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 봄과 여름 사이(1)
엘리자베스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황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온하르트가 선물해 준 다이어리는 회색빛이 도는 차분한 분홍색 가죽 바탕으로, 엘리자베스의 이니셜과 황실의 문장이 예쁘게 보석으로 장식된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뭘 쓰면 돼?'
'그냥 네가 쓰고 싶은 걸 쓰면 돼.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했는데 그게 어떤 기분이었다거나, 내일은 뭘 하고 싶다거나....'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을 가장 먼저 글로 다듬어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매일 일기를 썼다.
엘리자베스는 펜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다 레이디답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다시 확인하곤 마저 펜 끝을 입에 물었다.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엘리자베스는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을 해도 아무도 그녀를 혼내거나 질책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펜 끝을 씹으며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제법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레온을 처음 만났다. 잔뜩 긴장해서 실례만 저지른 나를 레온은 혼내지도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대해 줬다.]
[레온이 굽 없는 신발을 선물했다. 모든 것이 처음 하는 일 같았다. 잔디밭에선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땅을 달리면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마구 흩날렸다. 그가 꽃반지를 선물하며 나에게 청혼했다. 나는 너무 기뻐 울었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 기쁘면 울음이 나온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는데.
엘리자베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페이지를 마저 넘겼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그리고 레온 덕분에 황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너무 낯설고 긴장되었는데 레온이 있어 조금 안심이었다.]
[레온이 이번엔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줬다. 다음에는 베일을 가져다준다는데, 정말일까? 그나저나 레온은 정말 뭐든 척척 해낸다. 레온에게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레이디가 되어야겠다. 화관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곱게 말려 침대 머리맡에 걸어 두기로 했다.]
그 화관은 지금도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걸려 매일 밤 그녀에게 향기롭고 고운 꿈만 꿀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레온에게 강아지를 선물받았다. 이름은 베일리. 하얗고, 까맣고, 분홍색에, 지금은 내 슬리퍼를 물어뜯으며 놀고있다. 매일 사고만 치는데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이게 귀엽다는 느낌일까?]
“베일리! 너 또 내 쿠션 가져갔지! 안 돼, 이리 줘!"
이상할 정도로 베일리가 조용하단 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잠들었거나, 혹은 조심스럽고 조용한 움직임으로 사고를 치고 있거나.
엘리자베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돌려 어느새 침대의 가장 큰 베개 두 개를 이어 놓은 것만큼 자란 베일리에게 소리쳤다.
쿠션을 마구 침 범벅으로 만들고 있던 베일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쿠션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저 표정에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손을 얹고 그러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저지하자 베일리는 킁 하는 소리를 내며 쿠션 위에 턱을 대고 엎드렸다.
[처음으로 코르셋 없는 나만의 드레스를 맞췄다. 호위 기사 베른 경을 만났다. 모두 레온이 신경 써 준 덕분이다.]
[시계탑에 간 날. 미미르 언니를 만났다.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레온이 고생했다고 들었다. 모든 마법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고 미미르 언니가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했다.]
[황제 폐하께서 환영식을 열어 주셨다.]
페이지를 넘기던 엘리자베스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그 증상이다.
엘리자베스는 환영식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갑자기 방 안이 더워지는 증상을 겪고 있었다.
[레온이 빌려 간 꽃반지를 돌려줬다. 근사한 이자까지 합쳐서. 그리고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행복이 대체 뭐길래 레온이 그렇게 간절하게 내 허락을 구했던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녀는 손을 뻗어 크리스털 병에 꽂힌 꽃다발을 건드렸다.
다른 꽃은 이미 시들어 보존 마법을 걸어 뒀지만 자수정으로 만든 제비꽃과 푸른 사파이어로 만든 물망초만은 여전히 먼지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안아 줄 때와 레온이 나를 안아 줄 때, 그리고 황후마마께서 나를 안아 줄 때의 느낌이 전부 다르다.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포옹은 레온이나 황후마마의 것보다 싫은 느낌이다.]
엘리자베스는 팔뚝을 가볍게 문질렀다. 겨우 회상일 뿐인데도 꺼림칙한 기분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문득 모든 문장의 시작에 레온하르트의 이름이 있는 것을 깨닫고 엘리자베스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다이어리를 덮었다.
간질간질, 두근두근. 요즘 들어 레온하르트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마구 요동치는 증상이 심해졌다.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댄 엘리자베스는 서늘한 나무 책상에 얼굴을 기댔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볼의 열기가 차가운 나무에 닿자 조금 시원해졌다.
시녀와 유모, 의사 선생님과 역사 선생님, 심지어 황후마마께도 이 증상에 대해 상담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웃으며 언젠가 알게 될 거라고 하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시녀들은 초콜릿을, 의사 선생님은 충치를 막아 준다는 사탕을, 역사 선생님은 '사랑'에 관한 옛날이야기를 해 주셨다. 심지어 황후마마께선 곁에 계시던 황제 폐하와 시선을 나누시더니 그 자리에서 가볍게 입을 맞추셨다.
'그 일을 레온에게 말했을 때 레온은 대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어린애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마구 성질을 냈었지....'
왜 그랬던 걸까? 엘리자베스는 다시 펜 끝을 잘근거리며 작은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 보다 책상에 턱을 괴고 환영식 무도회를 마저 떠올렸다.
