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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7화 (17/130)

17화 만나면 반갑다고 멍 멍 멍(2)

"강아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철이면 종종 아버지가 커다란 개와 함께 총을 들고 사냥터로 향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처음 본 개가 어떻게 생겼더라? 엘리자베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쫑긋 솟은 귀, 새까만 눈동자, 드러난 붉은 잇몸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두 발로 서면 아버지의 가슴까지 닿는 커다란 덩치는 집에서 키우는 경비견이나 반려견보단 차라리 맹수에 가까웠다.

“잘... 모르겠어.”

지금도 생각만 하면 오금이 저려 올 정도로 무서운 동물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엘리자베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하려 해도 그 커다란 맹수의 어린 시절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

레온하르트의 어깨가 조금 아래로 축 처졌다.

“얼마 전에 강아지들이 태어났어.”

"강아지가?"

"북부 국경 너머에 사는 유목민들이 키우는 개인데, 화... 화... 화 어쩌고 하는 말이었는데... 화해의 의미로? 이게 아닌데, 하여튼!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며 가장 잘생기고 예쁜 개를 한 쌍 보내 줬거든.”

잘생기고 예쁜 개?

엘리자베스는 그림책 속 공주님과 왕자님의 얼굴을 한 아버지의 사냥개를 떠올리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 아이들이 이번에 강아지들을 낳았어. 털은 구름처럼 하얗고, 눈은 새까맣고... 엄청 귀엽다?"

"그런 개도 있어?"

공작저에서 본 개는 사냥개 아니면 집을 지키기 위한 경비견이 전부였던 엘리자베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레온하르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겪어 봐서 장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강아지는 분명 엘리자베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줄 터였다.

"보러 갈래?"

"응!"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엘리자베스의 머리에서 미끄러지려는 화관을 다시 고쳐 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강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끼잉....”

"아르르르....”

"망!”

귀한 몸에서 태어난 귀한 새 생명인 만큼 어린 강아지들은 황궁의 정원 한 편에 위치한 아담한 오두막 전체를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잘 마른 짚단과 부드러운 담요를 아낌없이 깔아 놓은 아늑한 오두막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처치할 수 있도록 수의사와 시녀 두엇이 늘 상주하는 강아지들의 작은 천국이었다.

"와아....”

레온하르트는 제법 뿌듯한 마음으로 엘리자베스를 지켜봤다.

조금 전만 해도 꼭 오두막 속에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양 오들오들 떨며 제 뒤를 따라온 엘리자베스는 낑낑, 아르릉, 망!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한달음에 인간의 거주 구역과 강아지들의 공간을 분리하는 흰 울타리로 달려가 연신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저 개가 엄마예요?"

예정에 없는 황태자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온 황태자궁 소속 시녀들의 방문에 당황한 수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울타리 너머 옆으로 드러누워 강아지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견은 특히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낯선 사람들의 등장에 놀라 예민하게 반응할지도 몰랐다.

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멋대로 강아지를 장난감처럼 다루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기에 수의사는 전전긍긍하며 엘리자베스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나 수의사의 걱정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작은 두 손으로 울타리만 꼬옥 붙잡고 입은 살짝 벌린 채 홀린 듯이 얌전히 강아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동물이 다 있었다니!'

정말 아버지의 사냥개와 같은 '개'일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품을 찾아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낑낑거리는 칭얼거림이 제법 눈에 띄게 의젓해졌다고 해도 아직 어리기만 한 강아지들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어미의 품에 붙으려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훅 불면 그대로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갈 것만 같은 하얀 털과 아래로 축 처져 순하게 보이는 검은 눈, 한껏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할 때면 드러나는 앙증 맞은 이빨과 아직까지 분홍빛이 남아있는 발바닥까지.

