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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36화 (36/130)

36화 파도가 부르는 노래(3)

레온하르트는 기척을 숨기고 엘리자베스의 굳게 닫힌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훌쩍거리는 소리와 베일리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지가... 나 때문에 또 울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뒤로 휘청거리며 움직이다 꿍, 하고 뒤통수를 벽에 박았다.

'어쩌면 좋지? 사춘기 여자애를 달래는 방법 같은 건 책에도 안 나와 있을 거 아니야!'

발만 동동 구르며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하면 엘리자베스를 다시 웃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디 놀러 가자고 할까? 아냐, 오늘은 더 걷기 싫다고 했잖아. 오늘은? 오늘은 걷기 싫으면, 내일은 걷겠다는 걸까? 외출? 외출이라... 음... 으음.... 으 으음.... 그거다!'

레온하르트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어쩌면 어마마마의 비극도 막고, 엘리자베스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 주고, 모두가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지...? 들어가도 될까....?"

“오지, 마세요! ......훌쩍....”

"그... 그러면 그냥 여기서 말해도 될까....?"

“전하야말로 뭐든지 멋대로 해도 되는 분이시잖아요? 맨날 저보고 마음대로 해라, 뭘 해도 좋다, 하고 싶은 걸 해라 하시기 전에 전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세요!"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도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못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계속해서 얄밉고 남을 상처 주는 말만 입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코를 훌쩍였다. 이 이상 입을 열었다간 정말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두려웠다.

'정말 사춘긴가 보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괜찮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책장을 뒤엎거나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나무를 자르거나....

'그 나무가 그래서 잘린 거였구나!'

레온하르트는 죄 없는 나무에게 사과했다. 여름을 맞이하여 황태자의 정원에서 가장 크고 너르게 가지를 뻗은 아름드리나무는 바람을 타고 가볍게 가지 끝을 끄덕여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래도 리지가 싫다는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다행... 이지 않아! 전혀 아니야! 이런 거 말고, 좀 더... 좀 더..... 아니, 나한테 싫다고 하는 거 말고 다른 싫은 걸 싫다고 해야지 멍청한 레온하르트! 아냐... 솔직히 리지가 나에게는 늘 긍정해 주면 좋겠어...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 욕심이고 지금은 리지 달래는 일에나 집중해, 이 멍청아!'

레온하르트는 대리석 벽에 정수리를 대고 자신을 호되게 질책하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마와 뒤통수, 정수리까지 골고루 부딪힌 머리보다 리지로부터 거절당한 마음이 더 아팠다.

“그럼 네 말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거야. 리지, 바다에 가지 않을래? 아니다. 이건 명령이야. 레이디 엘리자베스, 나와 바다에 가도록.”

“.......바다?"

한참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딸기처럼 코가 붉어진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베일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베일리를 향해 왜 그런 눈으로 보냐며 눈빛으로 추궁했다.

베일리는 주인을 울린 못된 사람의 구두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시 베일리를 말리려는 엘리자베스와 그런 주인을 이해하지 못한 베일리와 사랑하는 반려견에게 발을 물린 레온하르트 사이에서 짧은 소동이 지나간 뒤에야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물어볼 수 있었다.

"바다 본 적 있어?"

"없... 어요....”

평생 엘리시움 저택 아니면 황궁에서만 살았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다가 어떤 건지는 그녀도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자연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스승이 감탄을 할 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바다를 말할 때면 늘 등장하던 드넓다는 말이라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어떤 건지 궁금증이 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우리 어마마마께서 바닷가 항구 출신이신 건 너도 알고 있지?"

“네. 제국에서 제일가는 휴양지라고 알고 있어요.”

“...그냥 편하게 말해.”

"그것도 명령인가요?"

“그럼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거야?"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라면서요.”

“...마음대로 해. 하여튼 이제 곧 여름이기도 하고, 마침 여름이면 그곳에서 연극제가 열리거든.”

“연극제?"

“어마마마의 고향에서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만든 연극이야. 같은 줄거리를 매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또 연출하는지 이번 기회에 너도 직접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바마마가 그곳에서 어마마마께 한눈에 반하셨거든.”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열일곱, 이제 겨우 사춘기, 꿈속에 백마 탄 왕자님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소녀가 가슴을 두근거리기에 딱 좋은 소재였다.

'아바마마를 팔아먹는 기분이라 조금 미안하긴 한데... 이게 다 전부 모두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니까 봐주세요!'

레온하르트는 황후의 처소에서 나른한 낮잠에 빠져 있는 황제를 향해 몰래 용서를 구했다.

“바다는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그리고 연극제 마지막 날 올라오는 작품은 예술성과 교양과 기타 학습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갈래!”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엘리자베스의 새침하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다시 순한 양처럼 돌아왔다. 호기심과 흥미,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을 확인한 레온하르트는 그 길로 에스코트를 하듯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어. 부디 함께해 주겠어?"

"기꺼이요!”

엘리자베스는 다시 밝게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팔 위로 손을 얹었다.

