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30화 (30/130)

30화 이 꽃이 전부 시들 때까지(4)

몸에 밴 술 냄새를 싹 지워 내기 위해 시원한 민트 향이 나는 입욕제를 듬뿍탄 욕조는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거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혼자... 할 수 있어. 다... 들, 나가 있도... 록.”

“하지만 전하....”

“나도... 이제 열 살이야...!”

“열 살이 아니라 서른 살이라도 술에 취하신 상태로 홀로 욕조에 들어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유모의 단호한 말에 레온하르트는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의 몸과 다른 이들이 챙겨주는 일상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술이 번쩍 깨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망했다.

'나는 열 살이다. 열 살이다. 이 짓을 앞으로 못해도 2년은 더 반복해야... 2년이나... 2년씩이나... 못 해 먹어!'

"혼자 하게 내버려 둬!"

“전하!”

레온하르트는 강제로 유모를 욕실 밖으로 떠밀었다.

유모는 당혹감 가득한 표정으로 시녀들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뜻 모를 흐뭇한 미소와 함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날로 의젓해지시니 이 유모, 어딘지 섭섭하기까지 하군요. 수건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혹시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차라리 남자 시종을 부를 걸 그랬나? 아니,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냐 아냐, 열 살 꼬맹이는 아직까지... 아직까지... 젠장!'

생크림처럼 몽실몽실한 거품이 듬뿍 올려진 수면 위로 주먹을 내리치며 레온하르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럴 때가 아니지. 유모든 알베르트든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부그르르르.

코끝까지 물에 푹 잠긴 레온하르트는 팔짱을 끼고 열 살이 아닌 시곗바늘을 되돌리기 전 황제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졌으니 못해도 10년, 아니지. 아주 두고두고 회자될 게 분명해. 아무리 낯짝이 두껍다 해도 감히 황족의 몸에 상처까지 남겼는데 뻔뻔하게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겠지.'

엘리시움 공작이라....

욕조 가장자리에 목을 기대며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갔다.

제국의 역사는 제법 길다. 그러나 분명 처음부터 제국이 제국이라 불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첫 번째 황제는 당시 지역 유지 중 가장 위세가 높았다는 이유로 엘리시움과 정략결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엘리시움이 천사의 후예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였을지도 모르지. 제국을 세울 정도의 대단한.... 무언가가.'

대대로 내려오는 은발과 푸른 눈동자를 제외하고도 더욱 특별한 무언가.

정략적인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첫 번째 황후라는 자리를 엘리시움이 차지했을 이유가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초대 황후를 배출하고, 개국공신으로 공작위도 받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며 리지처럼... 완벽하게 만들어진 영애들을 고위 귀족 가문과 주위 왕국의 왕실로 보내면서 세를 불려 왔겠지....'

거품을 먹은 것도 아닌데 입 안에 쓴 맛이 감돌았다.

'결혼 시장에 딸을 팔아 가며 사교계에 기생하는 최악의 기생충 같으니라고’

괜한 분풀이로 수면을 내리치자 알싸한 민트향이 감도는 파도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강타했다.

레온하르트는 욕조 벽 대신 수면에 얼굴을 박고 계속해서 생각에 골몰했다.

'그나저나 아바마마께서 모처럼 내가 다쳐 가며 만든 기회를 잘 잡아야... 푸하! 하... 접시 물에 코 박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욕조 물에 얼굴 박고 죽을 뻔할 줄이야. 하여튼 잘 쓰셔야 할 텐데. 그래야 나중에 내가 할 일이 줄어든단 말이다....’

욕조 벽에 팔을 대고 턱을 괸 레온하르트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제 아비는 훌륭한 성군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는 강제로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에 황제의 관을 내팽개치듯 던지고 자신의 처소에 처박혀 죽을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온하르트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전대 황제가 미처 하지 못한 '청소'였다.

'그 짓을 또 반복하라고? 못 해. 귀찮아. 차라리 아바마마께서 지금부터 하시도록 유도하는 편이 낫지.'

레온하르트는 손가락을 꼽아 보며 '청소'해야 할 귀족들의 명단을 짚어 보았다.

