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기사와 레이디(2)
레온하르트는 알베르트의 맹세에서 아름다운 레이디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맹세하는 기사님을 떠올렸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으나 그는 가슴속에서 가시가 비죽 튀어나오는 것 같은 감각에 연신 불편한 티를 내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하자, 나. 설마 이런 일로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겨우 기사가 레이디한테 맹세하는 것뿐이야. 애초에 알베르트를 리지의 호위로 삼는다고 한 건 나였잖아? 그리고 알베르트는 리지보다 한참 어른인 데다 이미 약혼녀도 있다고! 무엇보다 미래엔 저 금발도 다 빠져 버리고, 근육은 뱃살로 변한단 말이다!”
어린아이의 몸은 왜 이리도 감정을 숨기기 어려운지.
마음으로는 전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데 괜히 불만 가득한 입술만 툭 튀어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보낸 구원을 바라는 눈빛에 레온하르트의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레온하르트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과연 그녀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시 물었을 때도 그는 똑같은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알베르트.”
엘리자베스는 짧게 고민하더니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식으로 그를 자신의 호위 기사로 임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뱃속에선 우습지도 않은 하찮은 질투심이 부글거리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성공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알베르트를 보아하니 굳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태세였다.
“그럼 이제 보호해 줄 어른도 있으니...."
"있으니...?"
알베르트는 다시 본능이 비상종을 마구 울리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명령을 내리시려는 건진 몰라도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우며 기사단장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해내기엔 시간과 체력 양쪽 모두 불가능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일부턴 황궁 여기저기를 소개해줄게!”
맙소사. 알베르트는 왜 이런 불길한 직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냐며 속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절규했다.
물론 황태자 전하와 그분의 약혼녀 되실 영애를 모시는 일은 기사단장이자 영애의 호위 기사인 그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당장 레온하르트의 검술 수련부터 해서,
가만있자. 검술 수련과 황궁 구경...? 잘하면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크흠흠, 전하.”
“왜 그러는가?"
알베르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레온하르트를 떠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 최근 수련을 게을리하셨군요.”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알베르트는 더욱 엄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말꼬리를 늘였다.
“지금 일국의 작은 태양께서 변명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닐세! 윽... 원하는 게 뭔가.”
레온하르트는 알베르트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데는 분명 뭔가 원하는 조건이 있어서 그런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이 적중했는지 알베르트의 눈썹이 가볍게 실룩였다.
"황궁을 안내해 드리는 건 굳이 전하께서 직접 하시지 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전하께서, 굳이 다른 이들을 뒤로하시고, 직접 엘리자베스 아가씨께 황궁을 안내하시고 싶으시다면....”
“싶다면...?"
알베르트는 사교계의 여인들을 설레게 했던 특유의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제의했다.
“수련을 마치신 뒤에 저와 함께 안내해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 홀로 가실 수 없는 곳도 저를 동행하시면 무리 없이 출입할 수 있을 겁니다.”
“화, 황태자인 이 내가 황궁에서 갈 수 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황실 무기고. 마법 연구소. 그 외에도...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황궁에 어른 없이 아이들만 가기엔 위험한 곳이 많지요...?"
...당했다!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자베스의 호위 기사라는 명분으로 알베르트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황궁의 통제 구역까지 마구 드나들려고 했는데, 그걸 역으로 이용하다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싱글싱글 웃는 알베르트와 그런 알베르트를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 듯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보다, 품 안의 베일리가 어느새 잠든 것을 깨닫고 베일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면 될 거 아냐! 두고 봐, 당장 내일부터 새벽같이 일어날 테니."
"어이쿠,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말입니다. 전하,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셔야 키도 쑥쑥 크는 법입니다.”
알베르트는 유쾌한 기분으로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과연 내일 아침 정말 그가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낼지 아주 약간 기대되었다.
* * *
잠시 지내시는 정도라면 불편함 없을 거란 유모의 말과 달리 하루 만에 준비한 엘리자베스의 임시 거처는 레온하르트의 방보다 더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처음 그녀의 임시 거처에 들어왔을 때도 느꼈지만 엘리자베스의 침실로 들어온 순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방이 그저 그런 손님방처럼 느껴졌다.
"피곤하지 않아?"
"조금.....”
침대에 앉은 엘리자베스는 아장아장 반은 걷고 반은 기어서 떡하니 베개 위로 기어 올라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베일리를 보며 까르륵 웃었다.
"베일리는 자기 침대가 저기 있는데 왜 저기서 자려는 거지?"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강아지한테 지고 싶진 않은데.”
"응?"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이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저, 리지.”
“레온.”
동시에 상대방을 부른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서로 눈만 마주치다가,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쿡쿡 웃어 댔다.
"레온 먼저 말해.”
“그럴까? 음... 리지, 내가 만들어 준 꽃반지. 혹시 아직 기억해?"
