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시집살이 황궁살이(1)
엘리시움의 이명은 '천사의 후예들이었다.
대외적으론 족보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이 성서에 남은 마지막까지 땅에 머물러 있던 천사의 것과 일치한다는 이유였지만 그건 열 살 황태자도 코웃음을 칠 법한 대충 끼워 맞춘 구실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한여름의 바다 저 멀리, 수평선에 맞닿아 있는 정오의 창공 같은 하늘빛 눈동자만큼은 천사라 불리어도 부족함 없는 아름다운 증거였다.
제국의 첫 번째 황후를 시작으로 고매하고 유서 깊다는 제국 귀족들의 족보는 저마다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족보 어딘가에 적힌 엘리시움의 이름을 가졌던 영애들의 이름.
엘리시움은 그렇게 대대로 '첫 번째 황후를 배출한', '천사의 후예', '높으신 귀족들 중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이 없다' 따위의 이유를 들며 공들여 빚어낸 딸들을 포장해 결혼식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얻은 권력과 부였다.
당연히 어느 순간부터 엘리시움 공작들은 마땅히 공작다운 일들, 예를 들면 황궁 내에서 황제를 두둔하거나 혹은 반대로 정치 파벌을 만들고 권력의 정점에 서서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대신 딸을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고 완벽한 신붓감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번 대의 엘리시움 공작 또한 그런 사내였다.
한 가지 전대 엘리시움 공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유난히 정치에 대한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황실과 태중 혼약을 맺은 것 또한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한 밑바탕이자 혹시 모를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선 싫어도 황제와 서로 웃는 낯으로 마주해야 했다.
아무리 제 딸이 미래에 황후가 되고 사위가 황제라 해도 황실 앞에서 공작가는 구름 아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는 엘리시움 공작은 지배자의 시야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금씩 정계에 대해 간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지배자께서 이런 이른 아침부터 직접 저택을 방문하다니?
이런 일은 금시초문이었다.
허겁지겁 겨우 머리에 물만 묻힌 모습으로 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공작은 대체 황제가 직접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뭘까 추측하기 시작했다.
"엘리시움 공작.”
“예, 폐하. 하명하소서.”
“가서 바지나 다시 입고 오게.”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명령했다.
공작은 그제야 자신이 바지를 거꾸로 입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금... 금방 다시 제대로 예를 갖추겠습니다.”
"영애께선 이른 아침부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시더군.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면목 없습니다.”
당신 딸은 이 아침부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던데 부모라는 사람인 그대는 왜 그 모양인가?
황제의 뼈 있는 한마디가 그를 질책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황제 부부를 응접실로 안내하고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차는 됐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허공만 노려보던 황제는 엘리시움가 집사의 손길을 저지했다.
엘리시움 저택은 특유의 신전처럼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로 그들을 반겨 주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여신의 신전처럼 아름다운 집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돌무덤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변했다.
'레온하르트가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기에 오기는 했다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황제의 눈치를 보던 집사는 황제가 깊은 생각에 빠진 틈을 타 빈 잔을 채우려고 했다.
"엘리시움의 집사가 언제부터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사람으로 바뀌었지?"
그러나 황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집사는 몸을 움찔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가서 네 주인이나 도와주거라.”
황제는 마치 제집인 양 쿠션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태도로 말했다.
집사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주인 내외의 방으로 달려갔다.
"돌아갈 때도 세 사람인가요?"
황후의 물음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아니, 네 사람.”
한편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자신이 가진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눈앞에 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코르셋을 있는 힘껏 조였지만 드레스는 도저히 그녀의 몸에 맞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를 가르치느라 머리를 너무 쓴 나머지 늘 달달한 것으로 속을 달래야 했던 탓이라며 공작 부인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렇다고 실내용 드레스나 두 번째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황제와 황후를 알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공작이 직접 두 팔을 걷어붙이고 공작 부인의 허리에 발을 올렸다.
“숨! 더 숨 내쉬게!”
“아이고, 아이고! 조금 더! 조금만 더요!”
공작의 팔에 핏줄이 선명하게 서는 것을 보며 시녀들은 저마다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매일같이 아가씨에겐 지독할 정도로 코르셋을 조였으면서... 솔직히 조금 후련하다. 그치?"
“쉿! 마님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래!”
남편의 도움 덕분에 가까스로 드레스를 입는 데 성공한 공작 부인은 시녀들을 향해 눈을 흘기며 공작의 뒤를 쫓아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저 발칙한 계집들을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귀하신 분을 기다리게 하다니, 가주로서 정말 면목 없습니다. 황제 폐하.”
“개의치 말게. 어차피 금방 돌아갈 생각이니. 와서 앉지 그러나? 황후, 공작 부인과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 않았소?"
공작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황제의 눈치만 살폈다.
