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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6화 (16/130)

16화 만나면 반갑다고 멍 멍 멍(1)

유모는 여느 때와 같이 아직 하늘 끄트머리가 푸른 시간에 레온하르트를 깨웠다.

“전하. 검술 수련을 하시려면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암... 벌써? 으음....”

“피곤하시면 오늘은 쉬시는 건 어떠실까요? 요즘 전하를 보자면 대견하신 만큼 걱정이 된답니다.”

“그런가....”

지금도 앉은 채로 다시 졸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모는 고개를 내저으며 레온하르트를 다시 눕혀 주었다.

“아냐... 가야... 가야 해... 가야 하는데.”

“쉿, 영애께서 깨시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눈을 깬다고?

옆을 바라보자 온기를 찾아 조금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달라붙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입만 벙긋거리며 유모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유모는 레온하르트의 간절한 시선을 호호 웃으며 가볍게 흘려 넘겼다.

결국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잠에서 깰 때까지 얌전히 누워 다시 잠들어야 했다.

“황태자 전하, 전하. 이만 일어나셔야죠.”

“으음... 조금만 더....”

“영애께선 이미 일어나셨습니다. 두 분께서 함께 아침을 드시는 건 어떨까요?"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은 잠에 취한 모습으로 유모의 손에 붙잡혀 욕실로 끌려갔다.

“...황태자 전하께선 아침잠이 많으신 편인가요?"

"영애께서 너무 일찍 일어나셨어요. 세상에, 아무도 깨우지 않았는데 스스로 일어나시다니요! 영애를 극진하게 보살피시라는 황후마마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제 본분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앞으로 영애께선 되도록 늦게 일어나 주세요.”

“네에...?"

엘리자베스는 얼굴 가득 의아함을 담고 되물었다.

눈앞의 포근한 인상의 여인은 황태자를 담당하는 유모라고 했다.

어제저녁 너무 당황한 나머지 레온하르트의 침대에서 잠든 것도 잊어버린 엘리자베스는 눈을 뜨고 그녀가 레온하르트를 깨우기 위해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다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유모는 그녀를 혼내거나 침대 밖으로 쫓아내는 대신 아직 일어나시려면 한참은 남았다며 작은 몸을 다시 눕히고 포근한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 주었다.

황실 식구들은 모두 아침 일찍부터 하루가 시작되니 그에 맞춰서 생활하라던 공작 부인의 교육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잠옷 차림이지만 제법 정신을 차린 엘리자베스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세수까지 마쳤지만 아직 눈에 졸음이 가득한 상태였다.

레온은 늘 완벽한 줄만 알았는데.

머리에 금빛 까치집이 생긴 모습이 어쩐지 낯설면서도 귀엽게 느껴져 엘리자베스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리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봉실에서 어제 가져다준 옷은 황후가 어린 시절 입던 옷을 급하게 적당히 줄여 만든 옷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잠옷 위에 따뜻한 양털로 만든 카디건을 걸치고 완벽한 예법으로 식사를 하는 사이 레온하르트 또한 유모의 도움을 받아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황태자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방 밖을 나서기 직전 레온하르트는 식사를 마친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리지, 혹시 하고 싶은 일 있어?"

“...딱히?"

“음... 그럼 먹고 싶은 거라거나?"

“지금은 배가 불러서 아무 생각도 없어요.”

"어... 그러면 혹시 가지고 싶은 거라거나...?"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레온하르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말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느냐 다시 물었다.

“...그러면... 꽃밭에 가도 될까요?"

“꽃밭?”

엘리자베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레온하르트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허락하려다, 문득 엘리자베스가 다시 높임말을 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될까요, 말고, '꽃밭에 가도 돼?'라고 해 주면 허락할게.”

“꽃밭에 가도 돼?"

“얼마든지! 내 처소의 정원은 조금 작은 편이지만... 어마마마의 정원과 온실도 구경시켜 줄게.”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정말로 꽃밭으로 가시겠어요?"

"응. 황태자 전하께 만들어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요.”

아무리 시녀들이라 해도 괜히 황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 말꼬리를 흐리며 엘리자베스는 괜히 빈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레온하르트의 처소에서 가장 가까운 정원으로 안내했다.

황실의 잔디밭은 엘리자베스의 엄지손가락만큼 자라 있었다.

정원사의 노련한 솜씨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잘 정돈한 보람도 없이 다시 멋대로 자라기 시작한 차였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엘리자베스는 제 발목 부근을 간질이는 잔디를 보며 종알거렸다.

“너도 어른이 되려면 한참 자라야겠구나?"

잔디는 엘리자베스가 발을 디디는 곳마다 몸을 눕혔다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꽃밭에는 공작저에선 본 적 없는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시녀들은 엘리자베스에게 뭘 해도 좋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꽃밭 사이에 앉아보았다.

후웁, 하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자 작은 머리가 순간 아찔할 만큼 짙은 봄 냄새가 엘리자베스의 몸을 가득 채웠다.

“파하....”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 꽃밭에 앉아 그렇게 숨만 내쉬었다.

처음 보는 꽃이 무척 많았다.

그중 지금 신고 있는 신발에 수놓인 꽃도 있을까 하며 꽃밭 여기저기를 찾던 엘리자베스는 햇볕에 잘 마른 흙과 바위 응달 아래의 흙에선 다른 냄새가 나는 걸 알아냈다.

