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손과 손과 눈과 눈(2)
“결말을 바꿨으면 한다. 에이본, 자네의 이야기 해석은 훌륭해. 하지만... 나는 내 약혼녀와 어마마마께서 슬픔과 안타까움의 눈물보단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흘리셨으면 한다.”
“감동은요?"
“그건 당연히 보증된 것 아니겠는가.”
레온하르트의 말에 에이본은 피식 웃었다.
눈앞의 황태자께선 권력을 남용해 예술가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등 뒤에 숨은 약혼녀와 황후를 핑계 삼아.
"그럼 뭐, 생각해 두신 결말이라도 있습니까?”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지금부터 그가 말하려는 것은 몇 년 뒤, 에이본이 다시 쓰는 결말이었다.
“...그 왕자, 꼭 왕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 건 원전에도 안 나와 있으니 왕이 아니라 알고 보니 왕자인 줄 알았던 거지여도 상관없습죠.”
“그럼 선원이 되어도 상관없겠군?"
“선원?"
에이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왕이 되지 않은 왕자,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왕자,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왕자 등등.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급하게 펜과 잉크를 찾는 에이본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미래의 에이본에게 양해를 구했다.
“선원이 된 왕자와 그의 곁에서 인어로 남으며 영원히 함께 항해한다는 결말은 어떤가.”
기계처럼 정신없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던 에이본의 펜이 우뚝 멈췄다.
에이본은 선원, 인어, 항해. 세 단어만 반복해서 말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완성된 대본집을 마구 찢어 내기 시작했다.
"에... 에이본?"
“권력 남용입니다. 남용이라구요! 당장 공연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주시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나는 자네의 실력을 믿네.”
“차라리 저주를 하십쇼!"
에이본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에게 쏘아붙였다.
레온하르트는 만족스러운 결과에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조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나도, 아바마마도, 사랑하는 반려가 슬퍼서 우는 모습은 아무리 연극이라 해도 보고 싶지 않은걸.”
사랑하는 반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순간 퐁 하고 달아오르며 머리 위로 김이 솟았다.
홀로 남은 에이본은 마지막으로 황태자가 그의 귓가에 속삭인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새를 새장 속에 가둘 생각이라면 적어도 이 세상 전부를 새장으로 만드는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지.”
새장, 새, 자유롭게 자란 바닷가 출신 영애가 황실에서 어떤 일을 겪었지?
에이본의 머릿속은 샘솟는 아이디어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원래 인어 공주 이야기는 어땠는데?"
“뭐야, 리지 너 모르고 있었어?"
"어머니께서 그런 동화 따위는 황후에게 어울리지 않다며 불태우셨어.”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빠드득 이를 갈며 엘리시움 공작 부인을 다시 원망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길을 걸으며 서툴게 인어 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슬픈 이야기였다니....”
“물론 요즘엔 다들 해석이 제각각이야. 동화는 이왕이면 행복하게 끝나는 편이 좋잖아?"
“그런가? 그런데 레온.”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췄다. 레온하르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이야기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해변에서 완전히 정반대 길로 와 버렸다.
낯선 장소에 긴장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팔을 꼭 껴안으며 조금 더 바싹 붙었다.
레온하르트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장소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필 시기가 시기인지라 가장 넓은 대로는 마차의 출입이 제한되고 가장자리를 따라 온갖 노점상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레온하르트는 잠시 갈등하다 혀를 차고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소년을 불러냈다.
“황실 소유 별장... 그러니까 저기 보이는 저 저택으로 가서 황제 폐하께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늦게 돌아간다고 전해. 이걸 보여 주면 아무도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게다. 이 돈으론 너도 축제를 즐기도록.”
레온하르트는 머리에 두르고 있던 두건을 건네며 주머니에서 꺼내 소년의 손에 금화 몇 개와 함께 쥐여 주었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와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번갈아 보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태도로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늦게 돌아가?"
“이제 곧 야시장이 열릴 거야.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엘리자베스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이 종종 야시장에서 샀다며 싸구려 액세서리를 자랑하고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었다.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어른도 없이 정말 괜찮을까?"
"내가 있잖아. 나는 이제 곧 성인이라고, 거기에 이 검은 오직 레이디 엘리자베스... 아니지, 오늘만큼은 이졸데라고 부르는 쪽이 더 나을까?"
“이졸데?"
“여긴 우리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오늘 하루만 황태자도, 레이디도 아닌 그냥 평범한 백성이 되어 보는 건 어때?"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 그럼 트리스탄 경, 오늘 하루 에스코트를 부탁드려요.”
아직 불안함이 남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걱정 말라는 듯 엘리자베스의 손등을 토닥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차 속에서 내내 해적들과 선원들의 모험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엘리자베스는 꼭 그런 대모험을 나서는 기분이었다.
* * *
저녁노을이 언덕길을 따라 새빨간 불꽃을 흩뿌리기 시작하자 허공에 빨랫줄처럼 걸쳐져 있던 등불에도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크리스털 샹들리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조명 장식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탄성을 터트렸다.
"슬슬 가실까요? 이졸데.”
“좋아요! 트리스탄.”
