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재회(2)
엘리시움 공작저는 황궁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모의 품에 안겨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레온하르트는 지루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계탑의 마녀는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였다.
덕분에 자신은 과거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지냈던 방, 협탁 아래의 표식,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반겨 준, 정식으로 성인이 되던 날 황궁을 떠났던 유모가 그 증거였다.
심지어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닌 미래의 황후가 될 엘리시움 영애를 처음으로 만나러 가는 날이란다.
어리석었던 자신에게 마녀가 마지막 기회를 준 걸까.
혹은 평생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를 가엾게 여긴 마녀가 자신으로 하여금 평생 그녀를 사랑하라는, 그러나 그녀로부터 사랑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에게 미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거나 행복하게 해 줄 자격도, 사과를 할 염치도 그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 각을 이어 나갔다.
어찌 되었건 자신은 과거로 돌아왔다.
미래는 정해져 있다. 그 틀에서 벗어난다는 도박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럼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같은 미래를 반복하되 멍청한 짓만은 반복하지 않는 것뿐.
“영애가 나와의 약혼을 거부한다고 하면 어쩌지?"
“전하?”
나 같은 놈도 과거로 돌아왔는데 황후라고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황후야말로 죽었다 살아나서 새로운 인생을 만끽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만일 그녀가 자신과 약혼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순순히 그녀의 의사를 들어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긴 유모의 말이 맞다.
기억 속 엘리시움 공작은 죽은 장녀를 대신해 그의 차녀를 사위의 침실로 밀어 넣으려던 권력에 눈먼 자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딘가 불만족스럽단 투로 입술을 삐죽였다.
공작의 인품이 성인군자는 개차반이든 오늘 첫 만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약혼에 대한 그녀의 의사였다.
“하지만... 영애께서 내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시거나-.”
“그럴 리가요!”
유모가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분을 감히 어떤 영애께서 거부할 수 있을까요."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열서너 살 무렵 그렸던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정통 후계자에게만 허락된다는 자수정빛 자안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백금발, 단정한 턱선과 우뚝한 콧날은 아직 어린애 특유의 포동포동한 젖살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 자신은 몇 년 걸리지 않아 제국에 소문이 자자한 미남으로 성장할 터였다.
“정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작은 선물을 가져가시는 건 어떨까요?"
“선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물, 선물이라....
"영애께선 무얼 좋아하지?"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귀한 보석은커녕 그 흔한 꽃 한 송이조차 선물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황후의 대관식 날 그의 손으로 직접 머리에 얹어 준 왕관을 선물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이라도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나 루비로 만든 장미꽃을 사러 가야 하지 않을까?
“영애께선 올해로 여덟 살이시지요. 그 나이라면 보통은 역시 인형이나 소꿉놀이 장난감을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여덟 살.
그 말에 보석상으로 마차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리려다 말고 레온하르트는 동작을 멈췄다.
지금부터 만나러 가는 엘리시움 영애는 황실로 시집오던 날의, 소름이 끼칠 만큼 완벽한 자태의 레이디가 아닌 한창 정원의 꽃밭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뛰어놀아야 할 어린 나이의... 말 그대 로 어린이였다.
“미래의 부인 될 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다니, 남편 실격이군.”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장난감 가게로 갈까? 일단 가면 뭐라도 있겠지.
가장 비싼 게 가장 좋은 것 아닐까? 하지만 의외로 영애의 취향이 소박하다면?
그래서 자신의 선물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첫인상부터 마구 돈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면 어쩌지?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덜컥 겁이 난 레온하르트는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여덟 살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것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유모를 비롯한 시녀들이 다급히 흐뭇한 미소를 감추며 고개를 돌리거나, 천장을 노려보거나, 무릎 사이로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다들 왜 그러지?"
“아닙... 아닙니다... 전하. 아, 역시 인형이 좋겠지요? 도자기로 만들어 새 하얀 피부를 가진 인형 말입니다. 유리구슬로 눈동자를 만들고 실크 드레스와 구두 장인이 직접 만든 정교한 구두를 신은....”
“영애의 방에 그런 것 하나 없을까 봐? 인형은 식상하니 차라리 꽃은 어떨까요? 꽃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는 법이랍니다.”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리니 책은 어떨까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영애라면 어린이용 향수나 굽 높은 구두도 나쁘지 않겠지요!”
“차라리 드레스를 한 벌...."
"아냐, 인형이야!”
“꽃이야!”
"책!"
