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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39화 (39/130)

39화 손과 손과 눈과 눈(3)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눈을 꼭 감았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 배웠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자 기사들의 대련장에서 나던 절도있고 일정한 박자의 기합 소리가 아닌 날카롭고 거친 쇠와 쇠가 부딪히며 울부짖는 비명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아무리 레온하르트가 황실 근위대장 알베르트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곤 하나 실력 이전에 상대편 측은 다수였다.

그냥 정체를 밝히는 편이 나을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치들이라면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라고 해도 귀하신 분들이 저들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왔다며 기쁘게 그들을 인질로 삼고도 남을 것 같았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키겠다는 도련님의 마음씨만은 높이 사서, 특별히 바다 신사들의 솜씨를 보여 주지!"

레온하르트는 한 사람을 상대로 한꺼번에 동시에 달려드는 해적 놈들이 대체 어딜 봐서 신사냐며 혀를 차며 검을 고쳐 쥐었다.

아무리 그가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에 어울리는 실력으로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나이대의 평균치를 웃도는 체력을 가졌다 해도.

그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방심하는 순간 허공에 흩날리는 건 어마마마께서 물려주신 눈부신 금발이 아니라 그의 신체 일부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도 그는 이겨야 했다.

이겨서, 엘리자베스에게 어마마마께서 사랑한 밤바다의 불꽃을 보여 줘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행복해하는 것을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파도를 칼로 베듯 무작정 해적들과 검을 맞대고 또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공격을 회피했다.

“도련님... 제법 하잖아?"

"하! 그래 봤자 애송이지!"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이를 갈며 그들의 빈틈을 노려 다시 검을 휘둘렀다.

생존과 약탈을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익힌 해적들의 거친 검술에 비해 황실에서 가장 기본부터 충실하게 다져온 레온하르트의 검술 실력은 해적들을 당황시키는 데 충분했다.

레온하르트는 제 눈을 의심했다.

해적들의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동시에 손끝이 짜릿한 느낌과 함께 검 위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설마...?'

레온하르트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해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다시 반격했다.

엘리자베스를 위해서.

다른 생각은 모두 지우고 오직 그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또 집중했다.

그럴 때마다 푸른 기운은 점점 더 강렬하게 일렁였다.

레온하르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각성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레온하르트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청량하고 맑은 검기를 느끼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검을 고쳐 쥐며 검기에 온몸을 맡겼다.

문헌 그대로였다. 소드 마스터는 말 그대로 검술의 경지에 다다른 자였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또 공격해야 할지 이미 행동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하나둘 바닥으로 쓰러진 해적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래서, 손가락뼈가 총 몇 개인지 궁금한 사람?"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설마 레온이 쓰러진 건 아니겠지?

불안함에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미친 듯이 뛰며 귓가에선 이명이 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살짝 눈을 떠 보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사납고 매서운 얼굴을 한 레온하르트가 일방적으로 해적들을 검술로 농락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레온이야...?'

차갑게 굳은 얼굴은 신벌을 내리는 신수처럼 단호했다.

검술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적의 허점만을 깔끔하게 노렸다.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쓰러진 줄 알았던 해적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뒤를 조심하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답답한 마음에 눈물만 흘리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꼭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기습을 피하더니 오히려 상대하고 있던 해적의 멱살을 잡아 그에게 내던졌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눈을 감은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이길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졸데.”

해적들에게 손가락뼈가 두 손을 합쳐 총 54개라는 것을 친히 가르쳐 주며 언덕 아래로 쫓아 보낸 레온하르트는 땀을 훔치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대로 두 눈을 꼭 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지.”

여름 바람이라곤 하나 바닷가의 밤바람은 아직 춥다.

레온하르트는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로 덮어주며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눈 떠도 괜찮아.”

비록 음식은 다 식어 버렸지만.

레온하르트는 긴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온....”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다. 동시에 눈꺼풀 아래에 갇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턱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괜찮아.”

엘리자베스는 코를 훌쩍이며 레온하르트와 시선을 맞추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다쳤어?"

레온하르트의 볼 위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흠칫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볼을 문질렀다.

“내 피는 아닌 것 같아.”

“...속상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진심으로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나도 뭔가 하고 싶었는데, 레온을 지켜 주고 싶었는데. 적어도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만일 해적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인질이 되어 레온의 발목을 붙잡았을 거고, 아무런 힘도 없는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겠지.

엘리자베스는 그 점이 분하고 또 서러웠다.

환영식의 샴페인 타워 사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자기 몸보다 엘리자베스를 우선시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그에게 평생 짐이 될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라는 대단한 사람의 발목을 붙잡기나 하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자 엘리자베스는 자기 자신이 구역질이 날 만큼 싫어졌다.

