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시집살이 황궁살이(4)
눈앞에 낯선 어른들이 앉아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저 사람들은 누굴까,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따윌 생각하던 엘리자베스는 마침내 그들의 정체를 기억해 내고 의자에서 튀어오를 기세로 화들짝 놀랐다.
“황, 황제 폐하! 황후마마! 소... 소녀의 불... 불경? ...을 부디 화해와 같은 마음으로....”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머릿 속에서 어려운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고 혀가 딱딱하게 굳어 발음하기 어려웠다.
'왜 저 두 분이 여기 계시지? 여긴 어디야?
황제는 눈썹을 실룩이더니 황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엘리자베스, 아가.”
“헉...! 네, 네! 황후마마!”
엘리자베스의 잔뜩 기합이 들어간 대답에 황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혹독하게 배웠을까, 짠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황후가 터트린 웃음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곁에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에게도 들릴 정도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고 식은땀이 손바닥 가득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아가, 공작저 밖으로 나와 본 적 있니?"
“예...?"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눈만 깜빡였다.
황후는 점점 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고정시키며 똑똑, 마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졌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나무들이 대충 휘갈긴 글씨처럼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엘리자베스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종 자신의 방에서 창문 너머로 아버지가 마차를 타는 모습을 바라본 기억은 있었다.
때론 어머니와 함께 타기도 했고, 아주 드물게 어머니 홀로 마차를 타거나 마차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릴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탈 일은 그보다 더 드물었다.
그나마 외출을 할 일이 생기더라도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면 안 된다는 이유로 늘 새까만 커튼을 쳐야만 했다.
"보아하니 밖으로 나오는 일도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구나. 이를 어째....”
“금방, 금방 익숙해질게요! 매일매일 연습하겠습니다! 세 걸음 이상은 마 를 타면....”
혹시 멀미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엘리자베스에겐 다르게 들렸나 보다.
황후는 그런 게 아니라며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그럴 필요까진 없단다. 어디 불편하진 않고?"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차의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 보았다.
나무와 구름과 조금 이르게 꽃을 피운 들판이 눈에 담기가 무섭게 등 뒤로 사라졌다.
“우리 아가가 마차가 마음에 쏙 들었나 보구나. 원한다면 아가를 위해 마차를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짐의 뜻이 곧 황후의 뜻이지.”
“폐, 폐, 폐하...!"
정신없이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바깥 경치를 구경하던 엘리자베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리며 말을 더듬었다.
순간 바퀴가 큰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덜컹하며 마차가 흔들렸다.
“꺄!”
"리지!”
레온하르트가 기겁하며 그녀를 받아준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무사히 마차 바닥 대신 레온하르트와 폭신폭신하고 빨간 벨벳으로 된 마차의 쿠션 위에 드러누울 수 있었다.
“미, 미안해요, 레온! 힉...! 황제 폐하, 그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새아가.”
“새... 새아가....”
“저러다 숨넘어가겠네. 폐하, 좀 더 다정하게 웃어 보세요.”
황후의 말을 들은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웃어? 다정하게? 저 아바마마께서?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고분고분 황후의 말대로 입술 양 끝을 천천히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새아가. 혹시 황태자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언제든 말만 하거라. 원한다면 국경 밖으로 쫓아내 주마."
“아바마마?"
레온하르트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그를 불렀으나 황제는 잔뜩 긴장한 엘 자베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황후에게만 보여 주었던 미소를 얼굴에 그리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황궁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새아가는 엘리시움이 아닌 황실의 일원이다. 그것만 알고 있거라.”
"황궁...? 황궁으로 가는 건가요? 어머니는요? 아버지께서도 함께 가시나요?"
황후와 황제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두 사람은 다시 표정을 수습하고 언제 그랬냐는 양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아가. 잘 들으렴.”
"네... 황후마마.”
"아가는 이제부터 황궁에서 살게 될거야. 어차피 황태자비가 되면 살게 될 곳이니까, 그걸 조금 일찍 하는 것뿐이야. 아가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니?"
엘리자베스는 눈만 대굴대굴 굴렸다.
옆에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무어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 황궁 가면 다시는 회초리로 안 맞아도 돼. 지루한 공부도 안 해도 되고, 리지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고, 나랑 있을 수 있어.”
지루한 공부 부분에서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 나라의 후계자부터가 공부하기 싫으면 도망치는데, 황태자비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나? 리지. 같이 황궁으로 간다고 해 줘. 응?'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궁으로 가면 레온하르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말만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도리도리.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후는 다행이란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무심한 척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 또한 속으로 안도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있지, 레온....”
"응?"
“황궁까진 얼마나 더 가야 해?"
대답은 레온하르트가 아닌 황제가 했다.
“아직 한참은 가야 하니 한숨 더 자거라.”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그런 결례를! 이라고 생각하기에 마차 안은 봄 햇살로 따끈따끈하게 데워졌고, 붉은 벨벳을 댄 쿠션은 너무 푹신했다.
'그래도 잠들면 안 돼! 레이디답게 행동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감겨 오는 눈꺼풀을 억지 로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기절했다, 깨어났다, 다시 억눌린 울음을 터트리느라 지쳐버린 엘리자베스의 고단함에 밀려 꿈속으로 쫓겨나야 했다.
* * *
아침 일찍 엘리시움 공작저로 향하셨다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선 노을이 뉘엿해진 뒤에야 돌아오셨다.
황제의 결재를 기다리던 관료들은 적어도 야근은 하지 않겠다고 내심 안도하며 창문 너머로 마차에서 내리는 황제의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저건 누구지?"