오늘 저녁만큼은 두 사람은 황태자 레온하르트와 그의 약혼녀 엘리자베스가 아닌 어린 연인 이졸데와 트리스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노점상에 펼쳐진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만든 온갖 장신구들을 신기하단 듯 구경했다.
“짝이 맞는 조개껍데기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쌍뿐이지. 부부의 화합과 연인들의 사랑 부적으로도 많이 쓰여, 아가씨.”
“정말요?"
상인은 조개껍데기 속에 반짝이는 모래와 아주 작은 불가사리, 산호초, 그리고 바닷물을 넣고 유리로 막은 조개껍데기 장식을 보여 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신기해. 이런 게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이렇게 유리로 조개껍데기를 어항처럼 만든 건 여기 아니면 못 구해. 얼마전 엄청 키가 큰 기사님도 부인과 함께 신기하다며 아주 좌판을 싹 쓸다시피 해 갔어.”
“레, 트리스탄... 설마 그 기사님이...."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은 아니겠지...?"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 아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허공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뭐야, 기사님과 아는 사이야? 어쩐지 입고 있는 옷이 때깔부터 다르다더니. 좋아! 기분이다. 그 기사님 덕분에 이미 벌 만큼 벌었어. 싸게 해 줄게, 하나 가져가.”
그 기사님과 눈앞의 작은 고객님들의 관계를 순식간에 읽어 낸 상인은 인심썼다는 태도로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상인치고 정가보다 저렴하게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신중하게 조개껍데기 한 쌍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걸로 할 거야? 아가씨와 도련님을 닮아 예쁘장한 걸로 잘 골랐네.”
상인은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고른 조개껍데기 속엔 푸른 산호와 보랏빛 산호가 들어 있었다.
“이 바다가 전부 마를 때까지, 저를 행복하게 해 주시겠어요?"
"원한다면 바다가 아니라 산호초가 시든 뒤로도 평생.”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상인이 덤으로 준 조개껍데기로 만든 팔찌에선 기분 좋게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슬슬 길을 따라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버터를 아낌없이 사용해 감자를 굽고 그 위에 소금을 친 감자구이와 옥수수를 통째로 호탕하게 구워 꼬치를 끼운 옥수수구이 앞에서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교환했다.
“저건 뭐야?"
신기한 듯 거리의 음식을 구경하던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멈췄다.
감자구이와 옥수수구이 중 뭐가 더 맛있을지 고민하며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꽂힌 곳을 따라간 레온하르트는 순간 움찔했다.
오징어를 통째로 구워 파는 가게였다.
“저건 오징어라는 건데... 뱃사람들 사이에선 크라켄의 시종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 식감이 쫄깃하긴 한데 아무래도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좀 희귀하긴 하지...?"
“나 저거 먹어 보고 싶어!"
"리, 아니. 이졸데?"
엘리자베스는 눈을 빛내며 레온하르트를 졸랐다.
저런 모양을 엘리한 먹을거리는 엘리자베스의 인생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모험을 하려면 늘 그에 따른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법. 훌륭한 모험가의 마음가짐으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먹고 후회하지 않기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시선으로 오징어구이를 구경하다 흔쾌히 한입 베어 물었다.
“...어때?"
엘리자베스는 한참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오징어구이는 보들보들해 보이는 겉과 달리 무척 오랫동안 씹어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쫄깃쫄깃하고... 버터 맛이 나고.. 또, 짭조름해.”
"다 먹을 수 있겠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고 신기한 먹거리가 눈앞에 이렇게 가득 있는데 랍스터나 새우구이같이 황궁에서도 익히 접한 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곧 불꽃놀이를 한다는데, 조금 쉴 겸 어디 앉아서 먹을까?"
광장의 벽보를 확인한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에게 권했다.
불꽃놀이는 황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행사였다.
하지만 밤이 되고 어두워져 어디부터 하늘이고 어디부터 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밤바다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은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거라고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결국 둘은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 불꽃놀이를 구경하기에 좋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침 인적도 드물고, 밤바람은 시원하고, 파도 소리만 간간이 들려와 제법 운치가 느껴졌다.
딱 한 가지, 한참 전부터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뒤를 쫓아오던 검은 무리들만 제외한다면 여름의 추억을 만들기에 아주 완벽한 곳이었다.
“이졸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왜 그래, 트리스탄?"
레온하르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터벅터벅 앞으로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거기,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손가락은 열 개지만 손가락뼈는 그보다 많거든? 전부 부러뜨리기 전에 끝내지."
레온하르트의 위협에 수풀이 들썩거리더니 그들을 쫓던 무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결코 호의적이라고 볼 수 없는 그들의 첫인상에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이것만 기억해. 이졸데에게 손댔다간 네놈들의 손가락뼈가 몇 개인지 직접 알게 해 주겠어.”
“어이쿠 무서워라! 그런 비열한 짓보다 우리 같은 바다의 신사들은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을 선호하지.”
“바다의 신사... 해적인가?”
"바다의 신사라니까! 자, 도련님. 이것 잘 봐.”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한 손에는 검을 쥐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쥐었다.
"이놈의 이름은 대화고, 이 녀석의 이름은 협상이야. 어느 쪽을 선택할래?"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이졸데, 내가 눈 떠도 좋다고 할 때까지 눈 감고 있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