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트리스탄(2)
잠이 오질 않는다.
레온하르트는 한참을 넓은 침대에서 뒤척이다 결국 벌떡 일어났다.
황태자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물러난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침실은 조금 낯설었다.
레온하르트는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왜 나는 황후에게 그토록 무심하게 대했지?'
며칠 전부터 그의 심장에 쿡 박혀 있던 질문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몇 번이나 그녀를 만났는지 되돌아보았다.
약혼녀와 약혼자로서 어릴 때 한 번, 그리고 조금 자라 정식으로 성당에서 약혼식을 올릴 때 한 번, 완전히 성인이 되어 황태자비로서 결혼하던 날.
그리고 황제가 되어 황후로서 다시 즉위식을 올릴 때가 황실 밖에서 그녀를 만났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어서 레온하르트는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받았던 인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렇지.
마치 잘 만들어진 정교한 인형 같았다.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황태자비로서,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었다.
너무 잘 만들어진 인형을 보면 오히려 소름이 돋고 거부감이 든다 하던가? 그녀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희미하지만 그 불쾌하고 소름 끼치게 섬뜩한 잘 만들어진 인형의 느낌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짙고 선명해졌다.
덕분에 그는 성인이 되는 동안에도 꾸준히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겼고, 그 결과 황후가 되어서도 지독하게 무시를 ... 이거 완전 쓰레기잖아?
레온하르트는 결론을 내리다 말고 푹신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쾅 박았다.
베개 말고 벽에다 머리를 박아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그랬다간 당장 내일 아침 검술 수련을 못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시계도 태엽을 감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질 않는데,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니 굳이 챙길 필요 없다 여기다 못해 그 완벽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공작가를 족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평생 꺼림칙하다 여기고 무시를 해?
레온하르트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박다 아예 베개를 들어 작은 머리통을 마구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한 몸, 한 생명, 한 삶을 통째로 바쳐 오직 엘리자베스의 행복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의 굽 높은 신발을 벗겨 주고 코르셋을 풀어 주고 싶었다.
여덟 살 여자아이답게 원하는 대로 꽃밭을 뛰어놀고, 만인에게 사랑받고, 또 아낌없이 작은 새싹 하나에도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로 자라길 원했다.
'엘리시움 공작가....’
천사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 있는 공작가는 황실 족보 가장 첫 페이지에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며 무슨 부작용이라도 있었는지 기억 속 엘리시움 공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엘리시움 공작은 여전히 권력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사내로 보였다.
그런 가문에서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황실 가족들의 몸속을 흐르는 엘리시움의 피가 옅어질 즈음 그들은 다시 제 딸자식을 황후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완벽한 황후, 무시당하고 없는 존재처럼 취급당해도 묵묵히 황후로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고, 내킨다면 언제든 그녀를 통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인형 같은 존재로.
'절대 그렇겐 안 되지!'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10살 황태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계획을 세웠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늦은 저녁 자신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황태자의 편지를 읽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운 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곳곳에 틀린 철자들도 보였다.
"어머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감녕하셨습니까]
[애증을 담아]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이마를 짚었다.
"감녕과 애증... 아마 강녕, 애정이라 쓰시려던 것을 실수하셨나 보구나! 강녕이란 말은 상대방의 안부를 물어볼 때 쓰는 공손한 표현이니 이 기회에 너도 기억해 두거라. 그리고 이졸데, 황태자 전하께서 너를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절대 자만하지 말거라!! 아름다운 여인들은 꽃처럼 많고 너는 그중 가장 어여쁜 꽃에 불과해. 꽃이야 한 번 꺾이면 그대로 시들어 버리는 법, 전하께서 언제 다른 꽃을 찾으셔도 이상하지 않으니 지금 그분으로부터 애정을 받는다 하여 절대 자만하지 말고 몸을 낮춰야 한단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직 남녀 간의 이야기를 하기엔 딸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도 잊고 공작 부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자베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장을 쓸까요?"
황실에 보내는 문서이니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네, 어머니.”
공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다닥 도망치듯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밤새 어떤 답장을 써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잠들었다.
* * *
엘리자베스의 하루는 황실의 일상에 맞춰 시작된다.
