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사와 레이디(1)
레온하르트는 걸음마다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마마마께 마구 떼를 써서 리지를 공작저에서 데려온 것까진 좋았는데, 그 뒷감당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어려졌다고 생각마저 짧아지다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레온하르트는 아바마마가 기다리실 황제의 서재로 향했다.
생전의 나이에 다시 10살을 포함해서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게.”
웅장하다고 커다란 서재의 문이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고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소리도 없이 다시 문이 닫혔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기억보다 조금 덜 낡은 서재의 물건들에게 아련한 눈빛으로 반가운 인사말을 건넸다.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바짝 긴장해서 더욱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겼다.
겨우 황태자, 그 한마디에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설 만큼 황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 공작저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작위를 박탈한다는 황명인가요?"
"아쉽게도 반만 맞췄구나.”
황제는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주물렀다.
"아침부터 공작가에 연락도 없이 찾아가 그런 사달을 벌인 경솔함에 대한 유감의 표시와 함께 영애를 강제로 부모로부터 떼어 놓은 것에 대한 보상이자 이른 지참금으로 몇 대 전 공작가로부터 몰수했던 영토의 일부를 다시 돌려준다는 내용의 황명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삼켰다.
기억 속 공작 내외는 분명 이름만 공작인 수준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들은 몰락하기는커녕 오히려 번성하게 된다.
“그들이 어느 날 리지를 다시 돌려 달라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지요?"
“지금은 그 아이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챙기라고 가르치신 건 아바마마셨습니다. 다른 작위도 아니고 공작의 작위를 가진 가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계속해서 황권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10살 아이가 걱정할 내용은 아니구나.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핫, 하며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그는 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아닌 철없이 뛰어놀기에 바쁜 10살 꼬맹이였다.
레온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아이다운 거지?
“그런 이야기는 어른들이 알아서 할테니 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거라.”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더 이상 그를 질책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이번 일은 새아가를 구하게 되었으니 넘어가겠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네, 아바마마.”
“결과적으로 너는 새아가를 구했어. 그러나 그 과정이 과연 정당하고 옳았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리지... 아니, 엘리자베스는 공작저에서 계속해서 힘든 날을 보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황명을 내려 정식으로 그 아이를 황궁으로 데려오거나 혹은 강제로 공작 부부를 바꿔 놓을 수도 있었겠지.”
"아바마마는 그 사람들이 황명으로 변할 거라 생각하시나 본데, 겨우 그 정도로 변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엘리자베스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도 않았을겁니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황태자.”
레온하르트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는 손깍지를 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가 옳았다고 과정까지 늘 옳다는 법은 없다. 황태자는 짐의 말을 명심하거라. 너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될 후계자야. 선택하기 전에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하거라.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다는 말이 왜 있겠느냐?”
압니다, 아바마마.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그는 직접 겪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론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겠습니다.”
황제는 그제야 얼굴에서 힘을 풀고 눈을 감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새아가는 황궁에 조금 적응했느냐?"
"강아지를 선물했습니다.”
"강아지? 아아, 그 강아지들 말인가. 새아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겠구나.”
황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새아가를 잘 챙겨 주거라. 그렇다고 사람이 너무 바뀌어도 좋지 않아. 이만 나가 봐도 좋다.”
"어쩐 일로 아바마마께서 제 걱정을 다 하십니까?"
레온하르트는 황당하단 투로 되물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온하르트를 달랑달랑 들어 올려 직접 문 밖으로 내려놓았다.
“걱정을 해 줘도 하여간... 네놈 동생 만드느라 당분간 바쁠 테니 침실에는 찾아오지 말거라.”
그리고 다시 서재의 문이 닫혔다. 레온하르트는 황당함에 입만 벙긋거렸다.
'어차피 동생 같은 건 태어나지도 않는데....’
서재에서 돌아오는 길에 레온하르트는 익숙한 금발을 발견했다.
"베른 경!”
“황태자 전하?"
황궁 순찰을 빌미로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던 황실 기사단장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은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황태자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마침 잘됐군. 경에게 소개할 영애가 있네.”
"예?"
레온하르트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자신을 칭찬하며 막무가내로 알베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베르트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얼굴로 황태자에게 끌려갔다.
아니, 끌려가는 척 제 발로 멀쩡히 척척 걸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내 처소.”
"소개할 영애라니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설마 엘리시움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그 엘리자베스 말고 누가 있겠어?"
“저 말고 다른 기사들도 많은데 왜 굳이 저를 지목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의 업무에, 어린 황태자의 검술 스승 역할에 이어 이제는 어린 영애의 호위까지 하라고?
그의 본능이 어떻게 해서든 그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경은 황궁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졌지. 그렇지 않나?"
