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졸데(2)
나는 황후가 될 사람이야.
도도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행동과 교양 있는 말투를 익혀야 해.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자비심을 잊어서도 안 돼.
그건 완벽한 황후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야.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가 어른이 되면 두 분께 감사할 거래.
왜냐면 착한 아이라고 나를 쓰다듬고 껴안으실 때면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어머니가 나를 껴안을 때면 숨이 막히고 새까만 향기에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아버지가 나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드실 때면 매번 몸이 움찔하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어.
하지만 따스한 손길이 닿는 순간 그 기분 나쁜 두근거림은 순식간에 사라졌어.
두 분은 나를 사랑하셔.
내가 착한 아이로, 황후가 될 사람으로, 레이디로 자라 두 분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면 또다시 그렇게 나를 껴안아주실까? 쓰다듬어 주실까?
아버지께서 구두를 사다 주셨어.
아버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구두는 하얀 새틴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사용한 장식물처럼 아주 작아 보였어.
하지만 어머니의 드레스 룸에 있는 것보다 높은 굽이 달려 있던 그 구두는 내 발에 딱 맞았어.
우리 착한 이졸데, 어여쁜 우리 딸.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일으켜세웠어.
무릎이 후들거리고 발톱 끝이 너무 아팠어.
그래도 나는 걸어야 했어.
머리 위에 책을 얹고,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회초리를 맞으며.
레이디의 우아한 걸음걸이에 익숙해지는 사이 내 새끼발가락은 보기 흉하게 뒤틀리고, 물집이 잡히고, 발뒤꿈치는 늘 피부가 벗겨져 진물이 흘렀어.
어머니께서 코르셋을 가져오셨어.
나를 위해 귀하디귀한 고래 뼈와 수염으로 만들어진 코르셋은 어머니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거래.
가녀린 몸매 또한 레이디의 덕목 중 하나라며 어머니는 내 호흡을 빼앗아가셨어.
숨을 쉬기 어려워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배가 너무 답답해 묽은 수프를 마시는 일조차 무척 힘겨웠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 했어.
나는 완벽한 황후가 되어야 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에 그분이 찾아 오셨어.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배 속에서부터 부부의 인연으로 묶인 나의 반려 되실 분.
내 이름보다 먼저 철자를 익혀야 했고 발음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던 분은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어.
비록 그분께 내보인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전하께선 넘치는 자비심으로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어.
그분의 금발이 햇살 아래에서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걸 보면 즐거웠어.
제비꽃빛 눈동자는 온통 새하얀 내 방에선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색이었어.
내가 가지고 있는 보라색 보석 중 어떤 것도 그분의 눈동자처럼 맑게 반짝이진 않을 거야.
그래서 그분이 무척 좋았어.
꿈에 그분이 나오실 때면 나는 눈을 뜨고도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어.
이대로 다시 잠들면 그분을 다시 뵐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다시 눈을 감아 본 날도 있었어.
하지만 나를 찾아온 건 아름다운 황태자 전하가 아닌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이었어.
내가 나빴어요. 함부로 욕심낸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어머니, 그런 무서운 얼굴은 하지 마세요. 네?
며칠 전엔 전하께서 구두를 선물해 주셨어.
비록 레이디로서 발목을 드러내는 일은 무척 수... 수... 수치스러웠지만... 언젠가 남편이 되실 분이니 부끄러워도 꾹 참았어.
그러자 그분은 내 신발을 벗겨 주시고 새로운 신발을 신겨 주셨어..
나는 이제 너무 커 버려서 읽을 수 없다며 어머니께서 전부 불태워 버린 동화책 속 공주님을 떠올렸어.
그 공주님은 왕자님이 유리로 된 구두를 신겨 주셨거든.
하지만 그분은 유리 구두 대신 굽이 없고 푸른 꽃이 수놓인 구두를 신겨 주셨어.
그리고 나는 정말 꿈 같은 하루를 그 분과 함께 보냈어.
하늘이 어떤 색이고, 봄의 햇살이 얼마나 따스하고, 잔디밭을 걸으면 어떤 소리가 나고 또 꽃밭에선 어떤 향기가 나는지 나는 그날 처음 알았어.
레온.
혹시 누가 들을까 봐 나는 아주아주 늦은 밤 혼자 이불을 둘러쓰고 소리 없이 그분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어.
레온, 레온. 레온.
그것만으로도 심장 한편이 간질간질해졌어.
아버지를 마주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간질거리고 두근거리는 이 느낌이 대체 뭘까?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비록 어머니께 맞은 뺨은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나는 괜찮았어.
레온.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게 정말 신기했어.
* * *
“전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건 아니겠지?"
“저, 전혀요. 전하께선 저를 직접 에스코트해 주셨어요. 또, 꽃밭에서 저에 게 청혼하셨어요!"
"뭐라고?"
왜 어머니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시지?
나는 전하께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머니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어.
나는 어머니를 따라 내 차림새를 확인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어.
세상에! 레이디의 하얀 드레스가 온통 초록색과 갈색으로 얼룩덜룩 물들어 있었어.
이런 모습을 레온에게 보이다니, 부끄러워서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
“잘못했... 아악!”
눈앞에서 별이 터졌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
투두둑 눈물이 흘러내리고 볼이 따끔거렸어.
아, 어머니께 뺨을 맞았구나.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건드리는 대신 어머니께 기어가다시피 해 용서를 빌었어.
