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35화 (35/130)

35화 파도가 부르는 노래(2)

“레온?"

엘리자베스였다. 레온하르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밖으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왜 그래? 조금 전 황태자궁의 시녀들이 의사를 찾으며 달려 나가던데, 혹시 다쳤어?"

"엘리자베스.”

"으... 응?"

엘리자베스는 몹시 지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대충 수건으로 닦는 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와 차갑고 낮게 가라앉은 제비꽃빛 눈동자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읽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감정을 추측하는 대신 심장 한편을 간질이는 감각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 제비꽃이 깃든 눈동자, 가을날의 밀밭처럼 풍성한 속눈썹과 빛을 받을 때면 우아하게 꺾이는 콧날, 늘 다정한 말만 해 주는 부드러운 입술.

조금 전 본 하얗고 빨간 눈을 가진 소년이 토끼라면 레온하르트는 이름 그대로 사자를 닮아 있었다.

비록 이제 겨우 그럴듯한 갈기가 자라기 시작한 사자였지만 자신의 약혼녀를 위해 헌신하고 모든 좋은 것은 그녀에게 먼저 권하는 모습은 하녀들의 입을 타고 온 황궁 전체에 퍼져 있었다.

황궁만일까, 사교계에서도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이름은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특히나 두 사람이 사춘기를 맞이할 나이가 된 지금 두 사람의 연애 사정은 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굶주린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소재였다.

지금도 어느 부인의 티 파티에서 설탕처럼 달콤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부인들의 부채 사이를 오가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영애께서도 전하께 아주 깊은 애정을 느끼고 매일 밤 그분의 꿈을 꾸시는 것 아닐까요?'라는 소문과 다르게 정작 당사자인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그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왜 이런 모습을 한 그를 보면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전하께서 그만큼 영애를 위하시기 때문이겠지요.'라는 소문처럼 자신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냐고?

레온하르트는 무너지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녀가 늘 웃는 얼굴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다정하고 유쾌한 말만 하길 바랐는데.

정작 이번에도 자신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엘리자베스를 걱정시키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엘리자베스....”

“미안해? 뭐가? 갑자기 왜 그래? 정말 어디 다쳤어? 또 머리라도 박은 거야? 내가 그거 그만하랬지! 머리 나빠진단 말이야.”

“어쩌면 네 말대로 나는 이미 충분히 멍청해진 걸지도 몰라. 희대의 얼간이! 머저리! 어리석은 놈!”

“레, 레온...?"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겨우 열아홉의 어린 황태자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레온하르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진행하다 말고 종종 벽이나 탁자 따위에 머리를 박는 레온하르트의 이상 증세를 미미르에게 상담했을 때 미미르는 마법의 솥을 휘휘 휘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춘기라 그래.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나중에 오밤중에 이불 찰 테니 그냥 둬’

'그래도... 레온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희대의 성녀 나셨네. 너는 전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매번 레온, 레온. 그러는 거야? 아무리 미래에 결혼을 약속했다지만....’

'그야 레온은 멋지고! 늘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상냥한 데다, 나를... 즐겁게 해 주니까...'

'하여튼 요즘 애들은 조숙하다니까. 다음에 또 전하께서 그러시거든 등이라도 토닥여 주며 아이구 착하다 오구오구, 하고 달래 보든가.'

'오구오구? 마법의 주문이야?'

'응. 아주 효과 좋은 주문이니 나중에 사람들 잔뜩 있는 곳에서도 한번 써 봐. 나한테 결과 알려 주는 것 잊지 말고.'

아무래도 지금이 그 마법을 쓸 때인 것 같았다.

"아이구 착하다, 우리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오구오구.”

레온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뭘, 뭐라고?

“착하다, 착하다. 레온이 대체 나한테 미안할 만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 혹시 나 몰래 혼자만 맛있는 것 먹기라도 했어? 그래도 괜찮아. 레온은 빨리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해."

“...리지....”

레온하르트는 어린 약혼녀의 품 안에서 복잡한 생각과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이 반, 허탈함이 반, 그리고 황당함이 아주 약간 섞인 복잡미묘한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본 엘리자베스는 미미르가 가르쳐 준 주문의 효험에 감탄했다.

"미미르가 또 이상한 것 가르친 모양인데... 나는 괜찮아. 너 몰래 뭐 먹지도 않았고, 또....”

“이렇게 이마가 새빨간데?"

“.....미끄러져서 그래. 책상 앞에서 졸다가.”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앞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꼭 자기가 다치기라도 한 듯 눈썹을 모으며 안타까워했다.

그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다시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표정 말고 웃어 줘, 리지.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 있는 거 아니었어?"

"황궁에서 매일 놀고먹는 게 일상인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누구누구 전하와 달리 숙제도 이미 끝냈는걸?"

