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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28화 (28/130)

28화 이 꽃이 전부 시들 때까지(2)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걸음에 맞춰 부러 느린 걸음으로 입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녀에게 몰려있었다.

혹시 그녀가 너무 긴장한 건 아닌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한데 억지로 데리고 나온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볍게 훑어본 회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 앞에서 누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겠는가.

'있으면 아주 삼족을 멸해야지.'

엘리자베스 또한 걱정한 것보단 제법 의연한 태도로 제 곁에서 걷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내심 안도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 앉자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황제는 손을 들어 완전히 좌중을 조용하게 만들더니 가벼운 인사말로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을 알렸다.

“봄일세. 황실에는 미래에 황태자의 반려가 될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깜찍하기 그지없는 보물 같은 아이가 들어왔고, 오늘은 그 아이를 위한 환영회이자 무도회인 만큼 격식 차리지 말고....”

황제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그의 시야에 인파를 제치고 당당히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공작 부인의 모습이 들어온 탓이었다.

황제의 말이 멈추고 그의 시선이 공작 부인을 향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저마다 황제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허벅지를 꼬집거나 입 안 살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공작 부인은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고 시선이 느껴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자기만큼 격식 차린 모습으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며 부채질만 반복했다.

“...크흠, 흠, 격식 차리지 말고 즐기도록. 새아가, 너를 위한 자리니 이들에게 뭐라도 한마디 하겠느냐?"

“네, 황제 폐하.”

레온하르트의 곁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는 치맛자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볍게 옷자락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온?”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치맛자락을 붙잡아 그녀를 멈춰 세웠다.

“너, 지금 생각하고 있는 말 전부 잊어버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돼. 잊지 마,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네 부모가 아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셔.”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엘리자베스를 단상 아래까지 에스코트했다.

제법 귀여운 두 사람의 모습에 귀족들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돼.”

사람들이 그들을 귀엽다 느끼도록 일부러 엘리자베스의 귀에 손바닥을 대며 레온하르트는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를 그대로 뒀다간 분명 공작 부인이 혹독하게 가르친 대로 어려운 말이나 줄줄 읊어 댈 게 뻔히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가르쳐 준 예법과 레온하르트의 말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호기심과 흥미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술만 한참을 달싹였다.

'저 계집애가 기어이 어미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공작 부인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부채 뒤로 숨기며 생각했다.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 가르치고 또 가르쳤거늘 딸아이는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지, 괜찮아. 날 믿어.”

레온하르트는 간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이 이상 침묵이 계속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영애께 무슨 문제라도 있나?'라는 걱정을 빙자한 악의 섞인 호기심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 황후마마. 그리고 모두들... 음... 저를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꾹 감고 단숨에 내뱉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황후가 직접 씌워 준 화관이 앞으로 떨어져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다급히 그것을 주워다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에 미리 가져다 댔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화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다시 은빛 정수리 위로 앉을 수 있었다.

열 살과 여덟 살, 어린 나이다운 깜찍한 모습과 그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실수, 그리고 그것을 무마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사람들은 어느새 저마다 입꼬리를 실룩이거나 그들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어른들의 무도회가 시작되고 잠시 대기실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고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이내 엘리자베스는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레온하르트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억지로 눈을 맞췄다.

“리지, 리지. 괜찮아?"

“어... 어떡해...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나를 다시 데려간다 하시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내가 장담해. 만약 아바마마께서 그딴 명령을 내리시면 내가 널 업고 야반도주라도 할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차갑게 식은 손을 꼭 붙잡았다.

"가자, 리지. 오늘은 네 환영식이야. 너를 위해 사람들이 선물을 잔뜩 가져왔을 거야.”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관심을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그녀 곁에 앉아 무릎의 먼지를 툭툭 가볍게 털어 냈다.

“궁금하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벌 떨리던 몸이 조금씩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충분히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한번 팔을 내밀었다.

“오! 마침 잘 왔구나. 그렇지 않아도 짐이 새아가를 위해 선물을 주려던 참이었단다.”

레온하르트의 팔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한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였다.

황제께서 앉으라 하니 단상 가운데에 앉기는 했지만 어쩐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좀처럼 얌전히 있기 쑥스러웠다.

황제가 손짓을 하자 저마다 순서에 맞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귀족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모두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있거나 손에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친구요?"

