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5화 (15/130)

15화 시집살이 황궁살이(5)

'영애의 다리에 지독한 상처가....'

그 말이면 충분했다.

레온하르트는 시녀가 잡고 있는 의사의 반대 팔을 붙잡고 함께 방 안으로 질질 끌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작은 분께 대체 무슨 짓을...!"

“정말로? 공작 부인께서 정말 그러셨단 거야? 맙소사... 부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예상대로 침대에 엎드린 엘리자베스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의 틈새를 억지로 파고든 레온하르트는 얇고 가느다란 다리에 가득한 흉터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서요!"

“하지만 리지가....”

시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억지로 그를 침대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레온하르트는 내키지 않는지 미련 가득한 얼굴로 시녀의 손에 이끌려 갔다. 시녀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른조차 혀를 내두르는 잔혹한 장면을 어린아이가 봐서 좋을 것 없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그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는 물론 고문으로 인해 온전한 육체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는 죄인을 직접 마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의사의 탄식이 이어지고 시녀들이 소곤거리는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베개를 꼭 끌어안으며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조금 전 시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는 코르셋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드레스였다.

어깨만 살짝 감싸는 봉곳하게 부푼 소매와 가슴선을 장식한 진주 장식 바로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긴 치맛자락은 하나, 둘, 셋... 무려 다섯 겹이었으나 손바닥이 바로 비칠 정도로 얇은 시폰으로 만들어져 무척 가볍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처럼 찰랑거릴 것이 분명했다.

처음 보는 스타일의 드레스에 입까지 살짝 벌린 채 감탄하던 엘리자베스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양 다리의 상처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모처럼 어린 영애의 몸치장을 해 드린다는 생각으로 잔뜩 들떠 있던 시녀들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황후 또한 직접 상처를 마주한 순간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고작 여덟 살, 이제 겨우 여덟 살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황후를 시녀들이 부축했다.

"당장 의사를 데려오거라. 어서! 상처에 가장 좋은 약도 잊지 말도록!"

의자에 주저앉으며 황후가 명령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침대에 엎드리게 하는 사이 가장 발이 빠른 시녀가 방을 빠져나갔다.

“...아가.”

“네. 황후마마.”

“내가 황후의 자리에, 그리고 황태후가 되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들은 다시는 너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야.”

"어... 어머니와 아버지 말씀이세요?"

황후는 몹시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어린 며늘아기는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어리신지라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 장담하건대 흉이 진다 해도 내년 봄 전에 전부 사라지리라 봅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엘리자베스는 다리 위로 차가운 크림 같은 것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늙은 의사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상처 위로 약을 발라 주었다.

차디찬 연고는 이내 의사의 손길 아래에서 부드럽고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얇은 실크 스타킹을 신어도 욱신거리고 아려 오던 다리가 마치 얼음처럼 꽁꽁 얼었다가 천천히 풀리는 감촉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혹여 상처가 덧날지 모르니 붕대까지 꼼꼼히 감은 뒤에야 의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레온하르트의 코에 부드러운 솜을 끼워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

“전하께서는 왜 아직 여기에 계시지요?"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레이디께서 옷을 갈아입으시는데, 설마 그 모습을 지켜보시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레온하르트는 다급히 의사의 뒤를 쫓아 방 밖으로 다시 달려나갔다.

* * *

엘리자베스의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린 피부가 짓무르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엘리자베스의 몸에 거미줄처럼 남은 선명한 코르셋 자국 앞에서 시녀들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황후 또한 더는 보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당장 공작의 작위를 박탈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황후마마.”

"응? 으응... 어머나! 예쁘기도 해라.”

하얀 시폰 스커트 아래에 레온하르트가 선물했던 신발까지 신고 푸른 리본을 솜씨 좋게 머리카락에 섞어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엘리자베스는 꼭 푸른 바다에서 태어난 파도의 요정 같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황후의 칭찬에 엘리자베스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풍성한 스커트 자락은 그녀의 다리에 칭칭 감긴 붕대를 조금이나마 가려 주었다.

“저... 황후마마.”

“왜 그러시나요?"

“가슴이 아픕니다. 분명 기쁜 일인데... 더 이상 회초리를 맞지 않아도 되고, 레온과 함께할 수 있고, 또... 무서운 어머니와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는 것도... 꿈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가 아프고 눈물이 나려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황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사람이 너무 기쁘거나 행복하면 때론 눈물이 나나오기도 한다는 말을 지금의 그녀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문 옆에 주저앉았던 레온하르트가 깜빡 잠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막히는 코르셋과 보기만 해도 답답한 예복 대신 엘리자베스는 물안개처럼 풍성하면서도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자신이 선물한 신발을 신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리지.”

"응, 레온.”

“정말... 정말로 예뻐. 꼭 물의 정령 같아. 아니, 여신 그 자체야.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쁘고... 맙소사. 이런 너를 나는... 나는 대체....”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본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예쁘다.

그 세 단어 외에 그녀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제국, 아니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이 될 터였다.

그런 사람을 나는 평생 무시하며 살았단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단단한 대리석 벽에 머리를 박으려다 말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심장 한구석이 간질간질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며 귀를 붉혔다.

황후는 물론 시녀들도 한목소리로 예쁘다고 칭찬해 줬지만 레온에게도 예쁘다는 말을 듣다니!

