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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32화 (32/130)

32화 그 봄과 여름 사이(2)

서로 주고받은 미래는 각자 예쁘고 즐거운 추억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물론 매일이 마냥 꿈처럼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레온하르트에게 변성기가 처음으로 찾아오던 날, 엘리자베스는 그가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했고 레온하르트는 당분간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줄 수 없다는 점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똑똑똑.”

"리지?"

엘리자베스는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자연스럽게 레온하르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치맛단을 따라 뜨개질로 만든 꽃잎 레이스를 조르륵 달고 가슴팍엔 좋아하는 꽃을 실크 리본으로 수놓은 푸른 린넨 원피스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레이스 양말과 검은 메리 제인을 신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훌쩍 커 버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재차 감격했다.

지난 세월동안 그녀는 늘 레온하르트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앞서 자랐었다.

그때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엘리자베스는 빨리 레온도 알베르트처럼 커지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 또 지난밤 꿈에 베른 경이 나온 거냐며 놀리곤 했는데....'

약혼녀의 첫사랑이 자신이 아니라 키는 어지간히 커다란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기사의 상징인 금빛 브레이드와 푸른 눈을 가진 백마 탄 기사님 (그리고 실제로도 기사인) 이란 점은 솔직히 질투도 나고 아쉽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이었다.

한 달 전 그는 가문에서 정해 준 영애와 정식으로 식을 올렸고 행복한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무슨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었다.

황제의 처소를 지키는 친위대조차 결국 따라 웃게 되는 마법의 눈웃음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따라 피식 웃었다.

다른 영애들은 날이 갈수록 완벽한 레이디가 되기 위한 예법 수업이 한창이라는데 눈앞의 사랑스러운 약혼녀는 오히려 매일매일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갈 듯 가벼운 몸짓으로 황궁을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모습을 말리거나 질책하는 사람은 이 황궁에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녀가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비 오는 정원에서 춤을 춘다고 한들 사람들은 그녀를 말리는 대신 온몸이 푹 젖어 돌아올 그녀를 위해 따뜻한 목욕 물과 뜨거운 차 한 잔을 준비해 줄 터였다.

"레온은 뭐 하고 있었어?"

"어... 음... 약혼식 회상? 왜, 그때도 오늘처럼 눈부신 날이었잖아. 딱 봄과 여름 사이였고, 너는....”

"나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기대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했던 대화였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지금처럼 눈을 빛내고 볼에 홍조를 띠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지.”

“그럼 지금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훨씬 아름답고, 더욱 사랑스럽지."

엘리자베스는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까르륵 웃었다.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는 이 대화는 어른들은 모르는 두 사람 만의 작고 비밀스러운 약속의 언어였다.

이젠 제법 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엘리자베스의 손바닥을 가볍게 간질이던 레온하르트가 질문했다.

“오늘은 뭘 하고 지냈어?"

"황후마마와 함께 꽃꽂이를 했어.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고 칭찬도 들었다?"

"그거 아마 오늘 안에 아바마마 침소에 놓여 있을 거라는 데 오늘 간식을 걸수도 있어.”

"맙소사! 그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정성껏 만드는 건데!"

말과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쩐지 꽃향기가 난다더니. 리지 너는 늘... 요정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거, 알아?"

“그럼 오늘은 꽃의 요정이야? 나중에 내가 황후가 된다면 황궁의 꽃은 모두 내가 관리해도 될까?"

그 말에 레온하르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건가?'

시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시계 속에서 보냈던 시간만큼 자신의 수명을 아낌없이 대가로 내밀었던 날, 시계탑의 주인과 나눈 대화가 신경 쓰였다.

"레온?"

"네가 원한다면 황궁이 아니라 제국 전체의 꽃도 관리할 수 있게 해 줄게.”

레온하르트는 언제 그랬냐는 양 순식간에 다시 활짝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 앞으로 스스로 만들어야 하든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오직 엘리자베스의 행복뿐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대가를 바쳐서라도 몇 번이고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폐하께서 오늘 다듬으신 꽃이 마음에 든다 하시며 처소로 옮겨도 되겠느냐 여쭈시는데 어찌할까요?"

시녀의 말에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다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황제께선 원한다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꽃을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늘 이렇게 그녀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곤 했다.

"아직 부족한 실력이라 폐하의 처소에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시녀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오늘 간식이 뭐였더라?"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식은 내일 받을게. 조금 있다 미미르 언니와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거든."

“또 미미르야? 설마 너 아직도 마법을 배우겠다고 미미르랑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지?"

"이상한 짓은 무슨...? 오늘은 그냥 평범하게 레이디와 레이디의 티타임일 뿐인걸? 신사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랍니다!”

