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 꽃이 전부 시들 때까지(1)
엘리자베스의 환영식 겸 봄맞이 무도회 당일이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재스민 꽃잎을 띄운 물로 목욕을 하고, 향수를 뿌린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두 시간이 넘도록 미용사들이 달라 붙어 머리카락을 손질해 주고 있었다.
앞머리는 눈썹을 살짝 덮을 정도로만. 옆머리는 턱 근처에서 깔끔하게 싹둑 잘라 인형 같은 분위기가 나도록 하고.
남은 긴 은발은 적당히 허리에 닿기 전 정도의 길이로 가볍게 다듬었다.
꽃 천 송이를 으깨어야 겨우 한 방울 얻을 수 있다는 귀한 기름을 아낌없이 발라 빗질에 빗질을 거듭하자 엘리자베스의 정수리 위로 빛이 반사되어 천사의 후광처럼 동그란 테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미용사가 불에 달군 인두로 그녀의 머리를 동글동글하게 말았다 브러시로 가볍게 펴 주자 그녀의 머리카락은 꼭 졸졸 흐르는 개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녀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은발을 보며 감탄만 연발하는 가운데 재단사가 완성된 드레스를 펼쳐 놓았다.
새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는 허리 아래가 무거워지는 페티코트가 없어도 자연스러운 종 모양 실루엣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엘리자베스가 선택한 것보다 조금 더 진한 분홍색 실크 바탕 위에 부드러운 샤스커트가 꽃잎처럼 층층이 겹쳐졌다.
그 뒤, 진한 분홍색 위로 흰 레이스가 얹어졌다. 하얀 장미가 수놓인 레이스는 꽃송이마다 크리스털 비즈가 박혀 반짝반짝 빛났고, 그 끝이 조개껍데기처럼 둥글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레이스가 둘리자 드레스는 비로소 그녀가 골랐던 은은하고 달콤한 핑크빛으로 완성됐다.
상의 또한 마찬가지로 흰 장미 덩굴 레이스를 실크 위에 덧대었으나 아이의 여린 피부가 쓸리지 않도록 목깃을 연녹색 새틴 바이어스로 감싸고 리본 자수를 더해 꼭 꽃 덩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레이스로 만든 소매는 팔을 위로 뻗으면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릴 만큼 충분히 통이 넓고 풍성했다. 핑크빛이 연하게 감도는 최상급 진주가 오밀조밀한 레이스 달린 새틴 커프스에 장식 단추로 달려 있었다.
그녀의 허리 뒤쪽에 마지막으로 리본 장식을 달아 주며 재단사가 말했다.
"아가씨, 사실 이 드레스는 아직 미완성이랍니다.”
“네?”
어쩜 좋아, 당장 무도회가 코앞인데 드레스가 미완성이라니!
거울을 통해 엘리자베스의 당황한 표정을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재단사는 진주와 크리스털로 된 술 장식을 마지막으로 더하며 맑은 소리로 웃었다.
“웃어 주세요. 모든 드레스는 입으신 분의 웃음으로 완성되는 법이에요.”
“웃음... 이요?"
엘리자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 웃음이라. 그녀는 거울 앞에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거울 속에 있는 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불안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재단사는 황실의 보석을 쿠션에 받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시녀들 또한 안타까운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약혼식을 올리지만 않았을 뿐 황궁에서 지내는 그녀의 위치가 어떠한지 귀족들에게 대놓고 확인시켜 주기 위해 황후는 엘리자베스가 황실의 보석을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
황후가 직접 골라 준 보석은 엘리자베스의 은발에 맞춰 은과 진주로 만든 목걸이로, 하트 모양 펜던트에는 누구나 보는 순간 황실의 물건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똑똑똑
“리지, 잠시만 앉아 볼... 래...?"
시녀들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온 건 마찬가지로 검술 수업이 끝나자마자 시녀들에게 붙들려 무도회 준비를 해야 했던 레온하르트였다.
그녀의 화사한 드레스에 맞춰 그 또한 회색빛이 살짝 섞여 너무 과하지 않은 파스텔톤의 푸른 예복을 입고 있었다.
앞머리를 위로 넘기고 허리에는 장난감에 불과한 예도까지 찬 레온하르트는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쉽게 다가가기 힘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정말 엘리자베스 맞나?
'어마마마의 장미 정원에서 사는 요정이라 해도 다들 믿겠군.'
비록 표정은 어두웠지만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은발만큼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를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자 부드럽고 가벼운 스커트 자락이 허공으로 순간 붕 떠오르며 꽃잎처럼 겹겹이 겹쳐져 있던 샤스커트가 흩날렸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미용사가 애써 넘겨 준 앞머리를 마구 헤집어 댔다.
