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집살이 황궁살이(2)
엘리자베스는 두려웠다.
굉장히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레온하르트가 무서웠다.
얌전히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지내면 평범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레온의 작은 손끝에서 하나둘 부서지고 있었다.
"리지?"
레온하르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제와 황후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씨와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배웠지만 혀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따갑고 떫은 감각을 뭐라고 발음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세 계단쯤 먼저 내려가 있던 레온하 르트가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의 어깨는 늦은 여름 때아닌 비를 만난 떠돌이처럼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괜찮아?"
레온, 레온, 레온.
엘리자베스는 레온의 손을 잡으려다, 그것이 레이디로서 해도 좋은지 고민했다.
레온하르트는 허공에서 움찔거리기만 반복하던 그녀의 하얗게 질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다시 방으로 올라갈까? 리지 네가 싫 다면 하지 않을게.”
황태자는 응접실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황태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니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다.
황태자 전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분고분 순순히 행동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하지만 사탕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가까스로 벌어진 입은 아, 으, 하는 흉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는 없어. 황후마마께서 이런 내 모습에 실망하시고 레온과의 약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 하시면? 하지만 응접실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황태자인 레온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어, 어쩌면 좋지?'
레온하르트는 계단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시녀들에게 어서 엘리자베스가 덮을 만한 것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안타깝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만 보던 시녀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괜찮아, 리지.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면 돼. 방으로 돌아가도 좋고, 나와 응접실로 내려가도 돼. 그것도 싫다면....”
"레온, 레온... 이럴 땐 어쩌면 좋아요?"
봄의 아침 햇살 아래 놓여 있던 푸른 숄에선 따끈따끈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겐 어린아이라면 응당 볼을 비비며 안정을 찾아야 할 숄도 지금은 겨울 진눈깨비에 반쯤 얼어버린 걸레처럼 쿰쿰하게만 느껴졌다.
"네가 선택해, 리지, 네 인생이야.”
"내 인생은....”
엘리자베스는 신을 향해 구원을 바라는 신도처럼 간절한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온, 슬퍼요?"
"아니야, 리지. 나는 지금 너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물론 슬프기도 하지만... 나는 네가 원한다면 너와의 약혼을 취소할 수도....”
"싫어요!"
엘리자베스의 새된 비명에 시녀들은 물론 레온하르트마저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치 세상이 끝난다는 신탁을 들은 신관처럼 레온하르트를 붙잡고 그의 몸을 마구 흔들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싫어요, 그런 건 싫어. 레온이랑 함께 있고 싶어요. 나는, 나는...!"
"리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함께 있고 싶어?"
“네, 네...!”
"그럼 응접실로 가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다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눈치를 보면서도 다시 한번 그녀를 달랬다.
자신의 어린 약혼녀는 제 의사를 표현하는 법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속이 쓰리다 못해 위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알아 갈수록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미래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가까스로 인내했다.
그리고 어린애의 몸은 타인의 감정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변명했다.
응접실의 문이 가까워질수록 문 너머의 소란도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자신의 곁에 꼭 붙어 있던 엘리자베스가 어느새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황궁에서 가장 튼튼한 마법 장벽을 가져와 둘러 주고 싶었다.
레온하르트는 10살의 작은 덩치, 황태자라는 미묘한 지위, 그리고 제 반려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마법 장벽보다 더욱 견고하게 펼치며 엘리시움 가문의 집사에게 명령했다.
"문 열어.”
집사는 갈등했다.
지금 응접실의 문틈 사이로 들리는 대화 내용은 어른인 그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연극에 가까웠다.
지금 이 문을 열어 드려야 할까?
“문, 열라고 했어. 언제부터 엘리시움의 집사가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사람으로 바뀐 거지?"
집사는 제집인 양 당연하단 태도로 문을 열 것을 명령하며 자신을 질책하는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보며 식은땀만 흘렸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하는 것도 유전인가?