황제는 손수 엘리자베스의 비뚤어진 화관을 고쳐 씌워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의 앞으로 온 귀족들은 꼭 그녀가 이미 황태자비라도 된 양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신과 제 아이의 이름을 소개하거나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엘리자베스는 낯선 어른과 어색한 동작으로 인사를 올리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상냥하게 답해주었다.

“여러모로 사랑스러운 밤입니다, 엘리시움 영애. 페리안 후작이라 합니다.”

“일스는 오지 않았나?”

지루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곁에서 낯익은 귀족들의 젊은 시절을 감상하던 레온하르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하께서 이전에 제 아들 녀석과 만난 적이 있으셨는지요?"

레온하르트는 아차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생에 유일한 벗을 만나려면 아직 몇 번의 계절을 더 지나야 했다.

“아, 아닐세. 그냥 소문으로... 희대의 천재라고들 하기에....”

의아한 표정의 페리안 후작이 그제야 아아, 하며 내심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겨우 글줄 조금 읽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전하의 귀에까지 그 아이의 소문이 들어갔다니 아비 된 자로서 뿌듯함을 숨기기 어렵군요. 미래의 황후마마, 괜찮으시면 이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후작은 작은 여행용 트렁크를 내밀었다.

다른 귀족들이 선물한 보석이나 드레스, 구두, 액세서리와 달리 여행용 트렁크? 엘리자베스는 호기심을 느끼고 후작에게 질문했다.

“열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물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의 체구에 딱 맞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여행용 트렁크에 집중됐다.

“와아...!”

트렁크를 열어 본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트렁크 속에는 도자기로 만든 인형과 인형을 위 드레스와 구두, 잠옷, 승마용 바지,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머리 장식은 물론 인형용 여행 가방과 티타임을 위한 작은 다구에 심지어는 사냥용 총과 검까지 들어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정말 감사합니다, 페리안 후작님.”

“영애께서 마음에 들어 해 주시니 오히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꺼내 보았다.

진짜 금으로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와 새파란 유리 눈동자, 장밋빛 뺨과 입술이 무척 사랑스러운 인형이었다.

"마음에 들어?"

"응!"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그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무릎 위에 인형을 앉혀 놓고 남은 귀족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동안 인형 하나 선물할 생각을 못 했나 싶을 정도로 공작저의 방엔 이런 도자기 인형은커녕 그 흔한 곰 인형 하나 없었던 것이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선물을 주러 온 사람은 엘리자베스도 이전에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시계탑의 주인을 대신해서, 그리고 시계탑의 모든 이를 대표해서 온 미미르라고 합니다. 리지, 황궁에 온 걸 다시 한번 축하해.”

레온하르트는 미미르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의 흔적들이 가득한 차림으로 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최소한의 예법은 알고 있었던지 그녀는 짙고 어두운 톤의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미르 언니!”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선물이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녀의 마법이 어떻게 발동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계탑을 대표해서 마법사가 왔다는 말에 잠시 서로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까지 몰려왔다.

미미르는 손가락을 세 번 튕겼다. 그러자 그때마다 무지개가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더니 각각 새와 나비가 되어 엘리자베스가 쓰고 있던 화관 위로 내려앉았다.

이어서 미미르는 주머니에서 작은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이건 언제 어디서든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는 시계야. 저번처럼 다른 시간으로 가지 않게 조절해 뒀으니 안심해도 돼.”

“정말 고마워요, 미미르 언니!"

미미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을 동경하는 마법사들의 눈빛이라면 질리도록 받아 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동경 어린 눈빛이라면 얼마든지 더 받고 싶었다.

“어떠냐 새아가,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느냐?"

미미르를 마지막으로 선물을 가져왔거나 자제들을 소개하기 위해 먼저 인사를 올린 귀족들이 모두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황제의 말에 핫, 하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인형과 미미르의 마법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던 탓에 페리안 후작이라는 이름 말곤 누가 누구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리지, 조금 있다 애들이랑 같이 놀자. 그럼 자연스럽게 친해질 거야.”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당황하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황제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긴장으로 잔뜩 굳은 어깨가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 * *

황실 기사단의 총책임자이자 레온하르트의 검술 스승,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호위 기사, 그리고 달밤의 뱃사공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 경은 우울한 표정으로 회장 구석에서 타깃을 찾고 있었다.

