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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29화 (29/130)

29화 이 꽃이 전부 시들 때까지(3)

“정신이 있는 게요, 없는 게요? 작위로 따져도, 또 환영식 주인의 부모 되는 이로서 가장 먼저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술에 취하면 대체 어쩌자는 게야!”

"우욱... 하지만... 전설의 와인은... 천천히, 천천히 가요....”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울렁거리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공작에게 반쯤 기대어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텅 빈 배 속과 무리하게 조인 코르셋, 그리고 곁들여 먹은 음식 하나 없이 마신 와인 탓인지 속이 불편했다.

분명 자신은 똑바로 걷고 있는데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그리고 사랑스러운 제 딸아이와 미래의 사위 될 소년은 의자에 앉은 채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부인, 부인! 똑바로 걸으시오!"

“저는... 똑바로 걷고... 있는데....”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졸데를 위해 이렇게 자리까지 마련해 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겨우 그 간단한 동작에도 공작 부인의 시야는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엘리시움 부인,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괜찮은가요?"

황후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공작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하하하, 날이 날인지라 부인이 조금 과음을 한 듯합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황후마마.”

공작은 옆으로 쓰려지려는 제 부인을 몸으로 받치며 대신 대답했다.

강철로 된 크리놀린이 옆구리를 꾸욱 압박하는 바람에 웃는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굳이 주위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지만... 참! 엘리시움 부인, 혹시 괜찮으시다면 여기 모인 부인들에게 우리 며늘아기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며늘아기가 어찌나 똑똑하고 야무진지... 애어른이라는 말이 꼭 며늘아기를 위한 말같이 느껴지더군요.”

황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뼉까지 치며 눈을 빛냈다.

눈치 빠른 귀족들은 이미 '애어른'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공작 부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

"이....?"

이졸데 말씀이십니까? 를 말하려던 공작 부인은 입을 여는 순간 욱 하고 몰려오는 토악질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황후는 물론 귀족들의 악의 섞인 흥미와 호기심 어린 시선까지 그녀에게 온통 집중된 상태였다.

“이졸데.... 우웁.”

조금 속이 진정되었다 생각하고 다시 말을 이어 가려던 공작 부인은 황급히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대로 손을 뗐다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한편 귀족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부채 뒤로 얼굴을 숨긴 채 소문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딸아이 구두를 사러 갔는데, 도무지 어린애 구두로는 안 보이는 높은 굽이 달린 신발이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건 대체 누가 신느냐 물었더니 글쎄, 엘리시움 영애라더군.”

"그러고 보니 저도 비슷한 일화를 들은 것 같아요. 왜 그... 유난히 작았던 코르셋 말이에요. 나는 그냥 기술 과시용으로 만든 전시용 코르셋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엘리시움에서 주문한 거래요.”

“세상에, 그럼 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런 걸 입고 신었단 말이야? 우리 어머니 세대면 모를까 요즘 누가 코르셋이 필요한 드레스를 입는다고...?"

엘리시움 공작은 주위 귀족들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지는 것과 귓가에 스쳐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피부로 느끼며 상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하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부인, 부인!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우우우웁....”

공작 부인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변명이든 뭐든 한마디라도 좋으니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도저히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어흠, 흠. 저희 이졸데로 말할 것 같으면....”

"엘리시움 공작, 저는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대답을 들려주시겠어요? 어떻게 했기에 어린 며늘아기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예법을 몸에 익힐 수 있었나요?"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시선으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도 부모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괜찮아, 리지. 나만 믿어. 저들은 더 이상 네가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야.”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아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의 인형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입니다!”

공작 부인은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입술을 꽉 닫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무언가가 다시 천천히 내려가는 척 입천장을 두드려댔다.

“...사랑, 사랑이라! 무엇보다 훌륭한 교구로군요, 부인.”

황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는 공작 부인에게 질렸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황제는 조금 진정하라는 듯 황후의 손등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황후께서 인정하셨으니 귀족들 또한 어쩔 수 없이 엘리시움에 대한 소문을 주고받던 것을 잠시 멈춰야 했다.

"아가, 내 아가 이졸데. 이 어미를 한 번만 안아 주련?"

공작 부인은 양팔을 넓게 벌리더니 가까스로 문장을 완성하고 이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의 숨이 순간 멈췄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싫으면 안 가도 돼.”

“...으으응, 아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리지?"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온하르트는 혹시 모른다는 이유를 대며 그녀를 공작 부인의 앞까지 안내했다.

엘리자베스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우리 이졸데! 아가!”

“이졸... 우웁, 이졸데!"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은 활짝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끌어안아 그림 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역시 이졸데야!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벌써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행동하다니!'

