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꽃샘추위(3)
"아바마마!”
"황제 폐하.”
“왔느냐. 왔습니까, 내 사랑 프레이야.”
레온하르트는 새삼 뭐 저런 아버지가 다 있냐며 혀를 찼다.
아들과 부인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서야 원.
황제는 직접 황후가 앉을 의자를 빼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후는 겨울바람을 망토처럼 두른 차디찬 자태로 쌩하니 발걸음을 돌려 황제가 빼 준 의자의 건너편 자리에 스스로 의자를 빼고 앉았다.
머쓱한 표정으로 황제가 그녀의 눈치만 보는 사이 빈자리는 레온하르트가 차지했다.
“네가 여긴 왜 앉아?"
“의자가 민망할까 봐요.”
황제는 표정을 구기며 긴 책상의 상석에 앉았다.
“오늘 우리 황실 가족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 처리 하나 꼼꼼히 하지 못해 어린 새아가를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만든 무능하신 어느 분을 대신하여 엘리시움 공작 내외를 어떻게 사교계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 것인가 그 계책을 짜기 위해서지요.”
황후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레온하르트는 차갑게 가라앉은 어마마마의 시선과 그런 어마마마의 눈치만 보는 아바마마를 보며 속으로 다시 혀를 찼다.
"황태자, 새아가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어마마마의 말씀대로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일 처리 하나 꼼꼼히 살피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대충대충, 건성건성 승인하신 분 덕분에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에도 밤중에 악몽을 꾸고 일어나 제 곁에서 겨우 잠들었습니다.”
황후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미리 무거운 책이나 두꺼운 책, 표지가 단단한 책은 전부 치워 둔 빈 회의실이었지만 원망 가득한 시선이 그를 찔러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다시 속으로 내쉬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무도회가 가까워질수록 엘리자베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 * *
"흰색, 하얀색으로요.”
“하지만 아가씨, 모처럼 봄인데 하얀색 말고 다른 색을 섞어 보시는 건....”
“흰색이어야 해요.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우리 엘리시움은 천사의 후예라고. 하얀색은 엘리시움을 상징하는 색이고, 그러니 저는 하얀 옷을 입어야 해요."
"리지....”
레온하르트는 재단사와 시선을 교환했다. 황실의 보석을 가지고 온 시녀들 또한 똑같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엘리자베스의 얼굴엔 커다란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근 엘리자베스는 물이나 과일 몇 가지를 제외하곤 아예 입도 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와 유모, 황태자궁을 담당하는 요리사가 총출동해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어딘지 불안한 시선으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코르셋을 입었을 때 조금이라도 허리를 더 가늘어 보이게 하려면 많이 먹으면 안 돼요.”
더 이상 코르셋을 입을 일은 없다고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레온하르트와 유모, 시녀, 심지어는 이번 봄 신상 드레스의 실루엣을 증거 자료로 제시하기 위해 재단사까지 동원됐다.
그래도 세 시간에 걸친 설명과 설득과 회유와 이해와 기타 열 살 어린아이와 어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오늘 아침 그녀는 가까스로 스크램블드에그와 갓 구운 빵 한 조각, 사과 두 조각, 우유 한 잔을 먹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재단사를 불렀을 때, 그녀는 다시 공작저에 있을 시절로 돌아가려 했다.
기호의 수준을 넘어 흰색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아니 집착 그 자체를 보이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모처럼 함께 새 예복을 맞추려 찾아온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리지... 네가 원한다면 카나리아를 닮은 샛노란 다이아몬드, 네가 예쁘다고 한 어마마마의 장미 정원에 피었던 장미색 핑크 다이아몬드, 저번에 내가 말했던 블루 다이아몬드까지 뭐든 쓸 수 있는데....”
“아냐. 흰색. 흰색이어야 해.”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몸을 웅크렸다.
흰색 옷을 입지 않으면 무도회에서 마주친 어머니와 아버지가 화를 내며 자신을 다시 공작저로 끌고 갈 것만 같았다.