황제가 침소에서 눈을 뜰 무렵 그녀 또한 눈을 뜬다.
황후가 몸단장을 하는 시간이면 그녀 또한 코르셋을 조이고 드레스를 입는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혼자, 그 시간 동안 공작 부부는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막 몸단장을 끝냈을 무렵 황실에서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당장 가주인 공작이 아직 잠들어 있었으나 황실에서 온 손님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엘리자베스는 본의 아니게 집안의 작은 안주인으로서 어떻게든 부모님이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어쩌지...?'
신전처럼 크고 무거운 돌문이 열리고 황실에서 온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들은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 있어 그림자를 검은 베일처럼 둘러쓴 덕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우선 예법에 맞게 몸을 깊게 숙이며 인사부터 올렸다. 설령 이 손님들이 황실 관련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종이어도 집안의 작은 안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엘리시움가의 장녀,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이 인사 올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은 어디 있지?"
처음 듣는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마치 겨울잠에서 막 깬 맹수처럼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덜컥 겁을 먹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며늘아기가 겁을 먹었잖아요!"
그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이 가볍게 타박했다.
내용은 그다지 고상하다 할 수 없었으나 발음 하나, 호흡 하나까지 우아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리지, 잘 잤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뒤로 넘어갈 듯 경악했다.
레온하르트, 매일 밤 꿈에서 다시 만났던 그리운 레온의 목소리였다.
“화... 화... 황... 황제 폐하!"
등 뒤에서 찢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저렇게 놀라실 때도 있나?
엘리자베스는 몸을 돌리다 말고 그대로 높은 굽에 미끄러져 한 바퀴 제자리에서 춤추듯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지려는 것을 붙잡아 품어 준 것은 흐르는 물보다 맑은 향과 태양처럼 따스한 온기를 가진 품이었다.
"아가, 괜찮니?"
"황후마마!”
아버지는 크라바트가 비뚤어진 것도 모른 채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어머니 또한 긴 머리를 반만 겨우 올린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졌다.
늘 유리 인형처럼 완벽하고 단정한,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었던 어머니께 서도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그러다 문득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뭐라 하셨는지, 그리고 왜 레온하르트가 여기에 있는지 알아차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리지, 리지? 엘리자베스!"
결국 엘리자베스는 미래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될 제국의 황제와 황후 앞에서 기절해 버렸다.
* * *
에스페도르의 황제 이실두르 아울레 폰 에스페도르는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시종에게 '5분만 더....’ 따위로 답하며 황후 프레이야 야반나 폰 에스페도르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께서!”
“그 아이가 왜....”
"폐하, 아침부터 이러시면 곤란하옵... 아, 으읏...”
“전하께서 급히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동생 만드는 중이라 바빠서 안 된다고 해. 프레이야, 이리 와. 응?"
문밖에서 두 분 마마께서 나오시길 기다리던 시종의 얼굴이 확 불타올랐다.
매일 아침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새벽부터 부리나케 본궁으로 달려온 황태자 전하께선 황제 폐하의 알현을 요청했고, 막무가내로 황제 폐하의 침소 바로 앞까지 찾아온 참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기엔 부적절한 소리가 문 안에서 이어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저, 그러니까 전하. 그게 어떻게 되는 거냐면,"
"으으응... 폐하...!”
"프레이야, 내 사랑. 응?"
"문 열어.”
"네?" "문 열어 버리라고. 어차피 저 둘 사이에서 또 애가 태어나는 일은 없을 거니 문 열어!”
레온하르트는 결국 역정을 내며 마구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금슬 좋은 광경은 몇 번이나 직접 의도치 않게 목격했던지라 - 젠장, 아들내미 생일파티에서 왜 자기들끼리 정원 속으로 사라지고 난리야?- 어색하거나 부끄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지, 10살 꼬맹이는 저 소리를 듣고 '아바마마께서 어마마마를 괴롭히려 하신다!' 하며 당황하는 쪽이 더 어울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10살 꼬맹이에게 사태를 돌려 돌려 설명하는 시종을 측은하게 여기며 레온하르트는 발만 동동 굴렀다.
“동생 가지고 싶지 않냐?"