* * *

"바다에 가고 싶어요.”

황후의 말에 황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다... 바다 좋지. 그런데 프레이야, 나는 바다보다는 바다보다 넓은 내 사랑의 품이 더 좋은데....”

“바다는 끝이 없지요. 어릴 때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무척 궁금했어요.”

"나는 내 사랑의... 후우, 프레이야. 혹시 짐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소?"

몸을 일으켜 양팔로 황후의 어깨 위를 짚어 그녀를 품에 가둔 황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황후는 백일몽에 빠진 듯 몽롱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그 너머에 다른 왕국이 있다는 걸 알지만... 폐하와 처음 만났던 날 저는 수평선 너머를 향해 달리기 위해 말을 타고 있었어요. 기억나세요?"

"어마마마와 그 시녀들의 눈을 피해 낮잠을 자다 말발굽에 머리가 으깨질 뻔한 사건이라면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지.”

황제는 다시 은근슬쩍 황후의 품에 다시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바다에 가고 싶어요. 파도가 보고 싶어요. 궁정 악단들의 따분하고 지루한 음악 말고, 갈매기의 노랫소리가 듣고 싶어요. 폐하. 네?"

“프레이야.”

황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겐 잠시 국정을 맡겨 놓아도 안심할 수 있는 뛰어난 대신들이 있었고,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는 데다, 또....

"폐하,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누구의 알현 신청이라고?

황제와 황후는 다급히 옷을 찾아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조금 억울한데. 내 사랑은 원피스 하나, 숄 하나면 되는 것을 나는 셔츠에, 바지에, 또....”

“그럼 폐하께 제가 입던 잠옷을 드려야겠군요.”

"프레이야!”

아이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황후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아져 있었다.

“원래 알현 신청이 이렇게 오래 걸렸나?"

“음... 이번엔 우리가 때를 잘못 맞춘 것 같아.”

“때?"

“그런 게 있어.”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황후궁의 침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시종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종은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설명해서 시간을 벌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들라 하라.”

황제의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와 함께 황후궁 침실의 문이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의젓한 걸음으로 엘리자베스와 함께 어마마마의 침실로 들어갔다.

'저 그림은....'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붙잡은 건 예의 바다 그림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작은 배, 그러나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대뜸 용건부터 말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자 청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새아가는 그새 더욱 아름다워졌구나! 혹시 원하는 것이 있느냐? 황후와 함께 그림을 배워 보련? 아가를 위해서라면 청금석이 아니라 금강석이라도 얼마든지 갈아다 물감에 섞어 주마!"

"아바마마....”

"어 그래, 왔느냐. 청이 있다고? 일단 들어는 보자꾸나.”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의 저렇게 지극한 며느리 사랑을 조금 가져갈 여동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바다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뭐? 안 돼.”

"그러자꾸나!"

“프레이야!”

황태자의 말을 한마디로 묵살하려던 황제는 뒤이은 황후의 말에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엘리자베스는 그사이 황제의 품에서 슬쩍 빠져나와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갔다.

"프레이야,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아이들 앞이에요. 이야기는 이쯤 하셔요, 그래. 우리 아가들. 갑자기 바다는 왜 보고 싶어졌니?"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엘리자베스는 두근두근 기대로 잔뜩 부푼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의 고향에서 열리는 연극제가 보고 싶습니다. 저...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기도 하고... 날씨도 이제 여름이니 전하께서 먼저 권해 주셨어요.”

"황태자가? 기특하기도 해라. 폐하, 아예 이참에 황실 가족 전체가 피서를 가는 건 어떨까요?"

“...아주 좋은 생각이오! 내 사랑 프레이야.”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하라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폐하께선 바다를 싫어하시나요?"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허락을 받아 물감과 붓을 구경하다 어딘지 석연찮은 표정의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전하께서... 음... 두 분께서 처음 만나신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 보고 싶어졌어요."

"황태자가? 프레이야, 혹시 우리 첫 만남 이야기를 레온 녀석에게 한 적 있소?”

"아니요...? 그러는 폐하야말로 혹시...."

황제는 눈만 껌뻑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깨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은 폐인이 된 황제가 술주정을 부리며 주절거렸던 이야기였다.

“그, 그러고 보니 리지가 궁에 온 이후로 다 함께 어딜 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폐하.”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황제와 황후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자꾸나. 마침 황후께서도 조금 전까지 바다 이야기를 하시던 참이었지.”

황제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의외로 쉽게 떨어진 허락에 좀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어마마마께서도요?"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다시 덜컥 내려 앉았다. 모든 일이 좋지 않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이맘때면 연극제를 위해 해변에 무대를 설치하고, 나는 오라버니들과 간이 무대 주위에서 뛰어놀곤 했었지...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어서 채비를 하자꾸나.”

반가운 비를 만난 선인장은 그동안 갈증을 참고 인내한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꼭 그런 모습으로 황후는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마냥 기뻐서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뛰어오를 듯 좋아하는 엘리자베스와 장단을 맞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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