조금 성장한 티가 난다곤 해도 아직 조그마한 손바닥이며 짤막한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자라고 싶다... 이 말을 또 하게 될 줄이야.”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한 탓이었을까,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꼭 아이였으나 얼굴은 다 늙은 성인의 낯을 억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보였다.

야무지지 못한 손길로 힘겹게 단추와 사투를 벌이던 레온하르트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렇게 모든 일에 서툴러서야 정말 언제 자라서 언제 리지를 지켜 주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건지.

결국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 준비된 옷을 갖춰 입으며 레온하르트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됐다. 하여튼 이걸로 공작가는 완전히 파멸했으니 그걸로 된 일이야.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그런 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레온하르트는 순간 정수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만 같은 고통과 함께 시야가 옆으로 기우뚱 기우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 기억이 찢겨 나가는 불쾌한 감각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유모가 몸을 내던져 자신을 받쳐 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정신 차리세요!"

“해소제.....”

“네?”

"숙취... 해소제 하나만 주게....”

겉으로는 술에 취한 영향인 척 아무렇지도 않게 숙취 해소용 포션을 마셨지만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시계탑에서 미미스 브룬느와 나눴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고 있었다.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어쩌면 내 행동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당장 눈앞에서 유모를 해고한다면 미래의 나에겐 성인식 날 궁을 떠난 유모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과거의 나...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미래 역시 성인식 날 궁을 떠나는 유모가 아닌 오늘 당장 해고당하는 유모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건가?'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미 미래는 바뀌고 있을지도 몰라.

있었던 일이 없어진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일을 떠올리려고 하니 그 부작용으로 기억이 사라지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레온하르트는 호들갑을 떨며 다시 의사를 부르려는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관없어. 나는 리지만 행복하게 해주면 돼. 내 곁에서... 내 곁에서?'

그녀가 과연 자신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원하는 리지의 행복은...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고, 또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일인데. 굳이 완벽한 황후의 모습에 집착할 필요 없이 그냥, 그냥 엘리자베스 그 자체가 되는 일인데.'

문을 열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인형만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을 기다리던 엘리자베스가 반색하며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을 끌어안았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져야만 한다면... 나는 리지를 놓아줄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부러 과장되게 뒤로 넘어가는 척 다시 허리의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를 꽉 끌어안았다.

'정말 그럴 자신 있어? 지금도 나만 보면 웃고, 나를 믿고, 나에게 의지하는 저 아이를 떼어 놓을 수 있겠어?'

"레온? 아직도 머리 아파?"

평생을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치만 보며 살아야 했던 엘리자베스는 사람의 표정 변화에 무척 민감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레온하르트의 웃는 얼굴은 결코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머리? 머리는 이제 괜찮아. 아마 덜 마른 머리로 바깥바람을 쐬어서 그런 걸 거야. 미안해, 리지. 오래 기다렸지?"

'정말 한결같이 이기적인 놈이군. 이래서야 공작과 내가 다를 게 뭐지? 그녀를 위한다는 척, 조금 더 넓은 새장 속에 그녀를 풀어 주었을 뿐이잖아. 역겨운 위선자 같으니라고.'

“미미르 언니도 엄청 걱정했어. 저러다 욕조에 빠져서 수프처럼 녹아 버리면 연구 재료로 써 버릴 거라면서 마구 화를 냈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그건 걱정이야!”

“미미르가? 내일은 해가 동쪽 빼고 모든 방향에서 동시에 뜨는 거 아닌가 몰라.”

'나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레온하르트. 미래의 레온하르트. 그녀가 정말 바라는 행복 속에 당신의 모습도 있어?'

"해는 늘 동쪽에서 뜨는데...? 아무튼 다시는 그러지 마! 나는... 나는 레온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나랑 약속해!”

엘리자베스는 제 딴에는 위협적인 표정이랍시고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피식피식 배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다시는 함부로 다치지 말 것! 황후마마께서 그러셨어.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고 나면 레온의 몸은 내 소유가 된대. 그러니까 미리 약속하는 거야. 내 레온이 다친다면... 싫을 것 같아.”