덕분에 말끔하게 넘겼던 앞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평소의 레온하르트 답다고 생각했다.
“너...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렇게 돌지 마.”
"응?"
눈을 감고 춤추듯 빙그르르 도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당히 말을 돌리더니 손짓으로 엘리자베스를 의자에 앉히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분홍 새틴로 만든 굽 낮은 어린이용 구두가 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공작저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신발을 선물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엘리자베스의 발에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겨 주고 직접 리본까지 묶어주었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네가 걸어갈 길에 꽃잎 뿌려 주기와 가능한 걷기 편한 신발을 신겨 주는 일이 전부일지도 몰라. 그래도 리지, 네가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걸을 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바쳐 너를 웃게 할 거야.”
레온하르트는 진심이었다. 억지로 엘리자베스를 걷게 만드는 건 신이라 해도 허락할 수 없었다. 오직 그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꽃길이든 가시덤불 길이든 걷기를 바랐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가시덤불 위를 걷기를 원한다면 제가 먼저 그 위를 굴러 날카로운 가시를 한 번 억눌러 조금이라도 편하게 걸을 수 있길 감히 욕심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이해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위한다는 것만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심장 소리가 유난히 콩닥콩닥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온통 새하얗기만 한 그녀의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아름다운 제비꽃빛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읽어 내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다.
“오늘 그대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저에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엘... 리자베스.”
원래는 엘리시움이라 하는 게 맞지만 레온하르트는 부러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술 끝이 간질간질, 저도 모르게 마구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호다닥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꼭 붙잡은 손 너머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지면 어쩌지? 엘리자베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황궁 안이 덥다고 느끼며 볼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황궁이 더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볼이 후끈후끈하게 뜨거워진 탓이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 아가씨.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셔요.”
"다녀오지. 다들 수고 많았네.”
"다녀올게. 저, 재단사 씨...!”
"하명하세요, 아가씨."
문을 나서기 직전 엘리자베스는 있는 힘껏 웃어 보였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드레스는 이제 완성되었나요?"
재단사는 시녀들과 함께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든 드레스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앞으로도 늘 그렇게 웃어 주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지요.”
* * *
엘리시움 공작 내외는 무도회의 시작 시간보다 10분쯤 늦게 황궁에 도착했다.
절대로 이 드레스가 좋을까, 저 드레스가 좋을까, 이 구두가 좋을까, 저 구두가 좋을까, 여보 이 모자와 이 모자 중에 뭐가 더 나을 것 같소? 둘 다 똑같은 검정으로 보이는데요, 그렇게 치면 당신 입술 연지도 전부 똑같은 빨강이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거늘! 따위의 부부 싸움을 하느라 늦어진 건 아니었다.
“...주인공은 원래 늦게 등장하는 법이야. 그렇지 않소, 부인?"
"호호호, 당신 말이 맞아요. 호호... 호호호...”
공작 부인은 상아를 얇게 펴서 만든 부채를 파르락대며 어색하게 웃었다.
"슬슬 갑시다, 부인.”
"그러지요.”
여덟 시간이나 걸려 완성한 머리 장식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던 공작 부인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초대장을 받은 날 이후로 공작 부인은 물과 삶은 감자, 드레싱을 더하지 않은 야채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덕분에 원하는 수준으로 허리를 조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도 그녀는 가벼운 동작 하나에도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오늘 입은 드레스는 오늘을 위해 제국에서 제일가는 재단사와 보석 공예가를 몽땅 불러 만든, 말 그대로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의 묵직한 드레스였다.
회장으로 가는 내내 그녀와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흠칫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공작 부인은 그들의 시선을 충분히 즐기며 엘리시움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아 회장으로 입장했다.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 납시오!"
그들을 마주한 시종은 질린 표정으로 리스트 가장 맨 위에 있는 이름을 크게 외쳤다.
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공작 내외에게로 몰리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공작 부인은 수줍은 척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며 공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댔다.
그러나 치맛단을 따라 줄줄이 달아 놓은 보석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입은, 강철로 살을 대어 만든 새장 모양의 크리놀린은 일정 거리 이상 공작에게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그녀를 다시 공작으로부터 튕겨 내듯 떼어 놓았다.
어색함을 애써 무마하며 다시 공작으로부터 떨어진 공작 부인은 천천히 회장 안을 관찰했다.
“빌리엔느 후작 부인. 오랜만에 뵙는군요.”
“엘리시움 공작 부인! 좋은 저녁입니다. 크흠... 흠. 부인께선 여전히 고상한 취향을 즐기시는군요.”