빼꼼 문이 열리고 겨우 실크 가운만 챙겨 입은 아바마마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
누가 자기 아버지 아니랄까 봐, 성인이 되었을 때의 제 모습을 아주 빼다 박은 듯 닮은... 아니, 반대인가? 하여튼 잘생긴 얼굴 가득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오늘 말고 내일 만들어 주십시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바마마.”
"아직 허락한 적 없는데.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당장 황태자는 꺼져서 네 할 일이나 하거라.”
“그 명령, 황후의 이름으로 반대합니다. 레온하르트! 어서 이리로 오세요.”
"어마마마!”
“프레이야!”
레온하르트는 아버지의 다리 사이로 쏙 빠져나가 냅다 황후의 품으로 안겼다.
실크 가운 위에 다시 숄을 걸친 어마마마의 품에서는 그가 평생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야 했던 다정하고 따스한 향이 났다.
“우리 황태자께서 이런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실까? 혹시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활짝 웃었다.
최근 황태자 전하가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는 보고를 받고 이른 사춘기가 온 건가 싶어 황후를 고민에 빠트렸던 황태자의 애교에 황후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는 그 모습에 완전히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황후와 제 하나뿐인 아들에게 다가왔다.
“거기 내 자리니까 비켜.”
“싫습니다. 아바마마."
"이놈이...?"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내밀며 어머니의 품에 조금 더 얼굴을 묻었다.
등을 쓸어 주고 토닥여 주시는 손길이 따스했다.
"그래서, 우리 전하는 오늘 무슨 일로 폐하께 알현을 청하셨나요?"
아 맞다.
어머니의 품에서 그대로 잠들기 직전까지 갔던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황제와 황후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제 부인을 살려 주세요!"
황제와 황후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평소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아들이 전날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그러나 황태자의 손짓 발짓 몸짓까지 동원한 서툰 설명을 들은 두 윗전은 그 길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외출 준비를 명령했다.
"아니 이 아침부터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폐하, 폐하?”
"엘리시움 공작저로 간다. 당장 마차를 준비해!”
"황후마마, 폐하 좀 말려 주십시오. 아이고!"
"당장 가장 화려한 드레스와 황후의 보석을 가져오거라! 감히 내 며늘아기를... 그렇게 교육시키고 있었단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흡족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두 사람이 부산을 떠는 사이 다시 쏙 침소를 빠져나왔다. 역시 어머니 가 최고였다.
* * *
"그래서 지금 이 아침부터 두 분께서 친히 저택까지 오신 건가요?"
공작 부부는 황제 부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이 레온하르트라는 사실에 다시 기절할 듯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이번엔 굽 높은 구두도 꼭 졸라맨 코르셋도 답답하고 무거운 드레스도 아닌 잠옷 차림이었기에 베개 위로 풀썩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것마저 걱정이 되는지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붙잡고 한참 괜찮냐, 어디 아픈 건 아니냐, 혈색이 안 좋다 유난을 떨어 댔다.
“공작 부인께서 또 때리신 건 아니고?"
"으음...."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가 통 레온하르트의 제비꽃빛 눈동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며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겨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레온하르트 특유의 민트 향 같은 청량한 체향에 히끅 놀라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녀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은빛 머리칼을 한 줌 쥐어 장난치듯 가볍게 손에 쥐었다, 감아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한마디 내뱉었다.
"너, 시집살이 좀 해야겠다.”
"네?"
"황궁으로 가자고, 당장 오늘 약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약혼녀가 되어서 나랑 살자는 말이야. 왜, 싫어?"
"어...."
"내 사랑, 나는 그대의 사랑조차 받을 자격 없는 미천한 죄인에 불과하나 혹여 그대가 이런 나를 가엽게 여겨 자비를 베풀어 그대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황태자 전하. 죄송하지만... 말이 너무 어려워요.”
어휴.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걸 언제 키워서 행복하게 만들지?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될까?"
10살과 8살, 아직 사랑에 대한 감정은커녕 소꿉놀이나 하는 것이 어울리는 아이들이 할 법한 말은 아니라고 막 가벼운 다과를 가져오던 공작저의 시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