* * *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사람들은 어린 그들의 깜찍하면서도 제법 낭만적인 모습을 보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꽃다발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마치 신의 용서를 받은 사람처럼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몰라 속으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은 허락을 구해야 할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인가 보다, 그렇게 이해한 엘리자베스는 있는 힘껏 레온하르트를 도와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선물 전달식이 끝나고 레온하르트는 곧이어 엘리자베스에게 춤을 신청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그녀였으니 첫 춤 또한 그녀가 시작해야 마땅했다.
엘리자베스는 완벽하게 스텝을 밟고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치마가 만개한 장미처럼 활짝 피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느리게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술에 젖었던 어린애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음악 위로 몸을 실었다.
아직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지 못한 레이디를 위해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상급의 예의이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레온하르트에 이어 그녀의 다음 춤 상대는 황후였다.
황제가 내민 손을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뻗던 엘리자베스를 낚아챈 황후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마침 빨라진 템포에 맞춰 그녀에게 발랄하고 가벼운 댄스를 새롭게 가르쳐 줬다.
그렇게 다시 한 곡을 추고 나서도 황제는 체통과 품위 유지를 위해 점점 빨라지는 댄스곡이 전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황제 폐하에 이어 호위 기사인 베른 경까지. 동시에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를 가진 두 사내로부터 춤 신청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더란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은 그저 자신의 작은 체구에 맞춰 제자리에서 몸만 좌우로 까딱이는 수준이었겠지만...
그저 손에 손잡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해도 즐겁다고 까르륵 웃는 나이에 스텝이며 움직임이 뭐가 중요할까.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미미르 또한 동감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반대쪽 손을 잡아 주었다.
무척 빠르고 경쾌한 템포의 음악 속에 양손에는 각각 레온하르트와 미미르의 손을 잡고, 제 또래 귀족 아이들과 빙글빙글 돌며 추는 춤은 무척 즐거웠다.
* * *
똑똑똑.
"리지, 안에 있어?"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핫, 하며 몸을 일으켜 일기장을 책꽂이에 꽂아 넣고 문을 열었다.
“너무 늦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으응, 아니야. 잠깐 일기를 보고 있었어.”
“일기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레온하르트는 새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내미는 손을 잡고 황후와 그녀의 재단사,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그럼 조금 이따 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그녀를 시녀들에게 넘겨주었다.
몇 달 사이 두 사람의 키는 한 뼘도 넘게 커 버렸지만 여전히 엘리자베스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기에 레온하르트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역시 우유를 더 먹어야 하나? 아냐, 운동... 운동이 문제인가?'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엘리자베스는 재단사가 가져온 드레스를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아름다워요!"
"이번에도 기뻐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한걸요. 하지만 이 드레스는....”
"아직 미완성이죠?"
재단사와 엘리자베스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씩 웃었다.
처음 재단사가 그녀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웃는 모습이 어딘지 인형처럼 완벽하면서도 어색했던 그녀가 지금은 그 날 가져왔던 디자인화 속 소녀처럼 자연스럽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변화가 새삼 놀랍고 또 고마워 재단사는 남몰래 코를 훌쩍였다.
장미마다 하얀 진주가 달린 레이스로 봉곳하면서도 넉넉하게 부푼 소맷단을 장식하고, 은사로 장미를 수놓은 실크 원단으로 만든 스커트는 하얀 리본 장식 아래로 여섯 단짜리 레이스 프릴 페티코트가 보이도록 일부러 트임을 내었다.
동글동글 조개껍데기처럼 모양을 낸 목둘레는 꽃잎이 휘날리듯 보석 장식이 자잘하게 붙어 있었다.
장갑 대신 조화와 레이스 리본이 달린 리스트 밴드를 손목에 착용하고 황실의 보석을 목에 건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레온하르트가 직접 골랐다는 구두를 신었다.
중앙에 다이아몬드를 단 커다란 실크 꽃 장식과 고양이 다리처럼 생긴 굽이 사랑스러운 구두는 요정의 날개처럼 반짝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져 걸을 때마다 무지갯빛 발자국이 생길 것만 같았다.
“어여쁘기도 해라. 우리 며늘아기, 이리로 오겠니?”
"네, 황후마마.”
그녀가 대기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잠시도 입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던 황후가 감탄하며 엘리자베스를 꼭 끌어안았다.
“마지막 장식은 레온이 직접 해 준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레온이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레온이 준다는 것이니 뭐든 좋은 것이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허락했다.
"그럼 리지, 들어간다?"
레온하르트는 황후의 정원에서 갓 피어난 여름 장미로 만든 화관을 손에 들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온! 그 화관은....”
레온하르트는 까치발을 들어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화관을 얹고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베일까지 고정해 주었다.
“그때... 다음엔 베일을 가져다주겠다고 했잖아. 나는 약속은 꼭 지킨다고."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멍하니 깜빡였다. 조금 전 일기장에 쓰여 있던 일이 눈앞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
“잘 어울려. 오늘도 정말로 예뻐. 리지.”
레온하르트는 다정하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신에게 감사하고 또 시계탑의 마녀에게 고마워 하는지 알 턱이 없는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볼만 감싸 쥐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럼 우리 아가들, 이만 가 볼까요?"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와 황후의 손을 가볍게 붙잡고 웃으며 황궁에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여름이 되기 전, 신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과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가 서로의 미래를 주고받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