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3화 (13/130)

13화 시집살이 황궁살이(3)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돌아간 뒤 응접실에 찾아온 것은 숨 막히는 적막이었다.

엘리시움 공작 내외가 더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고작 여덟 살 어린아이가,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이 너무 많아 역으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황후는 목을 가다듬었다.

'할 말 있으면 어디 해 봐. 말하는 순간 네놈 갈비뼈를 활짝 젖혀 그 잘난 천사의 날개처럼 퍼덕이게 해 줄 테니.’

황제는 공작과 공작 부인을 향해 조용히 자색 불꽃이 타오르는 눈빛을 내비쳤다.

“이해합니다, 부인. 괜찮아요.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말랬지.

반색하며 대답하려던 공작 부인은 자신을 쏘아보는 황제의 눈빛에 흠칫하며 얌전히 입을 다물고 이어질 황후의 말을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일이니 아이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황후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저 또한 경솔한 발언을 철회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야 해요. 그렇고 말구요. 하지만."

공작 부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이졸데의 흉터가 아물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걸까?

"당신들을 부모라고 할 자격이 있는 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엘리자베스는 역시 황궁으로 데려가겠습니다.”

황후의 말투는 지극히 침착하고 나긋나긋했으나 더없이 단호했다.

“약혼식도 조금 앞당기지요. 예법에서도 어린 영애와 영식들의 약혼식은 서로가 10살이 된 이후에 할 것을 장려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서로가 상대방의 반려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지 굳이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닙니다. 당장 이 약혼의 시작이 태중 혼약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요. 엘리시움 공작 부인, 부인은 엘리자베스가 레온하르트의 약혼녀로서 부족하다 생각하십니까? 폐하,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저... 저는....”

“...짐의 뜻이 곧 황후의 뜻이네."

황제는 공작 부인의 말을 가로채며 그녀의 뜻을 지지하노라 못을 박았다.

공작 부인은 입술만 꾹 깨물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먹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좋군요.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기 전에 두 아이는 신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서로의 미래를 주고받을 겁니다.”

'다행이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이졸데의 상처를 전부 치료할 수 있어! 약혼식이라... 분명 가문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 오겠지. 역시 이건 기회야.'

공작은 이 순간에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 순간, 공작의 얼굴은 흙빛에서 하얗게, 그리고 다시 푸른빛으로 질렸다.

“엘리자베스가 황궁에 들어온 시점을 기준으로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은 그 아이와 격식과 규모를 불문하고 그 어떠한 공적, 사적인 만남도 금지할 것을 명령합니다. 엘리자베스가 먼저 두 분을 찾지 않는 한, 두 분은 절대 엘리자베스에게 먼저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혹시라도 한 장소에 있게 된다면 가급적 그녀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해 주시길 바랍니다.”

“황후, 귀한 며늘아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에는 그에 어울리는 이들만 초대될 것을 무얼 그리 걱정하나.”

황제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명백 했다.

그들은 더 이상 황실의 주요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

만일 참여하더라도 가능한 구석진 자리에서 딸아이의 눈에 들지 않도록 얌전히 처박혀 있어야 했다.

공작은 정계에 진출해 고위 관료들과 환담을 나누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서 박살 나는 환상을 보았다.

“더 할 말 있는가?"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단 1초라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참. 레온 챙겨야지요, 폐하.”

"이런.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

"중요한 '것'이라니! 폐하!"

황후는 가벼운 손짓으로 황제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황제가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듯 반걸음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어이쿠, 황후께서 황제 암살을 시도 하시다니.”

“농담할 기운 없어요. 정말이지...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면....”

사람보단 잘 만들어진 정교한 태엽인형에 가깝게 행동하는 아이를 보며 과연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황후 스스로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엘리자베스의 방에 도착한 황후는 작은 소리로 문을 두드리다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황제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희고 푸른 방은 하얀 모래가 곱게 깔린 백사장과 수평선 너머로 폭포처럼 떨어지는 바다를 연상시켰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엘리자베스가 푸른색을 좋아한다며 직접 푸른 물망초가 수놓인 신발을 선물했다던가.'

황제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팔짱을 낀 자세로 방을 둘러보았다.

황후는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를 일으켰다. 아직 젖살이 통통한 어린 볼을 타고 조금 전까지 흘러내린 눈물의 흔적이 보였다.

'하기사, 어른인 나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레온은....'

어느새 품에 안으면 열 걸음을 걷기에도 힘들 정도로 성장했지만 황후의 눈에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갓 걸음마를 시작하던 무렵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황제가 손짓하자 시녀들이 잠든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들을 어르듯 안아 올리며 황실 마차로 향했다.

"영애의 옷과 귀중품을 챙겨야 하는데....”

황후는 꼭 허겁지겁 뒤따라온 공작 부인이 들으라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 그게. 요 며칠 계절이 바뀌느라 옷을 모두 세탁실로 보내 버려서....”

"그럼 그 옷이라도 가져가야겠군요.”

공작 부인의 표정이 더더욱 사색이 되었다. 황후는 입을 꾹 다물고 엘리자베스의 방을 가로질러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부인.”

“예.... 황후마마.”

“정말로 엘리자베스에게 이런 걸... 이따위 것을 입혔습니까?""

황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넓은 드레스 룸의 벽면을 가득 채운 건 화려하고 불편하기만 한 드레스였다.