"아가씨,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가 가주의 명령으로 아가씨로부터 눈을 돌리고 지내야 했다 해도 그 또한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날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아기방을 꾸몄던 사람 중 하나였다.
집사는 무릎을 꿇고 엘리자베스와 몇 년 만에 시선을 맞췄다.
황태자가 설령 황실 근위대를 몰고 온다고 해도 이 집의 주인은 엘리시움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명령을 따라야 할 주인은 레온하르트가 아닌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못해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아슬아슬한 위태로운 모습으로 겨우 서 있었다.
허공에서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잘 다듬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꼭 그녀의 반쯤 빠져나간 영혼처럼 보여 집사는 손을 뻗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무... 문을.....”
열어 주세요.
엘리자베스는 다시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숨으며 말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지팡이로 맞을 때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집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춰 왔다.
주름 가득한 얼굴은 레온하르트와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보며 슬퍼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 슬퍼하는 건 싫었다. 엘리자베스는 레온이 웃을 때 얼마나 예쁜지 알고 있었다.
'집사님도 웃으면 주름이 조금 없어지실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집사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가 이렇게 작았었나?
무릎을 꿇으면서 그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색이 그가 보았던 하늘 중 가장 높고 맑았던 날의 하늘빛이라는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스... 슬퍼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그녀의 말에 집사는 심장이 그대로 발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정수리까지 튀어 오르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그 순간 집사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주인 내 외로부터 지키겠노라고.
몇십 년 노련하게 가주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집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들은 지난 팔 년간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정중하고 일정한 박자의 노크 소리 뒤엔 엘리자베스를 기절시키는 데 한몫 했던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가 흠칫하는 것을 느끼며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들어오게.”
문이 열렸다.
집사가 엘리자베스에게 허락을 구하는 사이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강 파악한 레온하르트는 열 살 소년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배배 꼬인 말투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럼 리지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일 아닙니까. 어른들은 왜 그런 간단한 일을 모르는 건지.”
"황태자! 폐하의 앞입니다. 언행을 주의하세요.”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반성하는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아들을 향해 어마마마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는 것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레온하르트는 그래도 지금은 엘리자베스 쪽이 더 급하다고 애써 쿡쿡 찔려 오는 마음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리지, 나랑 같이 살지 않겠어?"
그리고 등 뒤의 엘리자베스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황후, 그리고 당사자인 황태자에 이어 공작과 공작 부인까지.
황궁으로 가자는 무언의 압박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그녀를 얼마나 더 힘들게 할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해야 했다.
독을 다스리려면 더욱 강한 독이 필요했다.
* * *
엘리자베스는 두려웠다.
'황제 폐하에게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황후마마껜 어떤 식으로 존칭을 불러야 하지? 황궁의 예법이 어떻게 되더라? 레온은 왜 나에게 무릎을 꿇은 거지?'
매일매일 꽃송이처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까르륵 웃음으로 새하얗게 물들어도 모자랄 작고 여린 머리가 뜨끈뜨끈하게 익고 있었다.
무서웠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이 꼭 괴물의 눈처럼 마구 커지고 열 개에서 스무 개, 마흔 개, 그리곤 끝내 벽지의 무늬마다 그녀를 지켜보는 눈이 생겨났다.
그런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온하르트가 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같이 살지 않겠냐고 '의사'를 물어본다.
“으... 으아아앙!”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약을 먹어도 사라지지 않던 불쾌하고 끈적거리며 응어리진 덩어리가 하나둘 눈물에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숨이 넘어가라 오열하며 혼란스러운 기분도, 알 수 없는 감정도, 지끈지끈, 쿡쿡 쑤셔 오던 심장까지 토해 낼 기세로 전부 비워 냈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왜 나 보고 선택하라는 거야? 나에게 물어보는 거야?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하면 좋지요?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늘 나는,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 거였잖아요. 이것도 황후 수업인가요? 훌륭한 레이디는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죠?
모르겠어, 모르겠어 레온. 도와줘, 도와주세요. 응?