가슴속에 몰래 내려앉았던 씨앗이 첫 번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더니 간질거리며 솜털 같은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

“다른 드레스들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치수만 맞춘 거래요. 나는 이 옷이면 충분한데....”

"리지는 어떤 모습을 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또....”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을 때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퐁퐁 김이 올라올 정도로 달아올랐다.

“리지. 이런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레온?"

레온하르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아니야. 황궁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지? 오늘은 푹 쉬다가 일찍 자."

“ 네.”

레온하르트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 * *

똑똑똑.

엘리자베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드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자 부드러운 면 레이스가 듬뿍 달린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다리에는 새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서 있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그녀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고 한참 동안 달싹거리길 반복했다.

"리지! 무슨 일이야? 일단 들어와.”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맨발로 차가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눈치채고 영차 하며 엘리자베스를 끌어안아 제 방의 부드러운 카펫 위로 올려놓았다.

'으...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말고 조금 더 그럴듯하게 모셔주는데...!'

엘리자베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 그, 레온.”

"응?"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잠옷 자락만 붙잡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병아리 부리처럼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모습을 감탄하며 감상했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미래에 내 부인이 될 사람이라지만 너무 귀여워...!'

엘리자베스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감사하다고? 뭐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설마 그녀가 어디 아픈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이마를 맞대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레온! ...황 ...황태자 전하...!"

대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했다.

“리지. 둘만 있을 때는, 황태자가 아닌 그냥 네 약혼자인 레온이라고 편하게 대해 줘. 설령 네가 내 목을 조르며 욕설을 퍼붓더라도 내가 책임질게. 그 딱딱한 말투도 그만둬. 응?"

"하지만 전하...!”

"음... 따라 해 봅시다. '잘 자, 레온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참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잘 자, 레온.”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를 끌어안고 그녀의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췄다.

"잠이 들기 전 유모는 늘 나에게 이렇게 해 줬어. 오늘은 내가 리지에게 해줄게. 굿나잇 키스야.”

“굿나잇 키스....”

엘리자베스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다시 고개를 들고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리지, 리지?"

“자... 잘 자, 레온!"

그리고 리지는 눈앞에 보이는 침대로 호다닥 달려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뿌듯하고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녀가 누운 침대가 자신의 것임을 깨닫고 당혹감에 빠졌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자신의 침대 정도야 얼마든지, 아니 방 자체를 줄 수도 있었지만...

어린아이라면 다섯 명도 넘게 옹기종기 붙어 잘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침대 가운데엔 순식간에 잠든 엘리자베스가 얌전히 색색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한참 동안 고뇌한 끝에 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가려던 레온하르트는 막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만, 이거 설마 첫 동침이야?'

물론 지금의 그는 10살이고, 엘리자베스는 여덟 살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따윈 하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직 약혼식도 올리지 않은 사이에 한 침대를 써도 되는 건가? 예법에는 어떻게 적혀 있지? 아니다, 그냥 내가 바닥에서 자면 되는 일이군.'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레온하르트는 카펫 위로 둥글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조금 춥긴 해도 잠들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황후와 같은 침대를 몇 번이나 썼더라?'

머릿속에 다시 과거가 된 미래의 한 장면이 스쳤다.

초야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황후와 같은 침대를 쓰지 않았다.

'이... 이런 멍청한 놈! 얼간이! 머저리! 천하에 다시없을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엘리자베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레온하르트는 후회했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대리석 바닥은 정수리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차갑고, 단단하고, 작은 콩 소리와는 다르게 온몸이 지잉 하고 울릴 만큼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레온하르트는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비 벼 댔다.

그리고 다시 이불 끄트머리를 슬쩍 들어다 천천히 발부터 밀어 넣었다.

곰실곰실, 혹은 애벌레가 꼬물거리며 기어가듯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가 너무 넓다 불평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씩 그녀가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레온하르트는 입 안 살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엘리자베스의 손 옆에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

'...되게 작네.'

그녀의 손도, 자신의 손도, 고사리 같은 손이라느니, 단풍잎에도 가려질 것 같다느니 하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손으로 너를 지킬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심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눈앞의 엘리자베스는 손도 작고, 코도 작지만 오똑하고, 얼굴도 작은 데다 꼭 감고 있는 눈은 속눈썹 그림자가 짙고 촘촘하며 그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빛을 품고 있었다.

거울로 확인했던 제 모습 또한 곱상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작은 소공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계절이 몇 번 더 지나면 자신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사람으로 자랄 터였다.

'아바마마....’

선황께선 완벽이란 말이 어울리는 훌륭한 성군이었지만 동시에 황제였기에 한 여인의 반려로는 맞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후회는 돌이킬 수 없기에 후회인 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절대 자신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재차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숨죽여 관찰하던 레온하르트는 다시 몸을 굼실거려 침대 가장자리로 빠져나왔다.

'저 작은 입술에서 매일 웃음소리만 흘러나오면 좋을 텐데.’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나? 가물가물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크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녹초가 된 그를 이불이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말을 듣고 잠자리를 살피러 온 유모는 침대 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 몸집만 한 베개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누운 어린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는 조금이라도 더 따스한 온기를 찾듯 어느새 등을 꼭 붙이고 잠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