그림자 속의 잔디는 햇볕 아래로 가져왔을 때도 여전히 그림자처럼 조금 더 짙은 색을 하고 있었다.

아직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낙엽은 손가락을 대자 바스러져 흙 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낙엽이 없어졌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에요. 영애께선 그걸 도와주신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울상이 되어 돌아보는 엘리자베스에게 시녀들은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꽃밭을 거닐 때마다 하얀 드레스는 초록빛 풀물이 조금씩 스미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시녀 중 하나가 꽃반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레온하르트가 만들어 준 꽃반지와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작은 손으로 열심히 그녀를 따라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영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오지 않자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레온에겐 가장 예쁜 걸 주고 싶은데....'

몇 번을 새로 만들어도 결과는 비슷했다.

시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애써 웃음을 감추고 인내심 있게 엘리자베스가 만족스러운 모양의 꽃반지를 만드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엘리자베스 님! 대단해요!"

“정말 예뻐요!"

"와, 황태자 전하는 좋으시겠다.”

엘리자베스는 시녀들의 칭찬에 어깨가 마구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레이디다운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와 시녀들뿐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하나씩 만들어 줄까... 요?"

엘리자베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깜빡였다.

시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의 드레스뿐만 아니라 손끝에도, 마음속에도 파랗고 향기로운 봄이 스미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일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 레온하르트가 직접 나설 일은 기껏해야 학문을 익히고 검술 수련을 하는 일이 다였다.

그런 만큼 순식간에 일 처리를 끝낸 레온하르트는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물었다.

“꽃밭?"

“네. 영애께선 시녀들과 꽃반지와 화관 만들기에 열중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흐음...."

레온하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지?"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나 말고, 리지...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말이야.”

“영애께서도 당분간 휴식을 취하셔야 하는 만큼 딱히 정해진 일정은 없습니다.”

"그래?"

레온하르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리지가 있는 곳으로."

* * *

멀리 검은 제복을 입은 시녀들 사이로 홀로 하얗게 반짝이는 그녀가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눈이 마주치는 시녀마다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쉿, 하며 함구령을 내렸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레온하르트는 발아래에 난 토끼풀을 엮어다 작은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과 달리 어린아이의 손은 좀처럼 야무지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제법 화관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리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꽃반지 만들기에 열중하던 엘리자베스는 반갑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위로 들었다.

레온하르트의 손에는 처음 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꽃송이가 한 아름 둥글게 엮여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어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화관을 얹었다.

둥글게 엮어 낸 향기로운 봄을 머리에 쓴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엘리자베스 님은 축복받은 분이세요.”

"응?"

시녀 중 한 사람이 손을 모으며 황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화관은 봄과 여름의 신부에게만 허락되는 머리 장식이랍니다. 저는 화관을 쓸 수 있다면 설령 황실의 왕관이라 해도 거절할 거예요.”

“신부... 에게만...?"

레온하르트는 괜히 옆만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한 박자 천천히 시녀의 말뜻을 이해한 엘리자베스는 머리에서 퐁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음엔 베일도 함께 가져올게.”

레온하르트의 말에 시녀들이 꺄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 가장 예쁜 꽃송이를 꺾어 시녀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꽃반지를 만들었다.

손가락 끝이 파랗게 물들 정도로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꽃반지를 두 손 위에 올려 레온하르트에게 내밀었다.

"바... 받아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놀란 얼굴로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손에 올려진 꽃반지만 한참을 번갈아 보았다.

“.....끼워 주겠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도르륵 눈을 굴리며 시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시녀들은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레온하르트의 손을 끌어다 그의 약지에 꽃반지를 끼워 주었다.

"고마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엘리자베스보다 더욱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음.... 크흠.... 아직까지 불편한 점은 없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풀물이 파랗게 물든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다시 철렁였다.

"무서운데...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겠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녀들의 이야기를 들었어. 다시는 못 만나는 거야?"

“...리지 네가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죽으면 네 동생을 후처로 맞이하라며 들이미는 이들을 너와 만나게 해도 괜찮을까?

레온하르트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만 퍽퍽 두드려댔다.

리지가 죽는 건 아직 이십 년도 더 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나?

레온하르트는 다시 기억을 되짚어 봤다.

리지가 독주를 마시고 침대에서 피를 토하는 순간 그는 공작 내외와 독대하고 있었다.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었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런 먼 미래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그녀를 혼란에 빠트리는 대신 그보다 더 급한 일, 예를 들면 리지의 머리에서 미끄러진 화관을 다시 얹어 주는 일에 집중했다.

엘리자베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레온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레온, 어디 아파요?"

“응. 너 때문에 무지무지 아파."

레온하르트는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나 때문에...? 왜...?"

엘리자베스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냐. 전혀 아프지 않아! 걱정 마, 리지. 울지 말고... 아, 화관에 리본을 매어 벽걸이 장식으로 만들어줄까?”

“정말... 정말 괜찮은 거지?"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다시 물어왔다.

레온하르트는 그 바람에 떨어진 화관을 다시 주워다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주며 속삭였다.

“리지,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하지만 나는... 내가 아프다고 해서 네가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강아지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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