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만나면 반갑다고 멍 멍 멍(3)
디자인화에는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개울처럼 물결치며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살짝 아래로 처진 눈매, 젖살이 남아 통통한 뺨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뛰어나와 성당의 가장 작은 종처럼 높고 맑은 소리로 까르륵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아이가 입고 있는 건 코르셋도, 굽 높은 구두도 아닌 무척이나 편해 보이는 원피스였다.
작고 오밀조밀한 레이스가 꽃이 수놓인 둥그런 깃의 테두리를 따라 조로록 달려 있고, 깃 가운데엔 푸른 리본이 달려 있었다.
주름 잡힌 소매는 아래로 갈수록 넉넉하고 헐렁해지는 비숍 슬리브에, 커프스에 달린 단추는 장미 모양이었다.
재단사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디자인화를 가져와 직접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네....”
“여기 이 부분은 핀턱을 두 줄 넣고, 그 아래에 영애께서 좋아하시는 꽃을 리본으로 수놓을까 하는데...혹시 다른 디자인이 좋으신가요?"
엘리자베스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에서 입던 옷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 보석이나 레이스가 너무 적지 않나요...?"
"어머, 영애께선 화려한 드레스가 취향이신가요?"
재단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재단사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또한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는 황태자궁의 시녀들이 이른 아침부터 최고급 부티크에서 구해 온 드레스였다.
코르셋도 필요 없고, 스커트를 종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파니에도 입지 않고. 무거운 보석 장식이 잔뜩 달리거나 피부에 닿을 때면 까슬까슬하고 따끔거리던 레이스도 없는 드레스는 무척이나 움직이기 편하고 가벼웠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영영 이 옷만 입고 싶을 정도로 엘리자베스는 이 옷이 마음에 쏙 든 참이었다.
다시는 허리를 졸라매는 코르셋도, 굽 높은 신발도 신고 싶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이런 디자인도 있긴 합니다만....”
재단사는 빠른 솜씨로 엘리자베스가 공작저에서 입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그려 보였다.
“그건 싫어요...!”
엘리자베스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반응에 재단사는 의아해하며 다시 가져온 디자인화를 내밀었다. 화려한 것은 싫다 하시면서 보석과 레이스를 찾으시다니?
설마 이 어린 영애께서도 '심플하면서도 보석과 레이스는 아낌없이 사용하고, 가슴골이 드러날 만큼 목을 파 주시되 천박하게 보이지 않고, 허리는 더 가늘게 보이지만 입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알아서 해 주세요' 같은 주문을 하시려는 건가?
재단사는 단단히 각오하며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 황궁에서 이런 옷을 입어도 되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재단사는 오히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특히 영애처럼 아직 어린 분께 이런 디자인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답니다.”
"정말요?"
엘리자베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입까지 살짝 벌리며 깜짝 놀란 그녀를 보며 재단사는 뭔가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영애께선 평소에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 슈미즈 위에 코르셋을 입구요, 파니에랑, 또....”
맙소사. 재단사는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코르셋과 파니에, 두 단어만으로도 그녀는 평소 엘리자베스가 어떤 옷을 입고 지냈을지 유추할 수 있었다.
“혹시 드레스에 늘 보석이 달려 있었나요?"
“헉!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은사로 수놓인 레이스가 여기까지 오는 소매에 달려 늘 까슬까슬, 불편하셨지요?"
재봉사는 팔꿈치 조금 위를 짚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정말 마법사를 보는 듯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재단사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눈앞의 작은 영애는 보석과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그런 옷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은사로 짠 레이스며 화려한 보석 장식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 은사보다 반짝이는 것이 여기 있는걸요.”
“여기에요?”
재단사는 웃으며 작은 손거울을 엘리자베스의 앞에 들어 보였다.
“사파이어, 청금석, 아니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푸른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영애의 눈만큼 푸르진 않을 겁니다."
재단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배시시 웃으며 몸을 꼬는 엘리자베스를 흐뭇하게 보며 재단사는 이어서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톡 건드려보았다.
