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7화 (7/130)

7화 이졸데(1)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황후가 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황후마마.”

엘리시움 공작은 갓 태어난 딸아이의 작고 붉은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이름은 황태자의 이름에 맞춰 지어졌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니, 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가요.”

“겨우 동화 속 이름일 뿐이야. 큰 의미 부여할 필요 없어.”

“하지만 역사서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감동에 젖겠지요. 태어나길 황후로 태어나, 이름마저 한 쌍인 황후와 황제라니!"

“...뭐, 가문의 영광이긴 하지.”

엘리시움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잘 다듬어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공작 부인은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자신의 딸아이를 유모로부터 넘겨받으며 조심스럽게 아이의 뺨에 입 맞췄다.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소중한 이졸데. 너는 평생 사랑만 받으며 살게 될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것 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황실에서 후계자가 태어났을 때를 떠올려 보며 아이를 강제로 어미로부터 떼어 놓았다.

의아해하는 공작 부인에게 공작은 아이를 유모에게 넘겨주며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이 직접 젖을 물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 아이는 공작가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황실의 일원이야. 지금부터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하지만 여보....”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오?"

"그런 게 아니라...!”

공작 부인은 어딘지 석연찮은 표정으로 유모의 품에 안겨 칭얼거리는 자신의 딸을 응시했다.

“모든 건 이졸데를 위해서요. 그러니 그런 표정 할 필요 없소.”

부인을 달래듯 공작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 말에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저에 시집온 이후 그의 말이 틀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내 딸은 황실에 시집갈 아이예요. 그러니 그에 걸맞은 레이디로 자라야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라면 부인에게 일임하겠소.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가 되어도 좋으니 구해다 주리라."

공작은 공작 부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속삭였다.

황실로 시집갈 아이는 최고의 레이디로 자라야 했다.

공작 부인의 교육을 빙자한 학대는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고 간단한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공작은 그 모습을 방관했다.

아비인 제가 할 일은 그저 딸아이에게 부족함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용인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밀지 못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 공작저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심장이 멈춰 있었다.

그렇게 여덟 해가 지났다.

* * *

내가 유일한 딸이라 다행이야.

처음으로 굽 높은 구두를 신었던 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는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공작 부인의 시선 한 번에 모든 잡음이 뚝 그쳤다.

"어머니... 발이 아파오.”

“제대로 발음해야지.”

"발이... 아파... 아픔... 아픔미다.”

"다시!"

히끅.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긴 나무 막대기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녀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손바닥을 내밀어라.”

“어... 어머니...!"

시녀들 중 가장 마음이 여린 아이가 결국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공작 부인이 하고 있는 행위는 교육이 아닌 명백한 아동 학대였다.

그러나 이 저택에서 그것을 지적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저택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읍, 으흑, 하며 고통을 억지로 버티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겨우 말문이 트이고 걷고 뛰기 시작한 아이에게 대체 마님은 뭘 바라시는 거야?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다시 말해 보거라.”

"발이...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절망했다.

손바닥 가득 길고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간단한 움직임조차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디답게 행동해야 했다.

“....잘못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말문을 튼 이후로 가장 자주,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장 중 하나였다.

“손바닥이 아프니?"

“네....”

“레이디는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아프다는 이유로 두 손을 허공에 아무렇게나 두지 않는단다. 아니, 애초에 맞을 짓을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하얀 카펫 바닥만 노려보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뒤늦게 양손을 곱게 모아 배꼽 아래에 올려놓으며 슬쩍 어머니의 표정을 보자 차갑게 굳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도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를 본 엘리자베스는 안심했다.

혹시 동작이 늦었다고 또 혼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두근두근 마구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다시 걸어 보거라.”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엘리자베스의 작고 그늘진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괴로운 신발을 신고, 머리에는 책을 두 권이나 얹은 채로 걷는 것은 아주 힘겨운 일이 었다.

'내가 유일한 딸이라서 다행이야. 내 언니나 동생이 이런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야.'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꼭 깨물며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아장아장 걸어 다녀야 할 시기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며 시녀들 중 하나가 다시 조용히 불만을 터트렸다.

여덟 해가 지났으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공작 부인은 그 이상 입을 놀리면 며칠 전 저택을 떠났던 사람들과 같은 꼴로 만들겠노라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굽 높은 구두에 이어 엘리자베스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코르셋이었다.

아직 뼈가 여물지 않았을 때 가느다란 허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공작 부인은 어른들도 쓰기를 꺼려 한다는 강철과 고래 힘줄로 만든 코르셋을 특별히 주문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코르셋을 사용하는 건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 착용하셔도 어린 나이시니 뼈가 말랑해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코르셋을 주문하던 날 당혹감에 가득찬 장인의 걱정 어린 말투가 귓가에 생생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이 모든 것이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 여기며 직접 엘리자베스의 허리에 갑옷처럼 단단한 속옷을 입히고 끈을 조였다.

“숨을 더 내뱉거라!”