어느새 레온하르트 또한 엘리자베스의 옆에서 강아지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너를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레온하르트는 강아지들을 구분하기 위해 목에 매어 놓은 리본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때면 레온하르트는 커다랗고 하얀 반려견을 끌어안으며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 그 크고 따스한 덩치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나와 노는 일 에나 집중하라는 듯 컹! 하고 짖으며 어디서 나무 막대를 물어 오고, 그럼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문제들을 잊을 수 있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에게 속삭였다.

"나, 여기가 아파요.”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심장 부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 또한 쿵 하며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왜 가슴이 아파? 어떻게 아픈 거야? 혹시 뭐 잘못 먹은 거 있어?"

"그냥... 그냥 여기가 아파요. 간질간질해요. 쿡쿡 쑤시는 것 같고... 어... 또...."

“귀엽지요?"

보다 못한 수의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귀여운 게 뭐예요?"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질문했다.

그녀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할 줄 알았던 수의사는 당황해하며 '귀엽다'의 사전적인 의미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귀엽다는 건...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걸 의미합니다.”

"애교는 뭐예요?"

"애교는... 음... 그러니까...."

수의사는 어떻게 하면 아이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지, 귀엽다는 건 말이야. 그냥 눈에 들어온 순간 사랑스럽고, 기분이 좋아지고, 지켜 주고 싶고, 또 품에 안고 싶어지는 그런 거야.”

레온하르트는 제법 의젓한 태도로 어린 약혼녀에게 제 나름대로 귀여움에 대한 정의를 설명했다.

사실 그건 그가 엘리자베스를 볼 때 매번 느끼는 감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대답을 듣고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더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는 귀여운 분이세요.”

“내가?"

수의사와 시녀들은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옆구리를 꼬집어 주기 시작했다.

깜찍한 영애의 말에 황태자께서 당황하는 모습 또한 무척 귀여웠다.

“전하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걸요.”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가 볼록해질 만큼 충분히 식사를 마친 강아지들은 낯선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한달음에 달려와 두 발로 서기를 시도하거나 제자리에서 깡충대기 시작했다.

“우와, 와, 우와....”

"마음에 들어?”

엘리자베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볼이 아플 만큼 높이 치솟았다.

“한 마리 키울까?"

"네?"

엘리자베스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울타리에서 손이 미끄러지며 한쪽 팔이 울타리 너머로 넘어가 버렸다.

수의사와 레온하르트가 당황하며 그녀를 일으키는 것보다 하얀 맹수들이 그녀를 덮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꺄악! 아, 아핫? 간질, 간지러워요!! 꺄아! 어떡해, 얘... 얘들아, 얌전히 있어야... 흐앗...!”

맹수들은 짧은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낯선 이의 팔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촉촉하고 검은 코를 가져다 대어 킁킁 냄새를 맡거나, 손에 맛있는 걸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혀로 핥으며 확인하거나, 말랑말랑한 발바닥으로 슬쩍 밀어 보기도 했다.

“리지! 괜찮아? 물리진 않았고?"

“.....한 마리 키워도 될까요?"

수의사는 엘리자베스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었다.

시녀들이 젖은 물수건으로 강아지들의 흔적이 남은 팔을 닦아 주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레온하르트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마리는 황태자 전하께 갈 예정이었답니다. 전하, 어떻게 하시겠어요?"

“리지가 원한다면 강아지가 아니라 사자를 키워도 좋아.”

레온하르트의 말에 시녀는 짧게 웃으며 울타리 너머로 건너갔다.

그리고 긴 감색 치마를 물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기고 매달리는 강아지들을 한 마리씩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에게 보였다.

“사자보다 더 멋지게 자랄 수 있도록 잘 돌봐 주셔야 해요."

"리지, 네가 직접 골라 봐. 누가 가장 예쁜 것 같아?"

빨간 리본, 노란 리본, 파란 리본, 초록 리본과 보라색 리본, 그리고 하얀 리본을 맨 강아지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과 조금만 더 자라면 금방 어미견 못지않은 커다란 덩치가 될 것을 예언하듯 두툼한 발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더없이 신중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전부 다 예뻐 보이는데. 누굴 골라야 하지?'