분명 여긴 엘리시움 저택의 응접실이었는데 황제의 말 한마디에 응접실은 대신들이 양옆으로 주르륵 늘어선 황궁의 홀보다 더 어렵고 식은땀 나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한편 공작 부인은 황후께서 직접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가쁜 숨을 내뱉었다.
황후께서? 나를? 어째서?
황후를 다른 응접실로 모시며 공작 부인은 어차피 긴 드레스 자락에 가려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을 괜히 굽 높은 신발을 신었다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부인께서 우리 며늘아기를 아주 훌륭히 교육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황태자로부터 직접 들었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 부인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뿌듯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황후는 애써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았다.
'교육? 말이 좋아 교육이지. 서커스의 동물도 그렇게 교육하진 않는 법이거늘!"
하나뿐인 아들이 전해 준 미래의 며늘아기의 소식에 황후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내질렀었다.
며늘아기가 될 아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비명을 지를 정도로 끔찍한 일이 이곳 엘리시움 저택에서, 미래의 황실 가족에게 벌어지고 있었다니!
"과찬이십니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배움이 부족한 아이랍니다. 고작해야 여덟 살이 뭘 알고 행동하겠습니까. 호호... 호호호...."
황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공작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구나 온화하고 비단결처럼 성품 고운 분이라 칭송할 만한 황후의 미소였으나 공작 부인은 그 미소가 어딘지 겨울 북풍보다 더 차갑고 싸늘하다고 느꼈다.
“그렇지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영애의 나이 무렵... 아직도 눈에 선하군요.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황궁 복도에 그대로 드러눕거나 하루 온종일 토라져 있던 모습 말입니다. 지나고 보면 그것조차 다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법이지만....”
황후는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공작 부인을 떠보았다.
"영애를 보아하니, 부인께선 그런 사랑스러운 순간은 아주 잠시 누리셨을것 같군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공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후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공작 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영애께서 참으로 훌륭하게 자라주었구나, 하고 미래의 시어미 될 자로서 대견하고 기특하고... 또 감사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아직 천방지축 말괄량이인 이졸데를 그리 높이 봐 주시다니, 저야말로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영광입니다, 황후마마.”
'훌륭하게 자랐지. 암, 아주 훌륭하고 말고. 나 같았으면 진작 아버지 콧수염을 다 뽑아 놓고 탈출이라도 했을 텐데!'
어린 시절 한 성격 했던 황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교육이라 하니 생각난 이야기입니다만... 엘리시움 공작 부인.”
"말씀하시지요, 황후마마."
"엘리자베스를 황궁에서 키울까 합니다.”
* * *
황제 또한 엘리시움 공작과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황궁에서 키우려고 한다만.”
“예, 예에? 황제 폐하!"
“어차피 언젠가 황태자비가 되어 황실로 올 것 아닌가. 그걸 조금 앞당기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
당장 그동안 교육이란 이름하에 방치했던 부인의 회초리부터 딸아이의 뼈를 부러뜨렸던 자신의 지팡이가 가을 낙엽처럼 휭 하며 공작의 눈앞을 날아갔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회초리를 맞고 아파 우는 제 딸아이의 울음소리에 역정을 내며 가장 깊숙한 서재에 틀어박혔던 참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의 피부가 금방 아문다 해도 그런 상처 자국은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려야 완전히 사라질 텐데!
“그런... 그런 일은 폐하 홀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사안입니다!"
"당연하지. 그래서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나.”
그게 어딜 봐서 의사를 묻는 태도였습니까! 그러나 공작은 황제에게 항의하며 맞서는 대신 얌전히 입만 우물거렸다.
'아니지,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이졸데 그 아이가 일찍 황실로 들어간다면 아이를 본다는 빌미로 황궁에 조금 더 자주 드나들 수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여러 인사들과 더욱 돈독한 친분을 다질 수 있겠지. 이건 기회야!'
황제는 커다랗고 늙은 쥐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엘리시움 공작을 향해 쯧쯔쯔 혀를 찼다.
저런 게 천사의 후예라고? 지나가던 악마가 웃을 노릇이었다.
괜히 몸속 어딘가를 흐르고 있을 초대 황후의 피마저 역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크흠, 흠...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겐 단 하나뿐인 딸아이인 만큼 무엇보다 아이의 어머니 의사 또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부인과 충분히 상의한 뒤....”
“똑똑똑. 이야기 끝났나요?"
"황후마마!”
공작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황후를 향해 반사적으로 다시 허리를 굽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뒤따라 들어오는 제 부인의 얼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부, 부인. 설마 황후마마께서도...?"
"엘리자베스를 황실에서 키우시겠다고....”
공작은 부인의 귓속말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분 윗전들께서 이렇게 갑자기 행동하실 이유가 없었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소년이 있었다.
