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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4화 (4/130)

4화 재회(3)

엘리시움 공작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비열하고 위선적이며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회초리? 코르셋? 굽 높은 구두와 혹독한 예절 교육? 그건 모두 딸을 위한 일이었다.

정확하겐 황후가 된 딸이 가져다줄 가문의 명예와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며 그는 일상적으로 자기합리화를 반복했다.

누군가 그런 그에게 '어린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다니!'라며 화를 낸다면 그는 왜 상대방이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오히려 타인의 손이 아닌 부모의 손에 회초리를 맞는 편이 딸의 죄책감을 더 자극해 다음부턴 그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을 테니 좋은 일 아니겠나?' 라고 대답할 터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를 사교계에선 제국의 천칭이라 불렀다.

물론 좋은 의미의 천칭은 아니었다.

천칭의 한쪽 접시엔 제 가문을, 반대 쪽엔 그 밖의 모든 것을 놓아두고 천칭이 기울 때마다 '딸'이라는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추를 서로 교환해 억지로 균형을 맞추는 천칭.

그런 이가 보기에 눈앞의 꼬맹이는 제국의 작은 태양이자 모셔야 할 주군, 사위 될 존재이기 이전에 그저 건너편 접시의 묵직한 추에 불과했다.

공작은 태중 혼약을 맺은 자신의 딸이 과연 저 추에 걸맞은, 아니 그보다 더 묵직한 추로 자랐을지 궁금했다.

“영애께서 늦으시는군요."

“....아직 철부지 어린애라 옷 하나 갈아입는 데도 한참 걸리는 아이입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여 황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으나...."

"교육이라.”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홍차에 우유를 부어 주려는 집사의 손길을 저지했다.

아직 어린아이가 마시기엔 쓸 법도 한데 후후 불지도 않고 한 번에 잔을 비운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두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깍지를 껴 턱을 괴었다.

'젠장, 어린애 혀엔 아직 뜨겁고 떫군....'

입 안에 감도는 홍차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표정을 실룩였다.

어린아이의 감각은 어른보다 예민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순간,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영애가 울며불며 누군가에게 애원하는 소리가 어린 레온하르트의 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영애께서 너무 늦으시는 것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직접 모시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머지않은 미래 저의 반려가 될 분 아닙니까.”

“하, 하오나...”

"레이디의 몸단장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홍차를 세 번이나 다시 우릴 정도로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손님에게 실례겠지. 레온하르트는 부러 말꼬리를 숨기며 그새 집사가 다시 잔을 채워 준 홍차를 마저 홀짝였다.

분명 그가 즐겨 찾던 브랜드의 홍차였는데 지독하게 쓰고, 떫고, 뜨거웠다.

공작은 가볍게 시험해 볼 겸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교육'은 충분했으리라 생각하며 그를 딸아이의 방으로 안내했다.

엘리시움 저택에서 가주와 안주인의 방 다음으로 큰 방이 엘리자베스의 방 이었다.

침실 외에도 예법과 글을 배우기 위한 서재, 매 계절마다 새로 맞춘 드레스가 가득한 드레스 룸, 욕실과 심지어 식사 예절을 공부하기 위한 작은 주방과 식당까지 갖춰진 방은 집 안의 집. 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을 연결하는 경첩마저 백금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방문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똑똑똑 두드린 엘리시움 공작은 방 안의 소리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았다면 황태자와 함께 껄끄럽기 그지없는 티타임을 계속해서 즐겨야 할 판이었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이졸데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이제 막 침대에서 잠들었습니다.”

문 너머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움 공작은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슬쩍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제 허리께나 겨우 오는 제국의 작은 태양은 팔짱을 끼고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나는 다 알고 있다.'라는 뜻처럼 보여 엘리시움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안타깝게도 이졸데가 워낙 태생적으로 약한 아이인지라.......”

"그럼 잠시 얼굴만 보고 가야겠군.”

엘리시움 공작은 말릴 새도 없이 하얀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황태자의 등 뒤를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공작의 경악 어린 표정에 깃든 의미는 '아무리 미래에 부부가 될 사이라 해도 감히 레이디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다니?'의 뜻이 아닌 '혹시라도 이졸데의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고 약혼을 없던 일로 하겠다며 고집을 피우면 어쩌지?'였다.

레온하르트는 방 안을 채운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아이의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긴 했지만 분명히 피 냄새였다.

엘리자베스의 방은 공작의 딸이 거주하는 방답게 부족함 하나 없어 보이는 화려한 방이었다.

새하얀 침대에 비단 휘장이 물안개처럼 드리워져 있고, 새하얀 소파 위엔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쿠션이 마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올려져 있고, 새하얀 양탄자와 새하얀 벽지와 새하얀 창틀과 새하얀 책상과....

'이거야 원, 병원의 병실도 이보단 덜 하겠군.’

온통 새하얀 것투성이였다.

아무리 화려하고 고급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한들 이런 곳에서 매일 생활한다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미쳐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하물며 이제 겨우 여덟 살, 한창 많은 색을 접하고 다양한 것을 눈에 새겨야 할 나이에 책꽂이에 꽂힌 표지마저 온통 새하얀 방이라니....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침대로 눈을 돌리다 문득 공작 부인이 등 뒤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인.”

“....하, 하명하시지요.”

레온하르트는 물끄러미 공작 부인을 응시했다.

공작 부인은 꼭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장을 노려봤다, 다시 카펫으로 시선을 돌리길 반복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신발조차 벗기지 않고 침대에 눕히다니.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설마 코르셋도 벗기지 않은 거냐며 지적하려다 급히 신발로 대체했다.