"당연히 가지고 있지!"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장 위에 있던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속엔 이미 말라비틀어지고 시들어 버린 꽃반지가 들어 있었다.
“...잠시 빌려 가도 될까?"
레온하르트는 목이 메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면서도 순순히 상자를 넘겨주었다.
"꼭 돌려줘야 해?"
“물론이지. 원래 빌려줬다 갚을 때는 이자까지 같이 줘야 하는 법이야.”
"이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네 차례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냥, 고맙다고... 하고 싶어서."
"고마워?"
“사실 아직도 뭐가 뭔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다들 나한테 친절하고... 이제 매도 맞지 않고, 코르셋도 안 입고, 신발도 편하고, 또 귀여운 베일리도 만났고, 멋진 베른 경도 만났고....”
무슨 베른 경? 흐뭇하게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레온이 내 손을 잡아 끌어 줬어. 뒤에서 받쳐 줬어. 괜찮다고 옆에 있어 줬어.”
엘리자베스는 다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볼이 따끈따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이런 감각이 낯설거나 무섭지 않았다. 간질간질, 겨우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가슴속 씨앗은 이제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본격적으로 푸른 떡잎을 내보이려 하고 있었다.
"고마워, 레온.”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순간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솟아오르는 환각을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그것은 날개였다.
엘리시움이 천사의 후예라는 말은 그저 소문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리지.”
“응?”
“내게... 기회를 줘서."
“기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지?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굿나잇 키스라며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도망치듯 그녀의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간 모든 일에 서툰 어린애의 몸이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레온하르트는 유모에게 제국에서 제일가는 보석 공예가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보석 공예가를요?"
"리지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유모는 약혼녀를 생각하는 어린 레온하르트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암요, 가장 솜씨 좋은 사람으로 부르겠습니다.”
다음 날 유모가 불러다 준 보석 공예가에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로부터 빌린 상자를 내밀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원해. 할 수 있겠어?”
* * *
역시나 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수련하던 장소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오늘 있을 군사 회의를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였는데...!'
괜히 무리하는 것보단 차라리 낫다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여전히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하고, 섭섭하고, 또 아주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모처럼 소드 마스터의 자질이 보이는 아이를 만났나 했더니....'
"베른 경, 슬슬 회의 시간입니다.”
“금방 가겠네.”
알베르트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빈자리를 바라보다 부관과 함께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가 잠들어 있을 거란 알베르트의 예상과 달리 그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황궁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엘리자베스를 보고 깜짝 놀라다가, 이내 소문의 그녀라는 것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리자베스 아가씨.”
“푹 주무셨나요? 밤새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구요?"
“아침은 입에 맞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공작저에서 받지 못한 친절한 인사말과 안부를 묻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응. 잘 잤어요. 편히 쉬었어요? 베일리가 제 베개를 하나 가져가 버렸지만 다른 베개가 있어 괜찮았어요. 아침으로 먹은 에그 베네딕트가 무척 맛있었구요, 또....”
“리지. 말 높일 필요 없어. 오히려 저들이 불편해할 거야.”
레온이 당황하며 엘리자베스의 귀에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가? 하며 시녀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그녀들은 감히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되실 분이자, 황태자비 되실 분이며, 황후 되실 분으로부터 존댓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기절할 듯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황궁에 사는데...."
“이 황궁에서 네가 존댓말을 쓸 사람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말고 아무도 없어. 그러니 괜찮아.”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편하게 하대하여 주세요. 네?"
“그... 그래도... 돼?"
"물론이지요! 자, 엘리자베스 아가씨. 마지막으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했나요?”
엘리자베스는 손가락을 입술로 살짝 물며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까먹었다.”
고개를 숙이며 엘리자베스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벌렸다.
비록 하려던 말은 잊었지만 대신 할 말이 생각났다.
“오늘도 예쁜 하루 보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양손으로 볼을 감싸 쥔 엘리자베스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의 시녀들을 보며 잠시 그들을 위한 가림막이 되어 주길 자처했다.
* * *
“저기 있지, 레온.”
"응?"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던 엘리자베스가 저 멀리 탑처럼 솟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뭐야?"
아무 생각 없이 엘리자베스의 손끝을 쫓아 시선을 돌린 레온하르트는 윽, 하며 표정을 잔뜩 구겼다.
"레온?"
“리, 리지. 우리 저런 거 말고 다른 거 보러 갈까? 아! 베일리의 아빠는 아직 본 적 없지?"
"우와, 호수 위에 탑이 있어!"
"그... 그러네. 정말 신기하다. 그치?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다른...."
"우리, 저기에도 갈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반짝반짝 빛나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보며 제발 그녀가 말한 '저기'가 호수 근처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또박또박, 똑똑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다시 표현했다.
“저기 저 탑에 가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