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파도가 부르는 노래(1)
프레이야 야반나 폰 에스페도르는 황후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반짝반짝하게 닦인 창문 너머, 햇살이 수백 갈래로 눈부시게 부서지는 날이면 종종 황후는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캔버스와 물감을 꺼내곤 했다.
황제의 방문에도 황후는 붓을 놀리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그림에 집중할 때면 눈에 그림 외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조용히 손짓으로 시녀들을 물리고 의자에 앉아 황후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후는 반짝이는 햇살 아래 꼿꼿하게 등을 펴고 앉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물처럼 잔잔하게 머금고 물감으로 얼룩덜룩해진 손을 쉴 새 없이 놀리고 있었다.
황제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붙여 네모난 모양을 만들었다.
손으로 만든 액자 속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 담겼다.
사람들이 보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는 황후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 가지 일에 집중해 입술을 살짝 벌리고 캔버스에 바짝 붙어 앉아 숨을 죽인 채 묘사에 집중하는 황후는 오직 그만 볼 수 있는 그녀의 진짜 모습 중 하나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후의 몇 안 되는 취미는 꽃꽂이와 그림 그리기, 그리고 시 감상하기가 전부였다.
그 외에도 황후는 신부 수업을 하는 숙녀라면 누구라도 존경하고 우러러볼 만큼 조신한 자태로 자수를 놓거나 한 나라의 국모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학식을 위해 어려운 철학서를 읽고, 또....
황제는 황후의 보물 상자 속에 숨겨진 작은 말 안장 하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즐길 때 황후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은지 황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웃음이 어떤 고통 속에서 얼마나 천천히 스러졌는지 또한 황제는 알고 있었다.
선대 황후, 그러니까 황제의 어머니이자 프레이야의 시어머니 되는 분은 만년설처럼 무척 냉정하고, 엄하고, 조금 속된 말로 말하자면 깐깐한 성정을 가진 분이었다.
그녀가 황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존재하는 사이 황궁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분은 늘 있던 자리에.
꽃은 계절에 맞는 꽃을 매일 같은 모양으로 다듬어 화병에 꽂아 놓고.
식기는 물론 책상 위 서류조차 흐트러지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며.
액자 속 그림은 바뀌지 않았고, 서재에 가득한 학술서와 철학서가 시집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정원에선 처음 보는 꽃이 피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자 세상에서 당연한 일이라 여기시던 그녀는 매일 잠들던 시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영면하셨다.
그리고 프레이야 야반나, 항구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가문의 영애는 가엾게도, 황후가 되기엔 제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소녀였다.
황제는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캔버스 앞에 앉아 집중하고 있던 황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캔버스 속엔 그의 눈에도 익숙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알아차린 황제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분명 그림 속에 있는 바다는 그녀의 고향 바다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왔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바닷가, 수평선이 그대로 보이는 하얀 꽃이 만개한 언덕, 소금기가 포말이 되어 몰려오는 해변에서 여름 피서를 즐기던 황태자와 공작가의 소중한 막내딸은 첫눈에 반했다.
유난히 길들이기 까다롭던 종마를 달래며 들판을 달리다 황태자를 그대로 말발굽으로 밟아 죽일 뻔한 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냥 그런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날, 유독 노을이 새빨갛던 저녁.
평생을 바닷가 갈매기와 함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거닐고, 들판을 달리고, 그러다 지치면 길가에 열린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햇살 아래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던 공녀님은 황태자의 청혼을 받았다.
프레이야는 진심으로 기뻐했으나 동시에 고민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오직 자기 하나만을 믿고 황실로 들어오길 청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붉은 노을을 본 프레이야는 청혼을 수락했다.
그리고 영특한 프레이야는 황태자비의 관이 머리에 얹히는 순간 자신이 제 발로 새장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태어나기를 새장 속에서 태어나 평생을 갇혀 지낸 신세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황궁으로 온 프레이야는 마구간에서 말과 교감하는 대신 사교계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 되어 다른 귀족들과 마음에도 없는 교류를 이어 가야 했다.