공작은 뿌듯한 얼굴로 딸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작고 말간 얼굴은 잔뜩 딱딱하게 굳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이렇게 안아 주고, 키스를 퍼부으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은 그녀가 늘 바라던 일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역겨움과 불쾌함이 뱃속에서 마구 요동치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키웠다는데 어째 영애의 반응이....”

“역시 그런 거겠지? 그런 걸 거야. 딱 보니까 보이네.”

"오죽하면 영애가 저렇게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겠어? 아니지, 잘 보니 아예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레온하르트는 귀족들이 충분히 의아함을 느끼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헛기침으로 엘리자베스를 공작 부부로부터 떼어 냈다.

"리지. 이제 다 괜찮아.”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엘리시움 공작은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리자베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말씀 잘 듣고, 황태자 전하와 친하게 지내고, 몸 건강히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딸아.”

공작은 허리를 굽히며 부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부인 또한 허둥지둥 엘리자베스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남기며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미미르의 세 번째 마법이 발동됐다.

찍!

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공작 부인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고 화려하게 부푼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고 까맣고 반질반질한 두 눈, 분홍빛 코, 동그란 두 귀와 앙증맞은 앞발을 가진....

“쥐.... 쥐다! 쥐가 나타났다!"

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레온하르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어깨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기둥 옆에 숨어 막대 사탕을 앞니로 갉작대던 미미르와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미르는 그의 몫까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에... 엘리시움 공작 부인의 머리에서 쥐가 나오다니! 맙소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부인!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뭐... 뭐가 제 머리에서 나왔... 꺄아아아아악!"

술에 완전히 절어 버린 머리로 상황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가는지 열심히 이해하려던 공작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어깨에서, 팔로, 그리고 팔을 따라 내려가 손등에서 폴짝 뛰어내려 붉은 융단을 두 발로 딛고 선, 자신을 향해 우아한 궁정식 절을 올리는 까만 쥐를 보고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비명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참고 있던 속이 폭발해 버렸다.

“부인!"

공작의 단말마가 이어졌다.

공작 부인은 공작을 향해 구원을 바라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우웨에엑!”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황제와 황후를 비롯해 앞 줄에 서 있던 일부 귀족들은 그동안 공작 부인이 먹은 식단을 눈으로 확인하는 진귀하고도 불쾌한 경험을 겪어야만 했다.

엘리시움 공작 내외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황한 공작 부인은 마구 헛걸음질을 치다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발목을 삐끗해 주저앉았고, 그녀를 부축하려던, 혹은 자리에서 도망치려던 공작은 그 바람에 함께 넘어지며 무엇이라도 잡기 위해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 아주 얇고 차가운 것이 잡혔다.

공작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꽉 낚아챘다.

"리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외치며 작은 몸을 품에 안고 등을 돌려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어깨 너머로 제 아버지가 붙잡은 잔 하나로 인해 10층짜리 크리스털 샴페인 잔으로 만든 탑이 무너지는 것과,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 황금빛 폭우가 퍼부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에서 유리잔은 파편 하나하나가 다이아몬드처럼 아주 곱게 반짝였고, 잔에서 찰랑거리던 금빛 물결은 폭포처럼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로 끼얹어졌다.

"리지! 괜찮아?"

"레 ... 레온 ...레온! ...피!"

"다친 곳은 없는 거지? 그럼 됐어. 알베르트! 어서 리지를 데리고 가!”

가벼운 카나페와 함께 남은 와인을 해치우며 공작 부부의 우습지도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레온하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단숨에 달려와 엘리자베스를 안아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샴페인을 혀로 핥아 맛보며 생각했다.

'이 향과 맛은... 모처럼 좋은 샴페인인데 조금 아깝게 됐군.'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

"다들 뭣들 하느냐! 당장 황태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의사를 불러라!"

"근위대! 기사들은 무얼 하고 있나!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 폐하를 보호하라!”

귀족들의 비명 소리와 황실 기사단의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지고 순식간에 회장의 분위기는 난장판으로 변했다.

엘리시움 공작 내외는 황실 기사단이 제 주위를 둘러싸며 금방이라도 검을 꺼낼 자세를 취한 뒤에야 무슨 짓이 일어났는지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주...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엘리시움 공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사라졌다.

“우연... 우연입니다! 황제 폐하! 저는 절대... 절대 전하를 해하려고 한 게....”

깨진 유리 위를 기다시피 하며 공작은 황제에게 매달렸다.

손바닥에 콕콕 박힌 유리 조각이 공작의 피부를 찢고 황제의 바짓자락 위로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우연이라... 그렇죠. 우연이고 말구요.”