“누에고치에서 갓 자아낸 비단실은 장인들의 손길을 조금 더 거쳐야 흔히 생각하는 매끄럽고 반짝이는 하얀 비단 실이 된답니다. 영애의 머리카락은 가장 고급 비단실보다 훨씬 가늘고, 부드럽고, 반짝반짝하지요. 꼭 수정에서 뽑아낸 실 같아요.”
재단사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눈으로 직접 본 순간 머릿 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른 아침부터 황궁에서 나온 시녀는 '은발과 벽안을 가진 여덟 살 여자아이. 푸른색을 좋아함.'이라는 설명 외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요즘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디자인화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디자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정말로 이 옷 그대로 입어도 돼요? 황궁에서도?"
"물론이지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재단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레이스는 여기, 치맛단에만 달릴 거예요. 영애의 피부에 스쳐도 불편하지 않은 부드러운 면 레이스랍니다.”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으로 디자인화의 원피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재단사는 그녀의 볼이 두근거림과 기대로 상기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 장식은 어떤 게 좋을까요? 보닛, 헤드드레스, 리본도 좋고 작은 미니햇도 좋겠지요!”
모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손님을 만난 재단사 또한 얼굴 가득 흥분한 기색이 가득했다.
너무 들뜬 나머지 실수하지 않도록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재단사는 머릿 속으로 푸른 생화로 장식한 보닛, 장미 모양 레이스가 조르륵 이어지는 헤드드레스, 귀가 쫑긋 선 나비 모양 리본과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작은 모자를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하나씩 씌워 보기 시작했다.
"음... 으음....”
무엇을 골라도 어울릴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재단사는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잘 모르겠어요.”
엘리자베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작은 얼굴 가득 꼭 재단사가 '왜 그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겁니까!'라고 화를 내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걱정과 달리 재단사는 오히려 더 큰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종이와 펜을 들어 빠른 손놀림으로 몇 가지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전부 가지시면 되지요! 영애께선 그래도 되는 분이랍니다. 보닛, 헤드드레스, 리본, 미니햇... 햇살에 고운 피부가 그을리지 않도록 리본을 단 밀짚모자도 좋겠네요! 여름까지 매일 다른 꽃으로 장식할 수 있을 거고, 가을에는 잘 익은 붉은 열매가 잔뜩 달린 나뭇가지나 낙엽 모양 브로치를 달 수도 있겠지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다시 흥분이 깃들기 시작했다. 재단사는 뿌듯한 얼굴로 디자인화 옆에 짧은 메모를 남기더니 다른 질문을 했다.
"신발은 어떤 게 좋을까요?"
"신발도 골라야 하나요?"
재단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평생을 어머니가 골라 주신 답답하고 무거운 드레스만 입어야 했던 그녀에겐 마치 요정의 노래처럼 들릴 정도로 황홀했다.
그러나 신발에 이어 온갖 액세서리며 심지어는 양말까지 골라야 한다는 재단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가 옷을 고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지친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재단사는 남은 건 천천히 정해도 되는 일이라며 근처 협력 업체인 구두 공방의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카탈로그 속에는 어린아이가 신을 법한 굽 낮은 구두와 부츠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처음 보는 구두들을 무척이나 신기한 듯 아예 카탈로그에 코를 박을 기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구두도 있었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왜 굽 높은 구두만 신게 하신 걸까?'
“힘들지요?"
"네?"
어느새 디자인화와 엘리자베스의 치수를 잰 종이를 챙긴 재단사가 전부 이해한다는 얼굴로 다시 엘리자베스와 눈을 맞췄다.
“저는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제가 만든 옷을 입고 더더욱 아름다워지는 것도 좋아하지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게 뭔지 아시나요?"
"그게 뭔가요?"
재단사는 어쩐지 쑥스럽다는 투로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이랍니다. 저는 영애께서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웃어 주셨으면 해요.”
재단사는 초승달처럼 눈을 휘어 웃으며 다시 일어섰다.