달려서도 안 되고, 종종걸음을 걸어서 도 안 되고, 다만 우아하면서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게 보이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보폭을 유지하는 법을 걸음마를 익히듯 배우는 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들판의 꽃을 꺾어 꽃반지와 화관을 만드는 대신 이름도 어렵고 기르는 것은 더욱 어려운 값비싼 화초들을 접해야 했고, 그것들을 황후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완벽하게 재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황후가 만족할 만큼의 학식과 교양을 쌓을 때까지 시를 읽으며 상상력을 동원해 답답한 황궁이 아닌 드넓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가 되는 것도 금지당했다.
이런 걸 읽었다간 머리가 돌처럼 딱딱해질 거라며 프레이야는 두꺼운 철학서 앞에서 투덜거렸다.
기분 전환 삼아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선물했던 날, 황제는 마치 아이처럼 기뻐하며 그림을 액자에 넣어 처소에 직접 걸어 두었다.
그러나 그 그림은 다음 날 태후의 손에 의해 왕실 보물 수장고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래도 프레이야는 모든 것을 견뎌 냈다. 그녀의 곁엔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비록 황태자의 신분으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황태자비가 엄하고 매서운 황후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당한 날이면 '남편'으로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충분히 울 수 있는 공간을 내어 주었다.
이윽고 황후가 된 프레이야는 말과 교감하는 방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고, 무겁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황궁의 긴 복도를 내달리는 일은 불가능 했다. 예전처럼 시를 읽어도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황후의 품격에 어울리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어느새 그녀는 새장 속 삶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이실두르, 언제 왔어요?"
캔버스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프레이야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그를 첫 눈에 반하게 했던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전에 왔습니다. 내 사랑 프레이야, 무엇을 그리고 있었습니까?"
프레이야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살짝 옆으로 옮겨 자리를 내어 주었다.
황제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그림을 감상하며 깐깐한 평가를 내리려는 것처럼 미간에 작은 주름을 잡아 보았다.
귀하디귀한 푸른 염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표현한 바다는 금방이라도 소금기가 느껴질 것 같은 하얀 파도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엔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었다.
간략하지만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도록 특징을 잘 잡아낸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황제는 조금 더 가까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이군요.”
"누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고 앞치마까지 벗은 황후가 황제의 목에 매달려 가볍게 볼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황제는 그 길로 황후를 끌어안아 침대 위로 눕히며 그림 속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둘 읊기 시작했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황후의 부모와 불운한 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한 그녀의 형제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토록 살아생전 어려워했던 선대 황후까지.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황실 식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는 황후의 품에서 평온함과 안식을 찾느라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번 그림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프레이야는 손을 뻗어 휘장을 치며 대답했다.
“'자유'예요.”
* * *
레온하르트는 한달음에 처소로 달려가 암호문을 꺼내 거울에 비췄다.
[X월 X일, 어마마마 사망.]
하필 올해였을 줄이야!
레온하르트는 누가 볼세라 암호문을 다시 숨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처박아 버린, 아니,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어쩌면 엘리자베스의 인생 또한 망가뜨려 버린 사건을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황후 프레이야 야반나 폰 에스페도르의 공식적인 사인은 익사였다.
황제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했다 해안의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그대로 사망.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어마마마는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계셨다.
아바마마께서 기분을 좋게 해 준다는 온갖 약이며 익살맞은 광대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음유시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그녀는 자유를 원했다.
황제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으나 그것만큼은 줄 수 없었다.
아니, 줄 수 있었다.
어마마마의 죽음에 대해 의문점을 품고 찾아온 레온하르트에게 황제는 술에 잔뜩 취해 반쯤 폐인이 된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광인처럼 웃었다
"프레이야는 내가 자유롭게 놓아주었어!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황실로부터! 그녀는 죽어서야 겨우 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야!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위했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줬다고, 프레이야, 내 사랑. 그럼 나는 누가 자유롭게 해 주지?"