열 살 꼬마는 아직 레이디의 속옷에 대해선 몰라도 되는 법이었다.

“가... 가문의 의사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보시다시피 이졸데가 도저히 전하를 뵐 수 있는 상태가 아닌지라....”

거짓말. 공작 부인은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고작 10살 주제에 저도 군림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이건가?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생각했다.

황태자가 방에 들어선 순간 소년을 둘러싸고 있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침대에 누워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만 죽이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처음 들어 보는 쩔쩔매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 그리고 낯선 목소리의 대화를 통해 그 미성의 주인이 누군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챈 순간 엘리자베스는 숨죽여 훌쩍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절했다면 좋았을걸.'

최대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리도 너무 아프고 무엇보다 마음 한구석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나 여기 있다고, 다리는 아프지만 아직 서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감히 레이디가 경박하게 어딜 먼저 입을 놀리냐며 밤새 혼이 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모처럼 왔으니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가고 싶은데....”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더더욱 눈을 꾹 감았다.

“잠시 실례하겠네.”

눈꺼풀 위로 가벼운 바람이 불더니 푹신푹신한 침대가 출렁였다.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떴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년이 제 곁에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비꽃색 눈동자엔 슬픔이 가득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슬픔이라 정의했으나 실은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었다.

레온하르트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과 조금 더 짙어진 피 냄새, 방금 전 공작 부인을 스쳐 지나가며 흘끗 확인한, 그녀가 등 뒤로 숨긴 회초리를 통해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춰 보았다.

'그래... 그런 거였단 말이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 그녀를 마주했던 날, 그는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어오는 어두운 표정의 소녀를 향해 폭언을 내뱉었다.

겨우 빗질만 한 듯 엉망인 머리칼을 거미줄이라 놀리고, 절뚝거리는 주제에 우아한 척 품위 있는 척하는 모습이 고깝게 보여 심술궂은 말을 마구 지껄여댔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얼굴이 이 지경이니 머리는 산발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고, 회초리가 있었으니 남에게 보이지 않는 치마 아래 두 다리를 맞아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두도 벗기지 못하고 눕혔냐는 말에 공작이 친히 제 딸의 구두를 벗겼을 때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어야 했다.

여덟 살 아이에겐 너무 높은 굽이 달린 구두는 멀쩡한 다리였더라도 쉽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전적으로 그의 오해이자 심술이었다.

그녀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다. 멋대로 오해하고, 걷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을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상처까지 입힌 건 모두 자신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하얀 실크 시트가 주름으로 엉망이 될 만큼 꽉 주먹을 쥐었다.

후회와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섞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기절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미래에 반려가 될 사람에게 울음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라는 최악의 첫인상을 보이고 말았다.

평소 어머니로부터 황태자 전하가 얼마나 멋진 분인지 귀에 박히도록 들었지만 실제로 본 황태자 전하는 이야기 보다 훨씬 더 멋진 분이셨다.

온통 새하얀 공작저에서 자란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같이 선명한 보랏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슬픈 눈빛을 하고 계시는 걸까. 역시 내가 전하께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 그런 걸까? 어머니의 말대로 조금 더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는데, 실망하셨겠지...? 밤에 아버지께서 방에 찾아오시면 어쩌지?

"몸은... 괜찮은가?"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책 하나를 달달 외우다시피 배웠던 예법이며 궁중 언어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퍼하지 마세요....”

누군가로부터 걱정이란 것을 받아 본 적이 처음인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가 슬퍼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역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야....'

"슬프다고? 내가? 아니야, 영애. 나는 지금 영애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 이요?"

그게 뭐지?

엘리자베스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길고 풍성한 은빛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앞이 흐려졌다.

그 바람에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보이질 않아 속이 상했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예쁜 보랏빛이었다.

조금 더 보고 싶은데...,

“걱정이란 건... 그렇지. 영애의 몸과 마음이 모두 평온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기계 태엽 인형처럼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에서 영혼이라곤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기가 차는 마음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사람을 나는... 저치들은... 대체....'

이가 빠드득 갈렸다.

영애에게 최고의 첫인상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첫 번째 계획부터 완전히 엎어져 버렸다.

“걸을 수 있겠어?"

"물론이죠!”

거짓말.

그때 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절뚝거리며 걸었잖아.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키려는 엘리자베스를 가벼운 손짓으로 저지하며 뒤늦게 그녀의 신발을 벗기던 공작에게 지적했다.

“영애가 신기에 이 구두는 굽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조금 더 편안한 신발은 없는가?"

"예, 예에?"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이 동시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신발장에 장인이 직접 만든 비단 리본 위로 크리스털 장식이 달린 구두부터 굽이 유리로 만들어진 구두까지 온갖 화려한 구두로 가득 차 있었지만 황태자가 말하는 편안한 신발은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황송하옵게도 이졸데가 워낙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고집을 부리는지라....”

“...그런가.”

뻔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공작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마음속 그녀를 위한 선물 리스트 가장 맨 위에 '편안한 신발'을 적어 넣었다.

“영애는 무슨 색을 좋아합니까?"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질문했다.

엘리자베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홀린 듯 대답했다.

“보라색이요. 황태자 전하의 눈동자와 같은 제비꽃 같은 보라색... 아니, 아니에요. 흰색, 하얀색을 가장 좋아합니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등 뒤의 공작 내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세를 바꿔 공작 내외를 엘리자베스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정말 하얀색을 가장 좋아해?"

엘리자베스는 눈에서 부모님이 보이지 않자 조금 당황했다. 어쩌면 좋지? 하얀색이라고 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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