공작 부인은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신분이 더 높은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부인들에게 친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빌리엔느 후작 부인은 이름이 불리는 순간 표정을 찌푸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한 미소를 새로 덧그리며 등을 돌렸다.
그녀가 공작 부인을 마주하고도 경악하지 않고 헛기침 한 번에 다시 표정을 수습할 수 있던 것은 순전히 그동안 사교계에서 쌓아 온 내공 덕이었다.
"엘리시움 공작가는 천사의 후예들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요. 저희 같은 인간들과는 시간 자체가 다르게 흐르는가 봅니다.”
“이번에 새로 화장품을 바꿔 보았답니다. 원하신다면 부인께도 조금 나누어 드릴까요?"
“어머, 영광이지요.”
공작 부인은 하얗게 분을 잔뜩 칠한 볼을 손등으로 짚으며 우아하게 웃었다.
비꼬는 말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이 사람이 이렇게 아둔했던가?
빌리엔느 후작 부인은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녀를 함께 담소를 나누던 무리 속으로 이끌었다.
"어머나 엘리시움 공작 부인!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오늘따라 머리 모양이 무척... 부인 외에 또 누가 이런 머리 모양을 할 수 있을까요! 무척... 무척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네요!"
“호호호. 뭘 이런 걸 가지고, 겨우 여덟 시간만 투자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공작 부인은 부채를 펼쳐 들고 얌전한 동작으로 웃었다.
마음 같아선 턱을 잔뜩 치켜들고 웃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여덟 시간 동안 머리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려 기름으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 작은 태엽 장치를 넣어 거울로 된 폭포가 움직이게 만든 머리 모양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부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체 언제 적 드레스야? 박물관에 걸어 놓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공작저에선 올해 신상 드레스 카탈로그도 안 보나?'
모두가 봄맞이 무도회에 어울리는 가볍고 하늘하늘하며 밝은 색조의 드레스에 꽃이나 새 같은 봄을 연상시키는 장신구를 걸친 와중에 홀로 번쩍거리는 원색의 보석과 이젠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한참 지난 시즌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작 부인은 여러 의미로 회장에서 매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무도회장이 조금 덥군요. 그렇지 않나요?"
"어머, 혹시 봄 감기에 걸리신 건 아닐까요? 저는 지금 온도가 딱 좋다고 생각하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적극 활용하며 한 부인이 참새처럼 종알거렸다.
공작 부인은 자신이 겹겹이 껴입었던 옷은 생각 못 하고 애먼 회장만 탓하며 예상보다 높은 실내 온도에 머리를 고정시킨 기름이 녹으면 어쩌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 이제 황제 폐하께서 나오시려나 봅니다.”
“우리 이졸데도 함께 나오겠지요!"
공작 부인은 머리 모양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콧대를 치켜들고 사람들 무리를 (크리놀린으로)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의장대가 나팔을 불고 '황제 폐하, 황후마마, 황태자 전하, 그리고 전하의 친우이신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하는 알림과 함께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사랑스럽기도 해라! 폐하, 역시 황태자의 동생은 딸이 좋겠지요?"
“진정하세요, 황후, 허헛. 장담하건대 오늘은 우리 새아가가 가장 아름다울 거야.”
"당연하지요. 누구 약혼녀인데.”
"그 약혼을 성사시킨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여 황공무지로소이다! 아바마마!”
레온하르트는 짜증 가득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황제 또한 못마땅한 얼굴로 이제 겨우 무릎을 굽히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수 있게 자란 제 아들을 내려다봤다.
“우리 새아가, 저것들은 내버려 두고 잠시 눈을 감아 보겠니?"
“네? 네, 황후마마.”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고 혹시 몰라 다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코끝에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가 스치더니 머리 위에 무언가 얹혔다.
"완벽해!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어때, 마음에 드니?"
엘리자베스는 한쪽 벽을 채우고 있던 거울로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 위엔 봄을 엮어 만든 화관이 얹혀 있었다.
“우리 며늘아기에게 주는 환영 선물이란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눈만 깜빡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황후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는 그렇지 않아도 레온하르트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뺨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잘 어울려. 리지. 아바마마, 그냥 이 자리에서 약혼식까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허.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니라.”
쳇. 레온하르트는 하는 수 없다며 가볍게 혀를 차고 엘리자베스에게 팔을 내밀었다.
예법서의 그림에서나 보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의 완벽한 자세였다.
“그럼 슬슬 갈까?"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팔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황후와 황제 또한 그들과 같은 자세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레온하르트와 함께 빛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