"리지... 어휴. 옷은 아무래도 다음에 맞춰야 할 것 같군. 자네는 그사이 리지에게 어울릴 디자인을 더 생각해 보게. 그리고 잠깐만 다들 나가 있도록. 영애와 할 말이 있어.”
재단사와 시녀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둘만 남게 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리지, 내 말 잘 들어 봐. 여긴 황실이야.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선, 아니 제국 전체를 통틀어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야?"
“그야... 황제 폐하... 겠지?"
'아바마마보다 어마마마가 더 위에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무도회가 열린다고 황실이 갑자기기 공작저로 바뀔까? 아니지. 설령 공작저에서 열린 연회라고 해도 거기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있다면 자연히 가장 높은 사람은 리지 네 부모님이 아니라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야. 여기까진 이해했지?"
“으음....”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하면 여덟 살 어린아이에게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해 가며 단어를 골랐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걱정 마.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를 믿어주면 안 될까? 내가 너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응? 리지.”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 그들은 절대로 너에게 손끝 하나 못 대.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아예 황궁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니까.”
“...어떻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그 나이 또래의 악동들만 지을 수 있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나만 믿으라는 듯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 *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치들을 황궁에 다신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들에게 대체 어떤 굴욕을 선사해야 할지....”
“억지로 누르면 오히려 튕겨 나오는 법이지요. 황제 폐하.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황궁에 다시는 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역시 프레이야, 당신은 현명해."
그러나 황후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 앞에서 몸을 낮추는 아바마마의 모습을 보다 못한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려다 말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자가 올해로 열 살이지요?"
"으...응? 그렇지. 벌써 열 살이나 되었지. 시간 참 빠르지. 그렇지요, 황후?"
“열 살 사내아이라면 모름지기 있는 사고 없는 사고 모두 치며 온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법. 아바마마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 황태자 레온하르트, 이 한 몸 바쳐 무도회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저거 혹시 저녁으로 뭘 잘못 먹었나?"
“저야 모르지요. 황태자. 진정하고 우선 자리에 다시 앉으세요. 의자는 발로 밟으라고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을 '저거'라고 칭하시다니요!”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리며 우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계획을 조금 더 자세히 늘어 놓았다.
“흐음... 확실히 어린아이가 할 법한 장난 수준을... 미묘하게 비껴 나갈 듯 아닐 듯... 애매하군.”
“하지만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리지는 물론이고 아바마마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에게? 무슨 의미지, 레온하르트?"
“공작가를 포함해 '일부' 귀족들의 위세란 약해질수록 아바마마께 기쁜 일 아니었습니까?"
황제의 굵은 눈썹이 움찔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일부' 귀족들은 어떻게든 값을 깎으려 드는 손님과 그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드는 상인 같았다. 사사건건 황제의 말에 우선 반대부터 외치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이번 무도회에서 황태자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공작가는 물론 그 '일부' 귀족들 또한 한동안 조용하게 지낼 터였다.
“...할 수 있겠느냐?”
“아바마마의 윤허 여부에 달렸습니다.”
황제는 한참을 고민했다. 매일 어린애답게 뛰어놀기에만 바쁜 줄 알았더니, 어느새 자신의 아들은 제법 의젓하게 황실과 귀족들 사이의 분위기까지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자라 있었다.
“윤허한다.”
“잠깐,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요. 레온하르트? 이 어미를 도와주겠니?"
"물론입니다. 어마마마.”
윤하는 내가 했는데 왜 두 사람만 서로 속닥거려? 황제는 어쩐지 외톨이가 된 기분에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역시 어마마마십니다! 아주 볼만할 거예요.”
“뭐가 말이냐.”
“그렇지? 아주 약간의 우연이 더해졌을 뿐이야. 어린애의 실수를 누가 탓하겠니. 어른의 실수라면 모를까....”
"왜 나를 보는 겁니까, 황후!"