“어, 어어... 으흑... 흡...! 파하, 하... 아아악...!”

“더, 더 조여야 해!”

"아아악!"

“지금은 고통스럽겠지만 미래에 너는 나에게 고맙다고 하게 될 거야. 가느다란 허리와 연약하고 가녀린 몸매야말로 레이디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란다. 응? 이졸데.”

"어머니... 숨이... 숨이 쉬어지질 않아요....”

“원래 그런 거란다. 익숙해지도록 하렴. 이제부턴 잘 때도 코르셋을 입고 자도록 하거라. 알겠니? 다른 또래들 중 네 허리가 가장 가늘고, 네 걸음걸이가 가장 우아하고, 네 말투와 발음이 가장 교양 있어야 해!”

“....네, 어머니.”

“숨 헐떡이지 말거라. 너는 개가 아니야 이졸데. 너는....”

"...장차... 황후가 되어야 하니까...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되어야 하니....”

“착하지, 우리 딸.”

공작 부인은 다정한 목소리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제 딸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은빛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완벽한 황후가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몰락해 가는 엘리시움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말하자면 이건 투자였다.

공작은 엘리자베스를 교육하기 위해서라면 천금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공작 부인은 자신이 아는 훌륭한 레이디의 모습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하게 교육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자베스는 반항 한 번 않고 착실히 그녀의 교육을 따라오는 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공작 부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고, 턱은 당긴 자세로 서서, 사랑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싱긋 웃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자신을 올려보는 엘리자베스의 순수 하고 맑은 눈동자에 한 점 의심조차 없이 굳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공작 부인이 방을 나서자마자 시녀들이 황급히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코르셋을 풀어 주었다.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코르셋을 꽉 졸라맸던 엘리자베스는 기어이 현기증을 느끼며 시녀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시녀들 중 아무도 그 일을 마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마님께서 아신다면 가장 먼저 아가씨의 몸에 흉터가 남지는 않았는지 확인하시고, 자신들을 혼내시는 건 물론 아가씨에게 레이디답지 못하게 굴었다며 화를 내실 것이 분명했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저들끼리 몰래 아가씨를 도와주는 편이 나았다.

완벽한 신붓감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형을 만드는 신전.

엘리시움 공작저의 이명은 사용인 사이에서 암암리에 불리고 있었다.

물론 절대 주인님께 들켜선 안 된다.

들킨 사람 중 목이 멀쩡하게 붙어서 내쫓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어린이, 아니 유아용 코르셋과 구두에 겨우 익숙해질 무렵 딱 한 번 집에서 가출을 결심했던 일이 있었다.

공작 부부의 학대를 보다 못한 유모가 차라리 도망치자고, 아무리 주위에 좋은 물건으로 가득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날도 엘리자베스의 여린 살 위엔 코르셋의 심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새끼발가락은 짓물러져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돼? 신발도? 하지만 나는 레이디인데?"

"더 이상 레이디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아가씨는 인형이 아니에요. 비록 가난할지언정 아가씨만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드릴게요.”

그러나 두 사람의 가출 계획은 저택을 둘러싼 숲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공작에게 들켜 버렸다.

유모는 그 길로 어딘가로 끌려갔고 엘리자베스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엘리시움 공작은 흑단처럼 보이지만 속은 납으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옆에선 어설프게 공작을 진정시키다 오히려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며 따귀만 맞은 공작 부인이 시뻘겋게 부어오른 뺨 위로 얼음주머니를 대며 서 있었다.

엘리시움 공작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네년이....”

분노에 가득 찬 아버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릿 속에서 지워 냈다.

굳이 기억해 내고 싶지도 않았지만, 억지로 그날을 회상할 때면 꼭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떠오르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애원하는 자신의 비명 소리.

황후가 될 아이의 몸에 치명적인 흉터라도 남으면 어쩔 거냐며 공작을 만류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순간 느껴지던 끔찍한 고통.

잊었다고 생각하는데, 전부 지워 냈다 생각하는데, 무의식 아래에 묻혀 있던 기억은 종종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식은땀에 푹 젖어 벌떡 몸을 일으킨 엘리자베스는 뼈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남진 않았는지 손으로 더듬어 보고 또 거울 앞에서 직접 확인한 뒤에야 다시 침대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악몽이 반복됐다.

'내가 나빴어. 레이디답지 않은 일을 한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는 늘 옳으셔. 어머니의 말씀대로만 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내가... 내가 조금만 더 레이디다운 일을 했더라면.....’

눈을 감는 일이 두려웠다.

엘리자베스는 가물가물 감겨 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버티며 남몰래 흐느꼈다.

지금도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갑자기 숨 쉬는 게 힘들어졌다.

차라리 글로 남기면 나을까, 베개에 대고 털어놓으면 나아질까.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일기장을 펼치고 베개에 이름을 붙여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야기하는 대신 모든 일을 철저히 숨기기로 다짐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녀 혼자만 조용히 있는다면 모든 일상은 여느 때처럼 흘러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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