“....어마마마께선 대체 어린애한테 뭘 가르치신 거야?"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단 얼굴로 시녀들을 올려다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전하, 아가씨. 회장 정리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슬슬 가실 시간이에요.”

“그렇다고 하네. 레이디 엘리자베스, 다시 한번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저에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엘리자베스는 한 손은 레온하르트의 팔에, 다른 손으론 인형의 손을 꼬옥 붙잡고 다시 회장으로 돌아갔다.

마침 시계탑에서 나온 마법사가 있었던 덕에 공작 부인이 그동안 먹은 식단의 흔적과 모래알보다 곱게 깨져 나간 크리스털, 그리고 대리석 타일의 틈을 타고 스며들었던 샴페인까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싹 치울 수 있었다.

“마녀에게 마법을 부탁할 때는 황제 폐하라고 하셔도....”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그래, 무엇을 원하느냐.”

리지가 원하는 색으로 회장 분위기를 조금 바꿀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내심 위험한 물건이나 금은보화, 자신의 신체 일부를 요구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황제는 마법사의 당돌한 요구를 너털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허락했다.

미미르는 다시 가볍게 허공에서 손짓하며 엘리자베스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회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융단 색이 평소 쓰던 붉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어때 리지, 마음에 들어?"

"응! 미미르 언니는 정말 대단해요.”

“내 말 무시하는 거야?"

보기 드문 마법사의 마법과 눈웃음 한 번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돋우는 황후의 능력, 그리고 약간의 술기운 덕분에 회장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레온하르트는 볼을 긁적이며 미미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뭐. 썩 나쁘진 않네. 고맙다 미미르."

“....? 리지,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 맞니?"

"너는 왜 고맙다고 말을 해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건데!"

“그야 마법사란 종족은 어쩔 수 없는 걸요!”

레온하르트는 내가 졌다는 양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미미르는 흥 하며 코웃음을 치고, 엘리자베스는 그 사이에서 인형의 손만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참, 레온. 나 준다는 선물 말이야. 언제 줄 거야?"

“아 맞다. 리지, 잠시만 이쪽으로 와 볼래?"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손에 이끌려 회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이 잠시 대화를 멈추고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리지,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가져올게.”

단상 위로 올라간 레온하르트는 황제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황제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주목시켰다.

"황태자가 우리 새아가에게 줄 것이 있다는군. 그래, 무엇을 준비했느냐?"

레온하르트는 때맞춰 시종이 가져다 준 것을 품에 안고 다시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황태자의 품에 안긴 나무 상자에 못 박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앞으로 한달음에 다가간 레온하르트는 나무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귀족들은 목을 한껏 빼며 평범한 보석함으로 보이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돌려줄 때는 이자까지 같이 주는 법이지. 레이디 엘리자베스."

"네, 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상자를 열었다. 두 개의 시들어 말라 버린 꽃반지와 두 개의 새로운 반지, 그리고 들꽃을 엮어 만든 꽃다발 하나가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네가 준 반지는 마법을 걸어 뒀어. 비록 다시 싱싱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바스러지는 일도 없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눈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시종은 눈치 좋게 쿠션을 가지고 와 레온하르트가 보석함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이건... 장인들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반지를 주문했더니 이런 걸 만들어 오더라고. 앞으로 네가 가지게 될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겠지만, 받아 주겠어?"

레온하르트가 꺼내 든 것은 장밋빛 수정으로 만든 꽃과 최상급의 제이드를 세공해 꽃 넝쿨처럼 보이게 만든 보석으로 된 꽃반지였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벌리며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라니, 가슴속에서 분홍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머리 위로 김이 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레온하르트는 꽃다발을 꺼냈다.

가능한 무도회 직전에 만들어 싱싱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사이 꽃은 고개를 떨구고 반쯤 시들어 있었다.

덕분에 유난히 눈에 띄는 꽃이 있었다.

푸른 사파이어로 만든 물망초 한 송이와 가장 선명한 자수정으로 만든 제비꽃 한 송이.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챈 귀족들은 어린 황태자가 제법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며 흐뭇해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레온하르트는 꼭 구혼을 하는 청년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 꽃이 모두 시들 때까지, 내게 당신을 사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자격을, 기회를.

부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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