“아 맞다, 숙제.... 숙제 좀 보여 주면 안 될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지을 줄 아는 가장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볼에 바람을 넣어 잔뜩 부풀리고 눈썹을 찌푸린 엘리자베스가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겁에 질린 척 손사래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나 혼자 힘으로 할게. 할 수 있어.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스스로 척척척 스스로....”

“또 그러면 그땐 진짜로 화낸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귀엽고 하찮기만 한 위협에 어울려 주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그때까지 엘리자베스의 품에 끌어안겨 있던 것을 알아차리고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에 그의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짙고 동그란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미, 미안. 옷 다 젖겠다. 아, 일스 녀석 소개해 줄까? 왜 그... 토끼처럼 하얗고 빨갛고 커다란 책 들고 있었다는 애.”

“미미스 브룬느 님을 만나러 갔으니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장미 정원 산책이라도 할래?"

"으음... 오늘은 더 걷기 싫어.”

"그러면....”

“낮잠 잘래. 침대 빌려줘.”

레온하르트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며 안심한 엘리자베스는 발랄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미 정원을 걷는 것도, 황궁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것도, 기사들의 검술 대련을 감탄하며 보는 것도 모두 해 본 일이었으니 이번엔 해 보지 않은 일을 하고 싶었다.

"네 침대는 어쩌고?"

"베일리가 자고 있어.”

“또?"

차마 사랑하는 반려견을 질투할 수 없어 레온하르트는 머리의 물기를 짜는 척 머리카락만 잡아당겼다.

"그... 그래... 푹 자.... 나는 숙제든 뭐든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레온하르트는 발자국 대신 작고 동그란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책상으로 가더니 정말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는 대신 레온하르트의 넓은 등과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갈래.”

“어? 어어... 그래....”

“나 간다니까?"

"응? 그, 그래. 잘 가...?"

“안 말려?"

말려? 뭘 말려? 머리를 말려?

레온하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봤다.

엘리자베스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못마땅하고 불만에 가득 찬, 그리고 실망감이 깃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뭔진 몰라도 굉장히 큰 잘못을 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시계탑의 미미르에게 가서 시간을 되돌려 달라 해야 하나...?'

“내... 내가 왜 말려......? 리지 네가 하고 싶으면 뭐든 해도 괜찮아. 내가 허락 하는 일인데 뭐.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방이지만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침대? 침대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 바보!"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황족 모독죄에 해당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길로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라고 해도 여전히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맞은 편 방을 처소로 삼고 있었다)로 달려 나갔다.

홀로 남은 레온하르트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황당해했다.

엘리자베스가 대체 왜 저러지?

'설마... 설마 리지에게 사춘기가 온 건가? 반항기? 그 상냥하고 마음씨 고운 리지가? 설마 리지도 가출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밥상을 뒤집거나 하진 않겠지?'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첫 번째 사춘기 시절 했던 만행들을 떠올려 보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침대 구석에서 베일리를 붙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요즘 들어 좀처럼 감정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를 보면 심장이 콩닥콩닥 아프게 뛰었다. 그러면 그 낯설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괜히 심술이 나서 그를 놀리거나, 괴롭히고 싶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이 한 말에 상처받는 일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모르고 있는 일이었으나 그녀를 담당하는 황태자궁의 시녀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사춘기가 오면서 황태자 전하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은 다들 괜찮다고, 내 나이에는 다 그러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혹시라도 이런 내 행동에 레온하르트가 실망하고, 지금이라도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어쩌지?

상상만으로도 싫은 일이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와앙 울음을 터트리며 베일리를 붙잡고 물었다.

“베일리, 네가 보기에도 나 많이 이상해?"

"멍?"

“...됐어. 사람이랑도 말이 안 통하는데 개라고 말이 통하겠니. 훌쩍.”

베일리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훨씬 똑똑하고 영리했지만 아쉽게도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의 심리 상태를 전부 이해할 정도로 지혜롭지는 못했다.

왜 주인이 저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베일리는 낑낑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주위를 맴돌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져왔다.

이거 줄 테니 웃어 줘.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혀를 반쯤 내밀고 헥헥거리며 웃는 베일리를 보며 오히려 더 표정을 찌푸리더니 아예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가?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누가 주인을 해치려는 걸까?

베일리는 웃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두 발로 서서 주인에게 기대면 주인은 못 이기는 척 바닥으로 드러누웠고, 이내 자신과 함께 웃으며 바닥에서 한참을 뒹굴어 주었다.

그러나 주인은 바닥으로 쓰러지는 대신 베일리를 꽉 끌어안으며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주인의 볼을 타고 흐르는 짠물을 핥는 것과 동시에 주인의 품에서 나는 냄새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름대로 추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진 몰라도 주인과 늘 함께하던 남자가 주인을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다음에 만나면 구두를 물어뜯어 버려야지. 베일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자베스가 조금 더 자신의 푹신푹신한 털에 얼굴을 묻을 수 있도록 품을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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