다정하게 레온하르트와 서로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던 황후는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는 그럼 끝난 것 같으니 소첩은 물러나 보겠습니다. 레온하르트? 너도 이제 자야지. 새아가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옆에서 꼭 지켜 주렴.”
“네. 어마마마. 안녕히 주무세요, 아바마마.”
황후는 황제를 향해 '흥!' 하며 코웃음을 날려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감싸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황제는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며 책상 위로 머리를 박았다.
보아하니 오늘도 황태자의 동생 만들기는커녕 다른 침실을 써야 할 판이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레온하르트는 황후와 헤어져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척, 황실 기사단의 숙소로 향했다.
"알베르트!"
하필 그날 당직을 서고 있던 황실 기사단장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 경은 어린 사내아이 특유의 우렁차면서도 맑고 높은 목소리에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나는 진귀한 경험을 겪었다.
“화... 황태자 전하...?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로....”
"당장 시계탑으로 가지.”
"예에?"
레온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아직 반은 잠들어 있는 알베르트에게 다시 명령했다.
"당장 시계탑으로 가잔 말이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스무 해 가까이 난다고 해도 윗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군인의 인생.
알베르트는 아닌 달밤에 시계탑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 노를 젓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러려고 내가 기사단에 입대했나?
시계탑에 도착한 황태자는 그 길로 당장 미미르를 찾아갔다.
늦은 밤 달갑지 않은 손님들의 방문에 미미르는 불친절함이 철철 넘치는 태도로 그들을 반겨 주었다.
“전하, 제가 지금 며칠째 밤을 새워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지. 미미르, 네 힘이 필요해.”
“...베른 경, 혹시 '이것' 좀 가져다가 해부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가 아닌 것 같은데.”
“리지를 위해 네 힘이 필요하다. 미미르"
"방금 그 말 취소. 뭐라구요? 뭘 위해 뭐가 필요하다고요?"
괴팍한 성격의 마법사에 의해 산 채로 해부당할 뻔한 레온하르트는 목소 를 낮추고 알베르트에겐 축객령을 내렸다.
졸지에 황태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단장에서 시계탑을 오가는 뱃사공으로 신분이 격하된 알베르트는 서글픈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리지를 위해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 엘리시움 영애 환영식 겸 봄맞이 무도회에 일단 너도 초대된 거, 알고는 있어?"
“그랬나? 그랬겠지요. 하여튼 이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거기서 네가 마법을 좀 써야겠어.”
“....마녀에게 부탁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지."
“뭘 주실 수 있죠?"
“최고의 웃음과 함께 너를 향한 리지의 호감을 보증하지.”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 급박한 표정으로 미미르의 방에 쳐들어올 때완 달리 제법 여유로운 태도로 미미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기대되네요. 아니, 기대해도 좋아요.”
“거래 성립인가?"
“그런 것 같군요. 리지는 요즘 어떤가요?"
“아, 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악몽을 다른 꿈으로 바꿔 주는 약 같은 건 없을까...?”
미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이번엔 또 무슨 악몽?
* * *
엘리자베스는 정말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레온하르트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앞엔 재단사가 가져온 원단 샘플과 새로운 디자인 시안들이 늘어져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믿어 보기로 결심했다.
“저... 저는 이 색... 이 분홍색이 예쁠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갓 피어난 장미처럼 옅은 분홍색 실크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동시에 레온하르트와 재단사, 시녀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미미르가 준 약은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요사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가득 덮었던 그늘도 제법 사라지고 그녀의 먹는 양도 레온하르트 못지않게 늘어난 참이었다.
비록 그 대가로 자신의 백금빛 머리카락 몇 올을 연구용으로 건네야 했지만 - 미미르는 최근 머리색을 영구히 바꾸는 시약을 연구하고 있었다 - 전혀 아깝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같은 톤의 푸른색으로 맞추시겠습니까?"
“그럴까? 리지, 네 생각은 어때?"
"레온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재단사는 원단에 어울리는 디자인 시안을 몇 가지 내놓았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 그리고 시녀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