 여름 햇살보다 뜨거운 요리로 준비했습니다.”

“날것을 잘 드시지 않아?"

"아마 더위 탓이겠지요. 그래도 선상파티에선 가장 좋아하시는 굴을 준비하려 합니다.”

레온하르트는 구석에서 흐뭇하게 파티장을 지켜보던 요리사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바닷가에서 자란 그녀는 해물 요리를 특히 좋아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생으로 썰어낸 전복과 작은 문어를 생으로 올리브유와 소금에 찍어 먹는 요리로, 그녀의 고향에서도 제법 괴식으로 통하는 요리였다.

당연히 선대 황후가 그런 황실의 위엄과 어울리지 않는 요리를 허락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비록 괴식이라 한들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좋아하던 요리를 마다한다?

레온하르트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느끼며 어느새 해군들 사이에 섞여 버린 엘리자베스를 찾아 나섰다.

"아! 여기 계셨군요. 황태자 전하, 마침 영애로부터 이야기를 듣던 참이었습니다.”

"이야기?"

“어제 축제에서 영애를 지키기 위해 해적들을 상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야... 전하께서도 어느새 사나이가 되셨군요!”

"그... 그건...!”

“해적?”

제독들과 와인을 기울이던 황제가 해적이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이미 거나하게 럼주와 와인, 또는 그 둘 다 마시고 취해 버린 해군들은 눈앞에 있는 이들이 누군지도 잠시 잊은 채 레이디 엘리자베스로부터 들은 황태자의 용감무쌍한 해적 소탕전을 다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독, 요즘 해적들은 뭍에서도 영업을 하는 모양이지?"

"끄응... 면목 없습니다. 전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을 모두 소탕하겠습니다.”

탓하는 건 아닐세. 오늘은 즐거운 자리니 무거운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고 어디 그 대단한 황태자가 어떻게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구했는지나 계속 들어 보지.”

제독은 저 방정맞은 해군들을 조만간 돛대 위에 대롱대롱 묶어 놓겠노라 생각하며 황제와 함께 이동했다.

“자, 자. 그러지 마시고 직접 한번 보여 주시죠! 황태자 전하!"

"크와앙! 저는 무시무시한 해적입니다! 전하께서 진심으로 덤비시지 않으면 레이디 엘리자베스에게 아주 무례하고 무엄한 짓을 해 버릴 겁니다!”

“무... 무슨 짓을 할 작정이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위 어른들은 하나같이 '여차하면 그때 나서자'라는 표정으로 그들을 넓게 둘러싸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군들 사이에서 까르륵 웃고 있던 엘리자베스도 과연 이 술 냄새 나는 바다의 진짜 신사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와 전하께서 불꽃 축제의 밤 무슨 일을 하셨는지 온 바다에 대고 떠들겁니다. 저 깊은 심해 속 마나난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놈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해군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은식기를 하나씩 쥐며 레온하르트를 둘러쌌다.

충분히 황족을 향한 위협 행위에 해당하는 짓이므로 말려야 했지만 다들 워낙 술에 취한 데다, 겨우 숟가락 하나로 무얼 할 수 있겠냐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저, 저 무엄한 놈들이...! 이놈들아!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자각을 좀 해라! 머리에 달린 건 갈매기 둥우리냐!”

술이 확 깨 버린 제독이 해군들의 머리에 꿀밤을 놓으며 타박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를 꽉 눌러 황제 와 황태자에게 허리를 숙이도록 만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황제는 근엄한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숨기고 위압적이고 무거운 목소리로 황태자를 향해 무기를 겨눈 그들에게 판결을 내렸다.

"황태자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겨우 스푼 하나로 그 아이를 대하는 건 오히려 모독죄에 향한다. 짐이 허락한다. 다들 검을 꺼내도록!"

"황제 폐하 만세!”

"아바마마!”

"폐하!"

술에 취한 해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만세를 외치며 검을 꺼냈다.

어디까지나 예장을 위한 예도라고 해도 어른이 작정하고 찌른다면 단순히 타박상으로 끝나진 않을 터였다.

레온하르트는 황제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쏘아 보내다가, 어느새 그의 곁에 기대어 기분 좋고 나른하게 웃는 황후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엘리자베스가 웃을 수 있다면야... 한 몸 희생해서 연극배우도 되고 그러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마찬가지로 장식품에 불과한 예도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오오오, 하는 탄성과 함께 해군들이 역시 황태자는 자세부터가 다르다는 둥, 조금 더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둥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럼주 통 위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냥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레온, 힘내! 이겨야 해!"

"황태자 전하! 약혼녀로부터 응원까지 받았는데 패배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봐드릴 생각도 없지만요!”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먼저 공격에 나섰다.

술에 취해 유난히 혀가 매끄럽게 돌아가던 해군이 그 모습을 마치 음유 시인의 노래처럼 유려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황궁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황후의 고향이기에 가능한 파티였다.

"이크! 전하, 제법 칼끝이 예리하십니다!”

"하지만 뒤가 비어 있군요!"

"이놈들이...!”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검기를 해방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가 승리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미담이라고 해도 다른 사내놈들이 함부로 그녀의 이름을 노래하는 건 원치 않았다.

'살짝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기를 슬쩍 끌어올렸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화, 황태자 전하? 지금 그건... 설마...."

“검기.... 검기다. 전하께서... 어떻게 이런....”

“이... 이건!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황태자. 설명하거라.”

레온하르트는 아주 조금만 끌어올리려던 검기가 아예 예도를 불태울 듯 일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당혹감에 빠졌다.

이래서야 눈의 착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환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검기는 술 취한 해군들의 술을 깨게 만들 정도였다.

"엘리자베스를... 지키려다가....”

레온하르트는 우물거리며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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