마법에 대한 소질은 전혀 없다고 미미스 브룬느가 단언한 엘리자베스에게 어떻게든 마법을 가르쳐 보겠다며 미미르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결과는 늘 참담할 정도의 대실패로 돌아갔고, 그 사고의 뒤처리는 늘 시계탑의 막내 마법사들과 레온하르트의 몫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레온하르트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미미르가 개구리 뒷다리와 말린 거미줄로 우린 차를 내오면 어쩌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레이디의 말에 따라야겠지요. 조심해서 다녀와. 이상한 거 먹지 말고, 길 잃지 말고...."

"황태자 전하, 저도 이제 열일곱이거든요?"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환영식에서 미미르가 그녀에게 준 시계였다.

레온하르트는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계를 사용한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리지가 벌써 열일곱이라....'

레온하르트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숙제를 뒤로한 채 손깍지를 껴 머리를 받치고 아슬아슬하게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지난 몇년간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번째로 배우는 학문은 여전히 어려웠다.

분명 배웠던 내용이 분명한데 다시 배우자니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고 어려운 이야기뿐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걸 배운다니, 이건 아동 학대야.'

제목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교재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스승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 이 책들은 페리안 후작가의 영식이 10살 때 이미 모두 끝낸 책입니다. 일국의 황제 되실 분께서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 말에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일스 녀석과 정식으로 만나는 게 아마 이번 여름이었던가?'

눈을 감으면 그를 향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죽음을 각오한 충언을 올리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평생 토끼처럼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좀처럼 큰 소리 내는 법 없이 지내던 사람이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를 냈었다.

'그 정도로 내가 용서받지 못할 못난 놈으로 보였단 소리겠지....’

레온하르트는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후우, 심호흡을 했다.

'다시 만난다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데....’

초면에 갑자기 황태자가 밑도 끝도 없이 고맙다고 하면 그 성격에 놀라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구름을 타고 여름 햇볕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 * *

'어?'

미미르와 즐거운 티타임을 마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익숙한 걸음으로 이름 모를 들꽃이 곳곳에 피어난 언덕을 내려가던 엘리자베스는 멀리서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덩어리 같은 것이 보이자 걸음을 멈췄다.

'베일리...?'

하얀 덩어리는 시계탑을 둘러싼 호수 주위에서 제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혹시 베일리가 길을 잃고 여기까지 쫓아온 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건 베일리가 아닌 한 소년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까지 길러 하나로 묶고, 오늘 아침 화병에 장식된 붉은 장미처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언뜻 보기엔 그녀 또래로 보였다.

“저기....”

황궁에서 레온하르트를 제외하고 제 또래를 보는 것은 처음인 엘리자베스는 용기를 내어 먼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품에 꽉 들어차는 커다란 책을 끌어안고 발만 동동 구르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이 꼭 깜짝 놀란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탑에... 가려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저 탑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배가 있다면 어떻게든 갈 수 있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눈을 깜빡였다. 소년이 입고 있는 셔츠는 소매가 넉넉했고, 그 덕분에 책을 끌어안고 있는 팔은 팔꿈치까지 소매가 흘러 내려온 참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팔은 노를 젓기엔 너무 가녀리고 약해 보였다. 항해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자베스였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탑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거지요?"

엘리자베스는 소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스... 스승님을 뵈러 왔습니다.”

책을 방패처럼 들어 얼굴을 감추며 소년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질문했다.

“스승님?"

소년은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스승님이 저 탑에 계셔요?"

다시 끄덕끄덕.

엘리자베스는 고민에 빠졌다.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탑은 마법사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마법사가 아닌 이들이 탑으로 가기 위해선 배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루터에 배는커녕 작은 나무판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설령 배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소년은 무슨 급한 사정이라도 있는지 절박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도와드릴게요.”

"다, 당신이요? 당신도 미미르 님 같은 마법사... 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붉고 동그란 눈이 더더욱 커졌다.

"미미르 언니를 아세요?"

“제 스승님의 손녀분이신데... 어어어!”

엘리자베스는 반가운 이름이 낯선 소년의 입에서 나오자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덥석 붙잡고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미미르 언니!”

"엘리자베스? 너는...!”

“미미르 님? 세상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두꺼운 책을 받침대 대신 삼고 올라가 커다란 솥 안을 휘휘 젓고 있던 미미르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무사히 시계탑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는데 다시 마나가 요동치더니 두 사람이 그녀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는 천장 구석에 대충 처박혀 붙어 있는 티타임용 주전자와 컵, 케이크 크림이 그대로 남은 접시와 테이블, 의자를 신기하단 듯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정말 편리하고 신기해 보이는 마법이었다.

'나도 저런 마법을 쓸 줄 알면 베일리의 간식을 저런 식으로 숨겨 둘 수 있을 텐데....’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닥에 엉거주춤 주저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두고 간 물건이라도 있어? 저 애는......?"

미미르는 엘리자베스와 소년만 번갈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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