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손과 손과 눈과 눈(1)
황실 가족이 다 함께 바닷가로 휴가를 가기로 했다는 말에 알베르트는 레온하르트의 검을 받아 내며 말했다.
“아... 그곳.... 말씀이십니까... 저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지요.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부인이? 아니며 바다가?"
"바다를 보며 환하게 웃는 부인이... 아니, 이게 아니라. 전하!"
“기념품으로 부인에게 드릴 특산물이라도 사 올까?"
“...그러면 감사한 일입니다만, 아무튼 어째 그런 좋은 곳으로 가신다는 분치곤 표정이 영 어둡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이젠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알베르트의 빈틈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알베르트의 기대와 예상대로 레온하르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검술을 어느 정도까지 익혔던 사람처럼 성장하더니 이젠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극제 소식은 들었는가?"
"아, 마침 카탈로그를 가져왔습니다. 시간이 되면... 어이쿠. 갈까 했는데, 휴우. 이렇게 되었네요."
“경, 집중하지 않으면 큰일 나네.”
“집중을 방해하신 건 전하시지 말입니다!”
알베르트는 간단하게 상대방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등 뒤로 이동해 그의 팔을 꺾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이번에도 알베르트의 승리였다.
"그 카탈로그 좀 보여 주게."
레온하르트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알베르트에게 말했다.
알베르트는 업무용 책상 위에 있던 서류 중 유난히 알록달록한 종이를 내밀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왕자님 곁에서 절대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인어 공주는 마침내 물거품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는다...?"
"이번 해석은 그렇다고 하더군요. 뭐, 작년처럼 왕자가 사실 미친놈이라 멀쩡한 여자의 발목 힘줄을 자르고 독을 먹여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첩으로 삼는 것보다야 훨씬 건전한 내용 아닙니까?"
“...그런 해석이 용케도 무대에 올라왔군.”
"덕분에 한동안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좋은 정보 고맙네. 그럼 휴가 끝나고 다시 보지.”
“아, 전하. 그... 외람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대련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엘리자베스를 위해 서둘러 돌아가려던 레온하르트를 알베르트가 다급히 붙잡았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두엇은 더 큰 거구의 사내가 어쩐지 애먼 곳만 쳐다보며 볼을 붉히고 있었다.
"그... 가시거든... 미역 긴 걸로 한 줄기만 구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미역?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미역은 왜... 설마?
“설마 알베르트 자네....”
"크흠, 흠! 으흐흠! 으흠!"
레온하르트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베르트는 빠른 걸음으로 대련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최고급, 무조건 최고급으로 부탁드립니다! 전하! 예? 듣고 계십니까? 전하!"
* * *
"이상한 냄새가 나요.”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만끽하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 말에 황후 또한 창문으로 다가가더니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에 잡히는 바람은 분명 짭조름한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다 냄새란다!”
“바다 냄새요?"
“이 특유의 소금기 어린 축축한 바람, 해초의 비린내. 정말 고향으로 왔구나!"
황후는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잔뜩 들뜬 얼굴이 되어선 감격한 투로 말했다.
레온하르트와 황제는 사랑하는 여인들을 보며 똑같은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저기 하얀 새들이 보여요! 저 새가 갈매기인가요?"
"그렇단다. 조금 더 바다에 가까워지면 재밌는 걸 보여 줄게.”
“재밌는 것...?"
황후는 금방이라도 마차 밖을 뛰쳐나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황후의 가슴속에서 억지로 지워져야 했던 옛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렸던 기억, 해변의 검은 돌 위에 드러누워 따사로운 햇볕을 만끽하던 일, 고향을 떠나기 전날 밤, 백사장에 홀로 앉아 파도 소리에 눈물을 글썽였던 추억까지.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황제와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동시에 황후를 향했다.
황후는 아련한 표정으로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살아서 다시 바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다니. 혹시 꿈이 깨지는 건 아니겠지요?"
* * *
황후의 고향이었던 영지는 그녀의 가문을 이을 만한 마땅한 사람이 남지 않아 자동으로 황실에게 반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의 백성들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휴양지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황실에서 내려온 관리들은 황제의 명에 따라 백성들이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무엇을 하든 적당히 내버려 두고, 오히려 그들이 자치회를 만들거나 조합을 만든다 하면 선뜻 허가를 내어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황후가 사랑했던 고향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발전시켜 나갔다.
이제는 황실의 여름 별장이 된 저택에 돌아온 황후는 그때까지도 저택을 관리하고 있던 늙은 사용인들과 무척 오랜만에 안부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왜 진작 황후와 함께 이곳을 오지 않았을까 후회했고, 레온하르트는 그런 아바마마를 보며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잠깐, 리지를 고향으로 보낸다는 건 그 지긋지긋한 엘리시움 공작저로 다시 보낸다는 거잖아? 아냐 아냐, 취소. 방금 전 그 다짐은 취소다.'
"레온? 왜 그래?"