태중 약혼이 공식 문서로 확정된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처음 자신의 딸을 만난 날과 그 이후 저택에서 황태자가 벌였던 일들을 떠올려 보던 공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자 하니 엘리자베스는 황후 수업에 아주 열심이라던데, 그럴 바엔 차라리 황실에서 직접 황실 예법을 배우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인?"
"하지만 황후마마!”
“그렇지 않아도 슬슬 레온하르트의 친구가 될 또래 귀족들의 아이를 황실로 불러들일까 하던 차였는데 잘되었군. 이참에 엘리자베스의 친구가 될 만한 영애들도 부르는 건 어떻겠나? 황후.”
“어머! 좋은 생각이에요. 모처럼 황실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겠네요."
“그렇지?"
황제는 꼭 칭찬을 바라는 커다란 사냥개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황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황후는 방긋 웃으며 황제의 두 손을 꼬옥 잡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공작 부부에게 못을 박듯 재차 말했다.
"황후가 될 아이에게 황궁만큼 알맞은 교육 장소가 어디 있을까요?"
"이... 이졸데가 실은 몸이 아직 약하여 적어도 봄이 지난 뒤에야....”
“불치병인가? 상관없다. 불치병이라 해도 고쳐 낼 수 있는 의사가 황궁에 차고 넘쳤어.”
“그런 건 아니오나....”
엘리시움 공작 내외는 어떻게 하면 딸아이의 회초리 자국을 숨길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황실에서만 가능한 황후 수업과 이른 사교계 데뷔를 보장하는 것은 당연하고, 남편 될 이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결과를 바로 짐이 보증하는데 대체 무엇을 그리 망설이지?"
"폐하, 저희가 처음 만난 건 성인이 된 이후였답니다.”
“짐은 그랬지만 황후는 아직 성인식을 올리기 전이었지 않나. 지금도 눈에 선해, 그때 가장 덩치 큰 종마를 타고 들판을 달리던 황후는 마치....”
“지금 겨우 여덟 살배기 아이를 부모의 품에서 떼어놓으시려는 겁니까!"
깜짝이야. 황제와 황후는 둘만의 추억을 회상하려다 말고 높고 새된 비명에 다시 공작 부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 부인은 걸을 수 없을 만큼 발이 아파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해 황후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코르셋을 입고 큰 소리를 내질렀더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겨우, 이제 겨우... 허억, 여덟 살이란 말입니다! 그런 아이를... 아직 어미 품에 안겨 있어야 마땅할 아이를 황후 마마께선 기어이 떼어 놓으시려는 겁니까! 어찌 그리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신지요!”
레온하르트가 그 모습을 봤다면 당장에 테이블 위로 이마를 박으며 '저딴 것들에게 황후가 자란 것도 모르고 나란 놈은...!'이라며 다시 후회할 장면이었다.
“엘리시움 공작 부인! 진정, 진정하세요!"
지금 당신 드레스가 뜯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황후는 뒷말을 삼키며 갑자기 역전된 상황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 당황한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황제 또한 이런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제비꽃빛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엘리시움 공작은 치고 빠져야 할 순간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필사적으로 치고 나가야 할 때였다.
공작 또한 황제의 앞에 책처럼 허리를 접으며 눈물로 읍소했다.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지만 지금은 미래의 황후 되실 분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일이 더 중요했다.
"폐하! 부디 그 사안에 대해 고려해 주시옵소서! 하나뿐인 딸자식입니다. 아직 어린 그 아이가 어미도 아비도 없는 황궁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면... 이 늙은 몸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럽습니다!”
"황후마마,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흐윽... 생각을 재고해 주세요. 저는 엘리자베스가 없으면 살 수 없는, 허억... 헉... 몸입니다. 엘리자베스 또한 매일 밤 제가 잘 자라는 인사를... 흐읍, 해주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그 아이를 데려가시겠다 하시는지요!"
황제와 황후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똑똑똑
공작 부부의 과장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눈물의 호소가 이어지는 와중에 정중하고 일정한 박자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들어오게.”
황제는 얼떨결에 이곳의 집주인이 누군지도 잊고 낯선 이의 방문을 허락했다.
엘리시움 공작은 코르셋으로도 버티지 못한 드레스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인 제 부인을 일으키며 황당한 표정으로 황제와 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나 이미 문은 열린 뒤였다.
"이졸데!"
“레온하르트!”
문 너머엔 당혹감 가득한 표정의 집사와 어딘지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의 등 뒤에서 결 좋은 은발이 빼꼼 드러났다.
“그럼 리지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일 아닙니까. 어른들은 왜 그런 간단한 일을 모르는 건지.”
“황태자! 폐하의 앞입니다. 언행을 주의하세요.”
황후가 엄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에게 주의를 줬다.
레온하르트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이다 등 뒤의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제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실내복 원피스 위에 만 걸친 차림으로 겁에 질려 금방이라도 다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엘리자베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지, 나랑 같이 살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