엘리자베스가 고민하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수의사와 시녀들의 허락을 받고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 파란 리본을 맨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모처럼 다시 만난 친구와 재회 아닌 재회의 기쁨을 누리던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는 이내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저 파란 리본을 한 강아지요.”

"정말?"

레온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새 경계심을 푼 강아지가 그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이 아이, 정말 예쁘지?"

끙차. 레온하르트는 일부러 힘겨운 소리를 내며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친 강아지가 끼잉, 하며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안아 볼래?”

“그래도 돼요?"

레온하르트는 수의사를 빤히 쳐다봤다. 엘리자베스 또한 반짝반짝 기대로 빛나는 시선으로 수의사를 보고 있었다.

수의사는 껄껄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강아지를 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파란 리본을 맨 강아지가 엘리자베스의 품으로 넘어왔다.

"와아...”

'내 방 카펫보다 털이 부드러워. 세상에! 눈 속에 내가 비쳐 보이네? 분홍색 혓바닥이 너무 예뻐!'

“이 아이로 할래요!"

강아지의 등에 얼굴을 비볐던 엘리자베스의 볼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방에 강아지는 물론 강아지가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 놓겠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오두막을 나섰다.

“....리지?"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문 바로 앞에 우뚝 멈춰 서더니 뭐라 말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왜 그래?"

"그게... 으응,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괜찮아.”

레온하르트가 다시 엘리자베스를 달랬다. 그제야 그녀는 한참 벙긋거리기만 하던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보다 가면 안 될까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원한다면 아예 여기에 소파를 가져다 놓을까?

레온하르트는 제 몸보다 커다란 수의사의 의자를 울타리 앞으로 질질 끌어왔다.

“얼마든지!”

수의사와 시녀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태자가 어린 약혼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솜을 채워 만든 인형 하나를 서로 가지겠다고 으르렁대며 물고 놓아 주지 않는 강아지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은방울꽃처럼 맑은 소리로 웃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만 보던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가 여기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강아지들이 행복하게 노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황태자로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해야 할까....”

“치하?"

어른용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허공에 동동 차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은 어려운 말도 되게 잘하네! 엄청 똑똑하다.'

"황태자 전하는 꼭 마법사 같아요.”

"응?"

마법사? 시계탑의 마법사들? 그 미치광이들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무슨 의미로 자신을 마법사라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같이 있으면 늘 여기가 간질거려요. 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도 많이 보여 주고, 처음 하는 일도 가르쳐 주고, 어려운 말도 많이 알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종알거렸다. 적어도 미쳤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 레온하르트는 뿌듯하게 턱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야 너보다 이 년이나 더 살았으니 그렇지!"

"그럼 저도 이 년 뒤엔 전하처럼 마법사가 될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질문했다.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정작 마법을 부린 건 엘리자베스였고, 이미 그는 한참 전부터 그녀의 마법에 걸려 있었다.

* * *

"아! 여기 계셨구나. 엘리자베스 아가씨, 드레스를 맞추러 가실 시간입니다.”

“드레스?"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황후가 거주하는 궁의 제복을 입은 시녀가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웬 드레스냐는 투로 반문했다.

“...남자는 몰라도 되는 여자들만의 이야기예요!"

어째서인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조금 더 상기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 시녀에게 호다닥 달려간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와 푸른 리본을 맨 강아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중에 봐.”

여전히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예법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시녀와 함께 오두막을 떠났다.

홀로 남은 레온하르트는 푸른 리본을 맨 강아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직전까지 눈앞에서 나풀거리며 종알종알, 온통 새싹 돋아나는 톤으로 말하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선명했다.

엘리자베스가 도착한 곳은 황후의 처소가 아닌 레온하르트의 침실 건너편에 마련된 임시 거처였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방은 전날과는 전혀 다른 방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재봉사가 가져온 디자인 스케치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의문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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