그리고 황실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제는 광인과 정상인의 모습을 오락가락하더니 결국 폐인이 되어 처소에 칩거했다.
그 모습에 황태자이자 아들로서 제발 정신을 차리라며 간청하던 레온하르트는 가까스로 폐태자가 되는 일만은 면하며 자신의 처소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황실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황궁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까마귀와 쥐 떼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엘리시움 공작이 있었다.
'절대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엘리시움은 이대로 무너질 거야. 그때처럼 허수아비 같은 아바마마의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차라리 어머니를 따라 그 자리에서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가지 그랬냐며 조소했을 때 그는 피식 웃으며 정말 그럴 걸 그랬다며 원하는 대로 죽지도 못하는 황제의 삶을 탄식했다.
황위를 이어받은 뒤로도 레온하르트는 국내로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했고, 국외로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외교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그 개고생을 또 하라고 하면 혀 깨물고 죽고 말지. 잠깐, 그 개고생....'
책상에 이마를 대고 심호흡을 하며 싫은 기억들을 몰아내던 레온하르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문했다.
'그동안 엘리자베스는 뭘 하고 있었지?'
자신과 일리시스는 엉망이 된 국내외 정세를 복구하느라 아예 집무실 구석에 간이침대를 두고 지낼 지경이었다.
그동안 황후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한 폭동 한 번 없이 국내 정세는 의외로 쉽게 진정되긴 했지....'
레온하르트는 조금 더 기억 저편으로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어딘가에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황후가 직접 황궁 밖으로 나가 분노에 찬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그 대가로 썩은 야채나 달걀을 맞으면서도 애써 웃으며 백성들에게 자신의 사유 재산을 나누어 준다던 보고를 받은 기억이 떠 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책상이 부서질 기세로 쾅! 호기롭게 머리를 박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가벼운 애정만큼이나 지독한 증오로 변질되기 쉬운 일도 없었다. 한번 밉보이기 시작하면 숨 쉬는 꼴조차 보기 싫다 여기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하물며 황후라는 이름은 누구나 듣기만 해도 가벼운 환상과 함께 호감을 품었던 만큼 커다랗고 노골적인 원망을 쏟아 내기도 쉬웠을 것이다.
그걸 황후는 홀로 감내했다.
힘들다는 티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며 서재와 집무실의 꽃을 바꾸고 겨우 그 일 하나를 위안삼아 꿋꿋이 인내하고 견뎠다.
그래 놓고선 일기장에 '완벽한 황후' 운운하며 자신을 다시 한번 검열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처소에서 난 굉음에 몰려온 시종들을 손짓으로 물러나게 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세면대 가득 채운 레온하르트는 수면 위로 다시 이마를 박았다.
첨벙하고 얼굴을 담그자 정수리와 부어오르기 시작한 이마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차디찬 감각이 들어 절로 비명이 나왔다.
“부그르르르르.....”
물론 실제론 기껏해야 허우적거리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레온하르트는 비명과 함께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맹세했다.
이번엔 결단코, 절대로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요즈음의 어마마마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웃고 계셨지만 미미스 브룬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푸하...!”
숨이 한계까지 닿은 뒤에야 레온하르트는 허리를 세우고 거울을 노려봤다.
어마마마로부터 물려받은 화려한 금빛 머리카락이 가을 서리를 맞은 밀짚처럼 짙은 빛으로 젖어 있었다.
'절대... 절대로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을 거야... 막아야 해... 그래야, 그래야 리지가 행복해져.’
어마마마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아바마마가 폐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린 나이에 황위를 물려받자마자 맨몸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황후가 마음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홀로 모든 것을 견뎌야 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은 황후의 행복을 위해서야.'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