내가 전하였더라도 이런 차림을 한 레이디는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전부 내 잘못이었어.
“.....이졸데.”
“잘못했어요, 어머니. 제가 나빴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들의 집무실 서류 위에선 영애와 영식들이 약혼식을 올리고, 또 파혼을 선언하고 있답니다.”
어머니께서 어려운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어.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얌전히 무릎을 꿇고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어.
어머니께서 다시 코르셋을 조이시면 어쩌지? 내일부턴 또다시 굽 높은 신발을 신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우리 이졸데는... 무척이나 영광스럽게도 태어나길 황후로 태어났지요. 이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인지 어째서 모르는 겁니까!"
어머니가 나를 존대할 때는 정말 정말 화가 났을 때뿐인데.
큰일 났다.
나는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멈추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어.
심장이 다시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어.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그런 망측한 모습을 보이다니! 내 교육이 모두 헛된 짓이 되어 버렸어! 그 손의 잡초는 뭐니! 손가락에 풀독이라도 오르면 어쩌려고 그래! 대체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저, 전하께서 주신 거예요!"
"...이젠 거짓말까지 해?"
그날 밤 나는 또 회초리를 맞아야 했어.
무척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울었다간 두 배로 맞을 거란 소리에 나는 참고 또 참았어.
가슴이 아팠어.
정말인데, 진짜 레온이 준 건데. 왜 믿어 주시지 않는 걸까?
다리가 너무너무 아팠어.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없었어.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어.
곁에는 어머니가 계셨어.
딸꾹.
나는 너무 놀라 딸꾹질을 했어.
어머니께서 물 한 잔을 주셨어.
딸꾹, 딸꾹. 물을 전부 마셨지만 딸꾹질이 그치지 않았어.
레이디가 남 앞에서 딸꾹질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인데,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나는 다시 겁이 났어.
“....대체 너에게 부족한 게 뭐니.”
하지만 어머니께선 나를 혼내시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어쩌지? 내가 훌륭한 레이디가 못 되어 어머니께서 슬프신가 봐.
“이 방을 보렴. 이 카펫은 저기 저 북국에서만 사는 하얀 곰의 털로 만든 아주 귀한 거란다. 벽지는 전부 거미줄로 짠 실크고, 테이블은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고, 책장 하나마저 숲 하나에 한 그루만 자란다는 하얀 나무로 만들었지. 그것만일까? 네가 먹는 것, 입는 것 하나에 사람이 몇 명이나 매달리는지 알기는 하니? 이렇게 부족함 하나 없이 살게 해 줬는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너는... 너는....”
“잘못했어요, 어머니.”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도, 곰의 털로 만든 카펫도 필요 없는데.
나는 어머니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어.
어머니가 나를 껴안아 주시길 바랄 뿐이야.
"다음부턴 실수하지 않을게요.”
“다음? 다음이 있을 것 같아? 잘 들으렴, 이졸데. 너는 황후가 될 사람이야. 황실의 예법이 얼마나 엄격한지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모든 건 다 널 위해서 하는 일이야. 제발 이 어미의 마음을 좀 이해해 주렴. 응?"
어머니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알겠어요, 어머니.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러니 다시 웃어 주세요.
나를 껴안아 주세요.
우리 착한 딸, 하고 나를 불러 주세요.
내 말에 어머니가 그제야 웃으시며 나를 꼭 껴안아 주셨어.
그런데, 어?
이상해.
레온이 나를 끌어안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야.
마치 커다란 두꺼비가 나를 끌어안고 있는 기분 나쁜 느낌이었어.
다행히 전하께서 주신 꽃반지는 내 보석함 중에서도 가장 귀한 반지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어.
이미 시들어 말라비틀어졌지만 나는 다이아몬드보다, 사파이어나 루비 반지 보다 그 꽃반지가 훨씬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되면 황궁에서 살 수 있대.
황궁에 가면 레온이 있어.
레온은 황태자 전하니까 많이 바빠서 나와 늘 함께하진 못할 거래.
그래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어.
아, 회초리를 더 이상 맞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동시에 레온이 걱정됐어.
사실 레온도 회초리를 맞고 있는 건 아닐까? 매일 머리 위에 책을 얹고 걷는 연습을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레온에게 편지를 썼어.
예법에 맞는 계절 인사말을 적고 가장 아래에는 '친애하는' 이라고 적었어.
하지만 내 편지는 레온에게 갈 수 없었어.
“네 어미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레이디가 먼저 편지를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래.
아버지는 그렇게 책망하시며 내 편지를 봉투째로 불태워 버렸어.
슬펐지만 아버지 말은 늘 옳으시니까, 아마 이번에도 내가 잘못한 걸 거야.
나는 장차 황후가 될 레이디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모든 일에 완벽한 훌륭한 레이디로 성장해야 해.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몰래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고 창문 너머 별님에게 속삭였어.
그분과 함께 정원을 걸었던 시간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내가 본 봄의 풍경 속에 당신이 있다는 일이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풀 위에 앉았을 땐 더없이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바람에선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달큰한 냄새가 났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처음 보는 색으로 가득했다고 말하고 싶었어.
반지를 끼워 주시던 순간 당신도 나처럼 마구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즐거움이 어떤 건지, 또 행복이란 건 뭔지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별님에게 나 대신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어.
별을 향해 편지를 보내는 일이 과연 훌륭한 레이디가 해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편지가 레온에게 닿기를 간절히 기도했어.
레온,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당신의 곁에서, 그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