황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여 공작 부인을 일으켜 주는 척 귓가에 속삭였다.

“그저 '우연히' 초대장이 공작저까지 갔을 뿐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엘리시움 부인.”

"황후... 마마?”

“그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엘리자베스의 눈에 띄지 말라고,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황궁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아니겠지요?"

“...마마?"

제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비를 구걸하기 시작한 어리석은 사돈 내외를 내려다보며 황제는 귀찮은 골칫덩어리를 치워 내는 기분으로 공작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사돈 될 분이 감히 헛된 생각을 품고 그랬으리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소. 당분간 영지에서 자숙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하오, 엘리시움 공작. 즐거운 날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물러나도 좋소.”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정말... 정말....”

공작 부인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직접 나서서 무마한 덕분에 이 이상 일이 커지진 않았으나 이미 귀족들은 모든 것을 눈으로 본 뒤였다.

아마 못해도 10년은 영지에 처박혀서 소문이 잠잠해지길 기다려야겠지.

그뿐일까? 감히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몸에 상처까지 나게 했으니, 황실이 인정한 미래의 황태자비 엘리자베스의 부모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작위를 박탈당하고 목이 참수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일을 빌미로 몇몇 '일부'귀족들은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원망은 다시 엘리시움 공작, 자신에게 돌아오겠지.

공작 부인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엘리시움 공작은 내쫓기듯, 혹은 도망치듯 황궁을 빠져나갔다.

한동안은 앞으로 이곳에 올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이가 빠드득 갈리고 속이 쓰려 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엘리자베스는 알베르트의 품에 안겨 레온하르트가 있는 곳으로 가는 사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마음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커다랗고 두꺼운 유리 벽 하나가 눈앞에서 와장창 깨져 나갔다.

* * *

"레온! 죽는 거 아니지? 그지?"

"으으윽....”

레온하르트는 황금빛 숨을 마시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어린아이의 여린 콧속을 마구 자극했다.

"울지 마, 리지. 네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걸로 됐어.”

엘리자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하게 행동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의사는 볼을 살짝 긁힌 것을 제외하곤 그의 몸엔 어떤 상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기적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기둥 뒤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막대사탕을 오도독 깨물며 손가락을 튕기던 미미르를 똑똑히 보았다.

시녀들이 새로운 예복을 가져온다, 목욕물을 받는다, 시원한 마실 물을 가져온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쫄딱 젖은 상의만 벗고 더운 물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내던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물수건을 빼앗았다.

"리지?"

"왜... 왜 그랬어... 레온은 이 제국의 후계자인데....”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직접 팔을 닦아 주는 그녀를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 이런 일이 생길 거면 근육이라도 잡힌 뒤에 일어나면 좀 좋아. 모처럼 좋은 기회인데 이런 볼품없는 몸이어서야....’

"아바마마가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키는 거랬어.”

레온하르트는 여린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벅벅 닦아 내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쪽 키스하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슬슬 웃음이 나오고 구름 위를 탄 것처럼 둥실둥실,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이 감각의 정체가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 취한다....'

엘리자베스는 실없이 히죽히죽 웃으며 눈만 느리게 끔뻑대는 레온하르트의 뺨을 붙잡고 애타게 소리쳤다.

레온하르트의 몸에선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헛소리를 하질 않나, 갑자기 이마에 키스를 하질 않나.

처음 보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진심으로 레온하르트가 죽을까 봐 걱정이 되다 못해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레온 레온! 눈 감지 마! 정신 차려!"

"리지... 너에게 줄 게 있어.”

“죽지 마! 죽으면 안 받아 줄 거야!"

어차피 죽으면 못 주는데. 누가 보면 정말 총이라도 맞은 줄 알겠군.

레온하르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냥 방치하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안 죽는다... 그러네.... 하여튼... 바깥이 조금 정리되면 다시 나가자.”

"어딜 나간다고 그래!”

술기운이 올라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품에 풀썩 쓰러지듯 이마를 기대고 씩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겪어 보니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뻤다.

술에 취한 탓인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한참 노려보다, 엘리자베스의 품에 머리를 박고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술에 취한 10살 꼬맹이 주제에 뭘 생각한 거지... 나란 놈은... 정말 한결같이 쓰레기 같군....’

“아직 내 선물은 못 받았잖아....”

엘리자베스는 어린 술주정뱅이 황태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시녀들이 올 때까지 그 상태로 굳어 있어야 했다.

대체 그 선물이 뭐길래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레온하르트의 상태가 걱정되는 한편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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