"괜찮아.”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다시 한번 다정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가 서러워하는 이유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게 아니라며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키스하며 수천, 수만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맹세했던 말을 반복했다.

"너를 지킬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거야.”

동시에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커다란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감히 별의 곁을 탐내며 기세 좋게 하늘로 몸을 내던진 폭죽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구름을 뚫기는커녕 별의 그림자 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의 단말마를 펑펑 내지른다. 폭죽이 제 온몸을 불티로 산산조각내어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내리는 와중에 레온하르트는 웃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소맷자락으로 벅벅 눈시울을 닦으며 조금이라도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눈에 새겼다.

눈을 감으면 검은 어둠 속으로 스러지는 불꽃과 함께 그의 존재도 사라질 것만 같아 눈을 깜빡이고 싶지 않았다.

“불꽃... 시작... 했는데....”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이라곤 고맙다거나 무서웠다는 말이 아닌 고작 이런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치맛자락 위로 불꽃 그림자처럼 작고 동그란 자국이 흩뿌려지듯 남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곁에 앉아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방금 전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에선 식은땀이 배어 나와 조금 축축했지만 무척 뜨겁고 든든했다.

엘리자베스는 불꽃을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녀의 조금 진정되었나 싶던 심장이 다시 터질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그 또한 그녀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레온하르트 또한 엘리자베스를 흘끗거리며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불꽃놀이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무사한지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 사람이 곁에 있는데, 하늘을 수놓고 바다에 비친 무지갯빛 불꽃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다행히 엘리자베스는 불꽃놀이에 완전히 푹 빠져 별보다 환하고 파도 위 달 그림자처럼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레온하르트는 안심하는 대신 걱정과 염려, 불안한 마음이 먼저 앞섰다.

저 환한 미소가 과연 황실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예쁘다....”

네가 더 예뻐, 그 말을 하는 대신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더욱 꼭 잡아 주었다.

그의 심장 역시 조금 전 생사를 다투며 검을 휘두를 때와는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같은 심정일까, 레온하르트는 슬쩍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며 궁금해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세 시간이 넘도록 호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외출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이동 가능한 곳은 저택 안과 황족 개인 해변뿐으로, 휴가가 끝날 때까지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은 엄중히 금지되었다.

“그럼 연극은요?"

“그건 어른들이 함께하니 허락하마. 하지만 다른 건 절대 안 돼!"

진심으로 화가 난 아바마마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엘리자베스 또한 황후에게 경솔한 행동을 했다며 단단히 주의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네 힘으로 영애를 지켰다는 점은 인정해 주마. 그리고 해적들의 존재 또한.”

고개를 푹 숙이고 황제의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황제의 화가 누그러질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할 테니 가서 쉬거라. 그리고 다신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거라. 레온하르트, 너는 이 나라의 하나뿐인 후계자이기 이전에 짐의 하나뿐인 아들이야. 아들이 사라졌는데 걱정하지 않을 부모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황제는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의 레온하르트를 보며 그제야 피곤한 표정으로 어서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마침 황후의 방에서 나오던 엘리자베스와 마주친 레온하르트는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일은 우리가 잘못했다. 그렇지?"

"응...."

"외출 금지라니. 그래도 해변에는 나갈 수 있어 다행이야.”

“어른들이 함께한다는 조건으로...?"

“그것도 있지만 어제 불꽃놀이,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고마워.”

엘리자베스는 목에 걸린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잘 안 들리는데, 방금 뭐라고 했어?"

엘리자베스는 어딘지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획 들어 올렸다.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바보!"

그리고 제 방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황족 모독죄에 해당하는 말을 듣고서도 레온하르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피식피식 연신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온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바람에 촛불이 훅 꺼지듯 조금 전까지 즐거웠던 일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속상한 마음만 남았다.

황후마마와 함께 갈매기들과 놀고,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야시장을 구경하고, 연인들을 위한 부적이라는 조개껍데기 목걸이도 사고, 하루 종일 즐거웠는데,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거지?

또 멋대로 입이 열리고 미운 말이 튀어 나갔다.

전부 자기 잘못 같았다. 좀처럼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답답하고 또 서러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하면 대체 누가 알아준다는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죄 없는 베개만 주먹을 꼭 쥐고 투닥거렸다.

레온하르트가 입을 맞춰 주었던 이마가 유난히 뜨거웠다.

그의 손에 꼭 붙잡혀 있던 손도 불이 붙은 듯 뜨끈뜨끈했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불꽃을 등진 채 괜찮다고 말하는 레온하르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쓰리듯 욱신거렸다.

이미 그녀의 작은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큰 꽃을 피워 낸 연정이란 감정을 엘리자베스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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