"누구 말인가.”
"황후마마의 품에 안긴 저 하얀 것 말일세."
재무 대신의 말에 관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제각기 안경을 꺼내 쓰거나 눈을 가늘게 뜨며 창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분명 엘리시움 공작저로 가셨다 하셨으니... 아! 그럼 아마 그 딸이겠군."
"엘리시움? 아아, 황태자 전하의 태중 혼약자 영애신가.”
"가문의 위세라는 접시가 기울 즈음 황실이며 고위 귀족이며 딸을 시집보내 어떻게든 연줄을 이어가며수평을 맞추는 한심한 가문의 영애라....”
“우리 6대조 할머님이 엘리시움에서 시집오신 분인데, 그걸 빌미로 ‘우리가 남이냐' 따위로 어떻게든 친한 척하려는 모습이 얼마나 같잖던지. 크흠!"
"웃기지도 않지.”
관료들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그런 곳의 딸을 왜 황후마마께서 직접 안고 계시지? 어어, 본궁으로 돌아오신다. 다들 줄 서서...새치기하지 말게!”
세 사람을 뒤로하고 황제 홀로 본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대신들은 다급히 서류를 챙겨 조금이라도 집무실에서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새아가, 푹 쉬거라.”
“네, 네에... 황제 폐하.”
황제는 자상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엘리자베스는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그대로 밀치거나 머리채를 휘어잡는 대신 꼭 작고 여린 솜털 뭉치를 대하듯 은빛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황태자가 말을 안 듣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정말 국경 근처로 보내 버릴 터이니.”
엘리자베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랑. 저녁에 봅시다.”
"저녁 이후로는 저만 보실 거지요?"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황태자는....”
엘리자베스와 황후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찬바람만 풀풀 날리는 평소의 아바마마로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그에 반항하듯 팔짱을 끼고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새아가를 잘 보살펴 주거라.”
황제는 그 말만 남기고 본궁으로 향했다.
레온하르트는 뭐 저런 아버지가 다 있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황후가 내민 손을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아가?"
황후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손을 내밀 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할 뿐이었다.
“손을 잡아 주겠니?”
"그런...!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양 손에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걸어 보고 싶던 참이었단다.”
황후마마의 말에 더더욱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조심스럽게 황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황후마마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고 하얀데, 나는 이게 뭐야. 통통하고... 짧고....'
속상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왈칵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황태자의 처소에 두 아이들과 도착한 황후는 가장 먼저 시녀들에게 귓속말로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엘리자베스가 지낼 방부터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처소를 한 바퀴 둘러본 뒤에도 황후는 영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황궁에 널린 것이 방인데 왜 이렇게 그녀의 마음에 드는 방 하나가 없는지.
황후는 그나마 가구며 벽 장식에 곡선이 많이 사용되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방을 엘리자베스의 방으로 내어 주었다.
“아가, 오늘만 이 방에서 자고 내일은 다른 궁전을 찾아보자꾸나. 아니면 아예 새로 궁을 지어 줄까?"
'저택도 아니고 궁전을요...?'
엘리자베스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의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커 보이는 황궁의 모습에 이미 기가 눌려 있던 그녀는 황후의 말에 다시 기함했다.
“그리고... 시녀들이 방을 정리하는 사이 옷을 좀 갈아입는 편이 낫겠구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복도 아닌 실내용 원피스형 잠옷과 레온이 준 신발이라는, 황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레이디로선 결코 저질러선 안 될 결례를 범하고 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버린 엘리자베스를 달래듯 황후는 그녀의 보드라운 은빛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걱정 마렴. 황실의 재봉사들은 솜씨가 좋으니 금방 완성할 거야.”
"하지만 지금 저는 코르셋도 입지 않았고....”
황후는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품에 꼭 안아 주며 다정하고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잘 버텨주어 고맙고, 또 기특하기도 해. 코르셋은 더 이상 입지 않아도 된단다. 패션의 흐름은 늘 바뀌는 법이기도 하지만 우리 아가는 한참 더 자라야 해요.”
"황후마마...?"
엘리자베스는 황후의 품에 안겨 눈만 깜빡였다.
슬프지도 않은데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황후마마. 분부하신 드레스를 가져왔습니다.”
“이것 보렴, 솜씨 좋댔지?"
* * *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방 밖에서 같은 자리만 돌고 있었다.
세 걸음 앞으로 걸었다. 몸을 휙 돌려 다시 세 걸음 앞으로. 그리고 다시 휙.
'무슨 옷 하나 갈아입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어린아이로 돌아온 이후 참을성이 더더욱 없어진 느낌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레온하르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정도만 물어보기 위해 정중한 동작으로 문을 두드렸다.
"의사! 당장 의사를 불러오거라!"
그러나 그의 꼭 쥔 주먹이 문에 닿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고 시녀 한 명이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그 덕분에 정통으로 문에 코를 박은 레온하르트는 코 아래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쓱 훔쳐 냈다.
손등을 따라 길게 핏자국이 이어졌다.
그것보다 의사? 엘리자베스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왜 의사를 필요로 하지? 무슨 큰일이 난 건가?
레온하르트는 발만 동동 구르며 누구라도 좋으니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해 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멀리서 조금 전 달려간 시녀가 황궁 소속의 의사를 반쯤 허리에 끼고 다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리지, 엘리자베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전하! 코는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서둘러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시녀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네 탓이라고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빨리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나 말하라며 시녀를 채근했다.
"그게... 실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