그러나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어른이 들어도 묵직한 드레스 따위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기절한 엘리자베스로부터 급히 벗겨 냈던 코르셋을 발견하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따위만 중얼거리며 입만 벙긋거렸다.

“부인께선 교육이 아닌 사육을 하고 계셨군요. 저런 사람 모양의 감옥에 아이를 가두면서.”

겨우 찾은 편안한 옷 중 잠옷을 제외하고 입을 만한 것은 고작 세 벌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각각 소매 길이가 다르고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겨우 발견한 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평소에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공작 부인은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석 같은 건 필요 없다. 조금이라도 영애가 애착을 보인 물건이 있다면 뭐라도 좋으니 챙기도록.”

그렇게 모인 엘리자베스의 애장품은 레온이 선물해 준 신발과 꽃반지를 제 외하면 꼭 일부러 누가 찢어간 것처럼 페이지가 소실된 동화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인형도, 늘 끌어안고 자는 담요도 하나 없는 삭막한 결과에 황후는 입술을 꼭 깨물며 분노를 억눌렀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공작저를 둘러싼 숲을 완전히 빠져나간 뒤로도 한참 뒤에야 황후는 툭 내뱉었다.

“약속을 지켜 주셨네요."

"약속?"

"돌아올 때는 넷이라는 말."

황후는 물끄러미 황제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굳게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 끝이 조금씩 올라가는 게 눈에 보였다.

“저는 창문 너머 바람의 정령이 아니랍니다, 폐하.”

황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황후의 손을 꼭 맞잡았다.

황후는 황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건너편엔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가 서로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슬쩍 떴던 눈을 다시 꼭 감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곁에 엘리자베스가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 다음부턴 마차 따로 타야지....’

* * *

“우리 가문은 이제 끝장이야. 엘리시움이 이런 식으로 끝이 나다니! 죽어서 선조들의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지?"

공작은 조금 전부터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돌며 목에 핏줄을 세우고 있었다.

“젠장! 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아무리 황실이라 해도 대대로 황실에 엘리시움의 피가 섞이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주제에...."

공작 부인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등 뒤에서 뒷목을 붙잡은 채 가문의 위세며 선조들의 얼굴이며 열변을 토하는 남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부족함 없는 부모라고 자신했다.

모든 것은 딸아이를 위한 일이었다.

아무리 시어머니 될 황후의 인격이 훌륭하다 하여도 작은 실수 하나가 곪은 상처처럼 아이를 갉아먹을지도 모르는 곳이 황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그녀가 트집 잡히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완벽하게 행동하여 오직 찬사만을 받기를 바랐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황후의 자리에 무사히 앉을 때까지, 아이가 밟을 길에는 작은 먼지 하나 없어야 했다.

아이는 별말 없이 자신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따라 주었다.

그녀의 딸은 '모든 건 너를 위해서'라는 말을 이해하는 착하고 다정한, 이해심 많고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그렇게 훌륭하게 키워 냈는데 왜 황후께선 화를 내셨지?'

아이를 감옥에 가두고 사육하고 있다던 황후의 말을 공작 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 레온하르트는 혹여나 곤히 잠든 제 어머니가 깰까 불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창밖만 바라보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한참을 노려봤다.

"아바마마.”

"왜 아들아.”

“...어마마마께 잘해 주세요.”

"네 여자나 잘 챙기거라. 약혼이고 뭐고 전부 취소할까 하다 저 어리석은 것들이 오히려 그 아이만 잡을까 싶어 내내 참고 있었으니.”

“그랬다간 리지 손잡고 야반도주할 겁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요.”

황제는 모양 좋은 눈썹을 실룩였다.

겨우 철이 들고 외모로는 전혀 가지 않았던 황후의 유전자가 성품에서 조금 드러나나 싶더니, 아무래도 제 어린 시절을 판박이로 빼닮은 아들에겐 순간의 변덕이었나 보다.

"아바마마.”

"왜 또 그러느냐, 아들아."

"어마마마께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레온하르트의 것과 같은 자색 눈동자가 어린 아들을 응시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는 어쩐지 그 시선이 거울 속 자신을 닮았다고 느꼈다.

아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눈앞의 황태자는 이제 겨우 열 살, 저렇게 비딱하고 세상 볼 것 다 본 얼굴로 부루퉁하다 못해 염세적인 표정을 하고 앉아 있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우린 행복하지만 동시에 저주받았어. 황실이란 원래 그런 거다. 모든 것의 정점에 있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야. 네 녀석이 그 아이와 결혼하고 내 왕관을 뺏어 갈 즈음엔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만....”

“어쩐 일로 '아버지' 다운 생각을 다 하시네요.”

"여봐라, 황태자가 황궁까지 도보로 돌아온다 하니 잠시 마차를 멈추거라.”

“잘못했습니다.”

황제는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자신의 명령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온 기사에게 아무 일 아니라며 물러가라는 손짓을 취하며 황후가 조금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모처럼 이어진 부자간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레온하르트와 황제는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같은 자세로 창밖만 내다보았다.

'적어도 저는 아바마마처럼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거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흘끗 황제를 위아래로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꿈을 꿨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눈을 뜨며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애타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제발, 기회를, 자격을, 따위의 조각난 단어가 빙글빙글 머릿속을 돌다 천천히 연기처럼 흩어졌다.

자신의 손이 따뜻한 온기에 감싸인 것을 눈치채고 옆을 돌아본 엘리자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