"리지, 엘리자베스, 진정, 진정하자. 응? 물 한 잔 마시고... 그래. 나 여기 있어. 레온이야.”
“레온, 레온... 나, 나 어쩌면 좋아요? ...이럴 땐, 훌쩍... 으아앙... 어어, 어떻, 어떻게 해야 해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리지는...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요. 그걸 모르겠어요. 저는... 저는요... 저는... 으흐흑....”
“진정... 진정하고... 차분히 생각, 아니 일단 숨부터 쉬자!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착하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구역질 나는 감각이 입천장을 두드려 댔다.
엘리자베스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레온의 품속에서 전부 토해 냈다.
필사적으로 레온하르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에게 매달렸다.
눈을 꼭 감고 그의 말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러자 벽지 가득 더덕더덕 붙어 있던 눈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느 때 같았다면 자신이 저지른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에 덜컥 겁부터 먹거나 아버지께서 지팡이를 들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쉬고 싶어.’
완전히 몸에서 힘이 풀려 버린 엘리자베스를 끌어안으며 레온하르트는 정중하게 방 안 어른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엘리시움 공작 각하. 미처 연락도 드리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무작정 찾아와 결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제 고집에 생각보다 리지가 많이 당황스러워하는군요.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닙...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오히려 저희 이졸데가.......”
"리지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황태자, 폐하의 앞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하지만 그녀에겐 정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질책하시려면 저를 질책하세요.”
“그, 그래요. 이졸... 리지가 놀랐으니 ... 집사는 당장 리지를 방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공작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집사가 뒤늦게 응접실로 들어오려는 순간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를 안아올렸다.
물론 다음 순간 조금 더 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에게 엘리자베스를 넘겨주어야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집사의 발소리가 계단을 끝까지 오른 뒤로도 한참이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의 몸이 이렇게 작고 가벼웠던가?
분명 구두를 사러 간 날, 장인은 그녀가 지극히 평균적인 체격이라 말했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자베스는 너무 작고, 가볍고, 첫눈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레온하르트, 잠시 어른들끼리 해야할 이야기가 있으니 영애에게 가 주겠니?"
"...네, 어마마마.”
황후의 목소리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투로 입을 여실 때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으로 아는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 * *
'엘리자베스’
공작저의 계단은 푹신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 높은 구두를 신어야 했던 그녀에겐 마치 칼날 위를 걷듯 고통스러웠을 터였다.
'리지.'
그녀의 방은 온통 희고 푸른 것으로 가득했다.
처음 이 방을 봤을 때 병실처럼 삭막하던 분위기에 겨우 조금 생기란 것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로 이렇게 방이 바뀔 때까지 이 순백의 방은 엘리자베스의 존재 또한 하얗게 지워 내고 있을 터였다.
'이졸데'
레온하르트는 혹시라도 그녀가 깰까 조심스럽게 한 발씩 내디뎠다.
그녀는 매 순간 그의 한 발짝 뒤에서, 꼭 그림자처럼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걷곤 했었다.
'내 황후.’
겨우 다시 잠이 든 엘리자베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펫에 무릎을 대고 꿇어앉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움찔하기만 할 뿐 여전히 색색, 옅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작지만 오똑한 코앞에 민들레 홀씨를 가져다 놓아도, 저런 숨으로 홀씨를 허공으로 흩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여린 숨결이었다.
그녀의 손을 성물처럼 꼭 붙잡으며 레온하르트는 빌고 또 빌었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황후. 내가 잘못했어요. 나를 선택해 주세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똑같은 머저리 짓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게. 나에게 그 자격을 허락해 주세요. 당신이 나로 인해 빼앗겼던 긴 시간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설령 그로 인해 당장 내일 내가 죽더라도 그대가 행복할 것이란 확신만 있다면 나는 스스로 지옥을 향해 걷겠습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 내가 당신에게 속죄할 기회를, 사랑할 자격을, 허락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