또 망할 놈의, 아니지. 월급을 위해서라도 그분을 낳으신 분은 망하시면 안된다. 하여튼 최근 들어 자신을 아주 시종 부리듯 구는 황태자 전하의 사전 명령이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걸 공작 부인에게 전부 먹여.'

'독살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다면 나도 좋고 리지도 좋고 모두가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아무래도 낮겠지?'

'그런 어려운 말은 또 어디서 배우셔서는....’

'리지를 위해서야. 할 수 있지?'

그 결과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은 제국에서도 부르는 게 값이라는 전설의 와인병이었다.

빨간 리본까지 곱게 매인 병을 들고 알베르트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 다시 한탄했다.

때마침 타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래서야 굳이 매의 눈빛으로 찾을 필요도 없겠군.’

대체 머리카락에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의 공작 부인에게 다가가며 알베르트는 속으로 이죽댔다.

“엘리시움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황실 기사단장이자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영애의 호위 임무를 담당하는 베른이라 합니다.”

알베르트는 한때 사교계를 설레게 만들었던 수려한 미소와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졸데의 호위 기사라고? 흐음, 그 아이를 잘 부탁하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쳐선 안 될 일이야.”

엘리자베스의 상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모두들 뒷목을 잡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며 공작 부인은 부채만 퍼덕였다.

“실은 부인께 한 가지 전해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알베르트는 공작 부인에게서 나는 독한 향수 냄새에 코끝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황실 정원에서 숨쉬기 운동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미래의 사위가 장모님께, 라는 전언과 함께....”

“세상에! 이건 그 유명한....”

“쉿! 부인,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이건 오직 부인만을 위한 선물이니까요."

알베르트는 과거의 경험을 살려 능숙하게 공작 부인의 입술 위로 장갑 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씩 웃었다.

공작 부인은 알베르트가 뒤로 물러서자마자 더욱 거세게 부채를 파닥였다.

공작과 처음 선을 봤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심장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한 잔, 전하를 대신해서 올려도 되겠습니까?"

“어... 얼마든지.”

알베르트는 '가능한 많이! 아바마마의 와인 저장고를 전부 털어도 상관없으니 완전 취하게 만들어 버려!'라고 자신을 닦달한 황태자를 향해 속으로 이를 갈며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무도회를 위해 거의 금식에 가까운 식이 요법으로 다이어트를 했던 공작 부인은 알베르트가 건네주는 잔을 받으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겨우 와인 한 잔일 뿐이야. 물이나 다름없다구.'

'미쳤어? 빈속에 와인이라니! 그러다가 폐하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야!'

'하지만 목도 마르고 무엇보다 저 와인은 황실이 아니면 마실 수 없는 물건인데....’

“부인?"

그러나 알베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재촉하는 순간 공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둘로 나눠 싸우고 있던 그녀의 자아는 하나로 다시 합쳐져 붉은 파도가 일렁이는 잔을 빼앗듯 낚아챘다.

“...하아....”

사람들의 입소문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이건 전설이라는 말론 부족했다.

“전하께서 부족함 없이 부인을 모시라고 명 받았습니다.”

알베르트는 순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탄식을 흘린 공작 부인에게 병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곤 인적이 드문 테라스로 그녀를 안내했다.

공작 부인은 잔을 내밀었다. 콸콸콸, 병만 전설의 와인과 같을 뿐, 속에 들어 있는 건 그저 그런 고급 와인에 불과한 적포도주가 끝도 없이 공작 부인의 배속으로 들어갔다.

“부인,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게요.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 자네는?"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온 것은 엘리자베스와 같은 은발 벽안을 가진 엘리시움 공작이었다. 알베르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정을 설명했다.

“영애의 호위를 맡은 베른이라 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인께 와인을 선물하셨기에 한 잔 올려 드렸을 뿐인데...."

"어어...? 이이게 누구야! 우리... 잘난 ... 남편 아니야...! 황제? 화앙제? 가자! 가야지! 우리 이졸데... 가암히... 내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우리 아가 혼쭐을 내 주러 가야지...!"

일이 이렇게까지 잘 돌아갈 줄은 몰랐는데.

알베르트는 공작에게 거의 끌려가는 공작 부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와인병을 기울였다.

전설의 와인은 아니어도 어쨌든 황실에 납품되는 와인인 만큼 제법 맛이 좋았다.

그에 어울리는 안주는 지금부터 눈앞에 차려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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