“...선뜻 긍정하기엔 부끄럽고, 그렇다고 부정하자니 기사로서 거짓을 말하는 일이 되니 이것 참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 가르쳐 주셨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키는 법이라고. 그러나 경도 눈이 있다면 알겠지만 나는 약해. 리지를 지켜 줄 수 없어.”
“그렇... 겠지요? 전하께서 신화 속 영웅이 아닌 이상....”
“하지만 나에겐 경을 리지의 호위 기사로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그 말을 들은 알베르트는 혀를 깨물었다.
하여튼 이래서 높으신 분들이란...! 듣자 하니 엘리시움 영애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라던데, 여덟 살 여자아이가 어떤 편이더라...?
기억을 더듬어 일찍 결혼한 친구 놈들의 딸과 마을의 꼬맹이들을 떠올려 보던 알베르트는 더더욱 강하게 혀를 깨물었다.
툭하면 빽빽 울고, 싫다고 드러눕고, 거기에 귀족가의 영애라면 분명 오냐오냐 자랐을 테니 버릇없이 행동하겠지.
차라리 여기서 혀를 깨물고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왜 그리 죽을상을 하고 있어?"
“그, 영애께서 저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어쩌지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니 안심하게.”
안심이라뇨! 알베르트는 속으로 우는 소리를 내며 레온하르트를 따라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이 머물고 있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엘리시움. 저는 황실의 기사단장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이라고 합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알베르트는 눈을 꽉 감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제발 그녀가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내던지며 축객령을 내려 주길 간절히 빌었다.
“멍!"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영애의 호위를... 멍?”
알베르트는 전혀 귀족가의 영애답지 않은 대답에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베일리! 안 돼!”
에스페도르 제국의 황실 기사단장이자 황궁의 경비를 책임지는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를 피해 제국의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품에 안고 옆으로 크게 굴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날렵한 동작으로 검을 꺼내며 자신을 습격한 맹수의 정체를 파악하려던 알베르트는 눈앞의 흉포한 맹수가 하얀 털과 안광이 번쩍이는 검은 눈, 그리고....
“끼잉....”
하는 어린 짐승의 소리를 내며 조그마한 분홍빛 혀로 그때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레온의 볼을 핥는 장면을 보고 무릎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아니 미안해 레온 베일리! 그럼 못 써!”
"베일리? 예쁜 이름이네. 잘 어울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알베르트는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다는 태도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우선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시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자신을 향해 달려든 건 맹수가 아닌 하얀 강아지였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알베르트는 우선 강아지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문부터 닫았다.
그리고 용맹하게 감히 제국의 후계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강아지를 멈추게 한 것은... 추측하건대 문제의 엘리시움 영애겠지?
“소개하지. 이쪽은 알베르트 디트리히 베른, 황실의 기사단장이자 오늘부로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영애를 호위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부여받은....”
"호위요?"
끙차, 베른 경의 바짓단을 물어뜯기 위해 마구 버둥거리는 베일리를 안아들며 엘리자베스가 되물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너를 지켜 주고 싶지만... 늘 곁에 있어 줄 수도 없고, 베일리? 베일리는 아직 어리니까. 너를 도와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건 아닌데... 어... 그러니까... 으흠, 흠!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베른 경.”
엘리자베스는 베일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한 손으로 베일리를 안고 다른 손으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알베르트라고 불러 주셔도 괜찮습니다, 레이디 엘리시움.”
알베르트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간절히 바랐던 소원을 다급히 취소했다.
품에는 강아지를 안고, 겁먹은 토끼처럼 푸른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는 장담하건대 손을 잡기 위해 그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로 작고, 동작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 걱정했던 버릇없고 오만하고 저만 알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일단 드러눕고 보는 아이들과 엘리자베스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알베르트.....?"
“예, 레이디 엘리시움.”
"레이디... 레이디라뇨! 그냥 엘리자베스라고 불러 주세요! 다른 사람들처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와 알베르트를 번갈아 바라보다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사도를 수호하는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그리고 한 레이디를 모시게 된 기사로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알베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앞에 기사 서임을 받았을 때처럼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손은 너무 작아서 그가 선뜻 쥐었다간 그대로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알베르트는 어린 레이디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알베르트, 저의 검을 걸고 맹세하건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이디를 지키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알베르트가 제 손을 쥘 때부터 숨을 쉬는 것을 거의 잊고 있었다.
순금에서 그대로 뽑아낸 듯 화려한 금발과 파란 눈동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한껏 위로 들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훤칠한 키를 가진 기사님은 하얀 제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아래로 처진 눈매는 순박하다는 첫인상을 주었으나 눈매와 반대로 끝이 위로 솟은 눈썹은 그가 기사 중의 기사라는 말을 증명하듯 곧고 뚜렷했다.
레온하르트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하더니 그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더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손등에 입을 맞추자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레온, 도와줘!'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레온?'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불만에 가득 찬 부루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알베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