작업실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미리 만들어 놓았던 옷을 보내는 것은 물론, 지금부터 새로 만들고 디자인해야 할 옷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솟고 있었다.
“처음으로 바늘을 손에 쥔 날 이후 이렇게 두근거리던 적은 무척 오랜만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작은 뮤즈 아가씨.”
재단사는 예법에 맞게 인사하며 방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다.
"으악!”
“망!”
“꺄악!”
"레온... 하르트 황태자 전하?"
문을 열자 방 안으로 쏟아지듯 데굴데굴 굴러 들어온 건 품 안에 하얗고 몽실몽실한 강아지를 끌어안은 레온하르트였다.
“전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흐뭇한 얼굴로 재단사와 엘리자베스의 대화를 지켜보던 시녀들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동시에 재단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멀쩡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까지 탈탈 털어 냈다.
"다 끝났... 네 주인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좀 의젓하게 굴어!"
“멍!"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긴 강아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란 말이야! 소매 물어뜯지 말고, 아 정말!"
강아지의 침으로 범벅이 된 소매를 흔들며 레온하르트는 방 안에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재단사는 마지막까지 엘리자베스와 강아지, 레온하르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옮겼다.
* * *
"리지.”
“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황태자 전하라는 딱딱한 호칭보단 레온이라 부르는 쪽이 더 좋았다.
실수인 척 시녀들의 앞에서 레온이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입을 삐죽이다가, 가슴을 내밀고 영혼이 기억하는 대로 위엄 있고 근엄한 자세로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영애와 할 말이 있으니 자네들은 이만 나가 보도록.”
시녀들은 마치 황제 폐하인 양 잔뜩 근엄한 척, 의젓한 척, 위엄 있는 척 점잔을 빼는 10살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후다닥 방을 나섰다.
“저... 리지.”
“응. 레온.”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레온이라 불러도 되는데.”
“그렇지만 레온이 둘만 있을 때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무슨 애가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 명령을 철회했다.
“그 말 취소! 취소야. 어차피 아직 약혼식도 안 올렸으니까, 리지는 내 친구야. 친구가 친구를 보고 '전하, 오늘도 기침후일회망각하셨습니까.' 따위를 말하는 것도 우습잖아?"
“기체후, 일향, 만강... 인데....”
"이거나 그거나! 어쨌든... 나는 리지가 나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해 주면 좋겠어. 응? 그럼 안 될까?"
내가 너에게 혹시라도 못되게 군다면 스스럼없이 쥐어박고 발로 찰 수 있을 만큼 편하게 여겨 줘!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예법에선....”
그놈의 예법!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이마를 치며 한숨을 푹 쉬다 어느새 엘리자베스의 드레스 자락에 관심을 보이는 강아지를 안아다 엘리자베스에게 넘겨 주었다.
"내가 없을 때 너를 지켜 줄 거야. 그러니 이름도 네가 지어 줘."
“이름?"
“응. 뭐든 좋으니까. 뭐, 털이 하야니 흰돌이라고 하거나 황궁에서 태어난 강아지니 그에 어울리는 우아한 이름으로 세바스찬 베네딕트 에드워디안 그레고리 프란츠 3세라고 짓거나....”
"으음....”
엘리자베스는 고민에 빠졌다. 하얗고 보드라운 털, 따끈따끈한 체온,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볼록한 배와 살짝 졸린 듯 아래로 처진 눈매, 붕붕붕 허공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꼬리와 유리 위에 올려놓으면 챱! 하는 소리가 날 것처럼 말랑말랑한 발바닥까지.
겨우 털이 하얀색이니 흰돌이라고 짓기엔 다른 사랑스러운 점이 너무 많았다. 레온하르트는 허리에 손을 얹고 흐뭇하게 웃었다.
“마저 할 일이 있어 다시 가 볼게. 나중에 이름 들려줘야 한다?"
레온하르트가 방을 나서자마자 다시 시녀들이 돌아왔다. 품에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꼭 끌어안은 엘리자베스가 질문했다.
"강아지 이름으로 레온은 역시 이상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