"리지, 여기를 네 두 번째 고향으로 삼는 건 어떨까?"
"응?"
레온하르트의 엉뚱한 소리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인들이 짐을 정리하는 사이 황실 식구들은 가볍게 해변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원단 자체에 자잘한 주름이 진 하얗고 얇은 린넨으로 만든 선드레스는 아래로 갈수록 점점 더 풍성해지는 세 단 짜리 티어드 스커트가 달려 있었다. 그 위로 여린 피부가 햇볕에 다치지 않도록 성기게 짠 레이스 볼레로를 걸친 엘리자베스는 발등에 보석과 매듭장식이 달린 이국풍 샌들을 신고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는 것으로 해변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황후 또한 황후라는 이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드레스 차림으로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옛날에 입던 옷을 입어도 좋은데.”
“아쉽게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요. 황실에서 너무 편하게 지냈나 봐요.”
바람이 불면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품이 넉넉한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허리에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검까지 차고 머리에는 선원들처럼 머릿수건을 쓴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해변가에 도착한 황후는 갓 튀겨 낸 감자튀김을 손에 쥐고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을 자유로이 활강하던 갈매기 중 한 마리가 날렵한 솜씨로 그녀의 손에 있던 감자튀김을 낚아챘다.
“세상에!”
“이것 보렴, 재밌지?"
엘리자베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황후는 아예 하늘 높이 감자튀김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만 보던 엘리자베스는 용기를 내어 감자튀김을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강하게 제 손에 있던 것을 끌고 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엘리자베스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다시 감자튀김을 들어 올리고, 황후와 함께 허공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황후와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하얀 갈매기들이 모여 끼룩끼룩 소리를 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황제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연극제의 연극 결말을 아무래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이 과연 내 말을 들어 줄까?'
여름 해변에 어울리는 서늘한 과일주스를 마시다 말고 황제는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인상까지 찌푸리며 고민에 빠진 제 아들을 흘끗 바라봤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아바마마... 그... 으음... 아닙니다.”
"말해 보거라. 모처럼 다들 즐거운 시간인데 너만 그런 표정을 하는 건 황명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 아바마마께서 농담을 하신 건가?
레온하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다, 몇 번 입술만 달싹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기선 역시 황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어마마마의 그림 말입니다.”
"아... 자유라고 이름 붙인 그 바다 그림 말인가. 그것이 왜?"
“바다는 예로부터 자유를 상징했지요. 어마마마의 고향이 바다고, 또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와 만나기 전 어떤 분이셨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다를 그리워하시거나 그러는.... 에이잇! 아바마마,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뭐, 무얼 말이냐.”
한참 바다와 자유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을 늘어놓으려던 레온하르트는 이래선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목적을 말할 수 없겠다 판단하며 대뜸 본론을 털어놓았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허어, 이놈이?"
황제는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먼저 알아차린 아들을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신경 쓰이시죠.”
“네 말을 듣고 나니 굉장히 신경 쓰이는구나.”
“그런데 하필 이번 연극제의 결말이 인어 공주가 진짜 자신이 원한 건 자유였다는 것을 알고 물거품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놈! 갑작스럽게 이야기의 결말을 까발리면 어찌하느... 뭐라?"
“신경 쓰이시죠?”
“몹시도 신경 쓰이는구나. 그래서?"
“저도 아바마마를 본받아 슬슬 권력남용을 하는 방법을 익혀 볼까 합니다.”
"예술가들의 의사는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역시 신경 쓰이시죠?"
레온하르트는 히죽 웃으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바마마께서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짐은 황태자의 행동을 막지 않겠다. 그러나 권하지도 않겠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허락인 듯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 낸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불러 그녀와 함께 백사장 한편에 마련된 야외무대로 향했다.
"에이본, 있는가?"
연극제를 코앞에 두고 바삐 움직이던 인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그중 마치 맡겨 둔 물건을 찾는 투로 연극제의 총책임자를 찾는 청년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막 휴식을 취하려던 인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인부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윗사람으로, 그리고 윗사람은 다시 그 윗사람으로 황태자와 그녀의 약혼녀의 방문을 알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화, 황태자 전하! 다들 무엇 하느냐! 당장 예를 갖추지 않고!"
"누가 나를 찾는... 어이쿠, 이거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엘리자베스는 낯선 사람 앞에 서게 되자 버릇처럼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물러섰다.
잔뜩 까치집이 된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타난 에이본은 이번 연극의 총책임자를 겸하고 있는 각본가였다.
"결말을 바꿨으면 한다.”
어제도 대본을 쓰다 잠들었는지 얼굴 한쪽에 활자 자국이 그대로 남은 에이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다들 나가.”
“에, 에이본!"
“나가라고!”
예술가들은 다들 어딘가 미쳐 있거나 괴팍하거나 괴짜다, 라는 세간의 인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에이본의 태도에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둘, 아니 셋만 남자 에이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