"다들 조용!"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저마다 인형이 좋다느니 책이 좋다느니 싸우기 시작하던 시녀들을 한 번에 조용하게 만든 유모가 조금 질린 표정으로 마차 구석에 얌전히 처박히듯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다 품어 주었다.
“전하께서 진정 영애를 생각하시며 신중히 고르신다면 그것이 설령 길가에 핀 들꽃이어도 영애께선 기쁘게 받아 주실 겁니다.”
"어떻게 그걸 장담하지?"
“선물은 물건의 가치만큼이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이 중요한 법이지요.”
“...그런가.”
레온하르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선 인형도, 책도, 꽃도 전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물건 말고 특별한 것을 주고 싶었다.
자신에겐 재회였지만 그녀에겐 처음 만나는 일이었다. 가능하면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속죄를 위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그녀의 행복한 미소를 위해.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시점에서 좋은 첫인상은 이미 날아간 것 같지만....'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으며 다시 푹푹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 * *
“저기가 엘리시움 저택입니다. 오늘은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는 거니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그렇지! 오히려 이 기회에 영애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쭤보시는 건 어떨까요?"
“직접? 내가 말인가?"
유모를 비롯한 시녀들의 고개가 한 사람의 동작처럼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레온하르트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마
차에서 내리며 착잡한 표정을 숨겼다.
당장 조금 전 숲길이라 생각했던 곳도 사실은 저택으로 가는 길의 입구에 불과하다는 유모의 설명에 레온하르트는 흐음, 콧소리를 내며 기억 속 엘리시움 가문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그러고 보면 제국의 초대 황후께서도 엘리시움의 영애셨다지요? 후후, 어떻게 보면 아주 먼 친척 집에 온 것이나 다름없군요. 황태자 전하. 레이디께 상냥하게 대해 주세요. 첫인상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랍니다.”
엘리시움 공작저는 차라리 신전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온통 새하얀 석재로 만들어진 저택이었다.
황후의 욕심 하나 없이 사려 깊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기만 했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정말 엘리시움은 천사의 후예라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그녀를 떠올리자 입 안이 썼다.
레온하르트는 유모가 내민 손을 거절하고 홀로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다.
온통 하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본관 입구에 이미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을 비롯한 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페도르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시움 공작을 향해 고개만 까딱였다. 이어서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작 부인이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시선은 이미 그 옆,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파들파들 떨며 서 있는 미래의 황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영애께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가?"
레온하르트는 엘리시움 공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엘리시움 대대로 내려오는 은발과 벽안을 가진 공작은 예상치 못한 황태자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공작이 이런 사람이었던가?'
레온하르트는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제 기억 속 엘리시움 공작은 이보다 더... 뭐랄까, 적어도 귀족 특유의 표정 감추는 법에 능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았는데.
“전하를 처음으로 뵙는 날이라 너무 긴장한 모양입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부인, 이졸데의 옷차림을 다시 정리해 주겠소?"
레온하르트는 어딘지 미심쩍단 표정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리자베스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굳이 이졸데라는, 자신의 이름에 맞춰 지어진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졸데라는 이름은 제 딸을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시움 공작이 친히 문을 열고 레온하르트를 안내했다. 영애와 공작 부인은 본관으로 들어서며 가벼운 인사와 함께 먼저 물러났다.
* * *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엘리시움의 하나뿐인 영애이자 황태자의 태중 약혼녀로 태어나 후에 황태자비를 거쳐 황후가 될 예정인 영애의 어미 되는 이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바닥으로 밀쳤다.
“꺅!”
"내 그리 경고했거늘!”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코르셋이... 코르셋이 너무 답답해서, 그래서....”
"지금부터 황태자 전하의 눈에 잘 들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느냐!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엘리자베스는 무릎걸음으로 기다시피 해 공작 부인에게 매달렸다.
“종아리를 대거라!”
“어머니!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공작 부인은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하는 어린 딸을 마치 물건 다루듯 거칠게 떼어 놓으며 드레스룸에서 드레스 한 벌과 물푸레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어서!”
엘리자베스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히끅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새 드레스를 꺼냈다는 건 적어도 치맛자락에 핏물이 배일 때까지 때린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그녀가 꺼낸 회초리는 다름 아닌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회초리였다.
엘리자베스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자비를 구걸했다.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허리뼈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졸라맨 코르셋이 호흡을 방해하고 있던 차에 이 이상 울거나 회초리를 맞으면 정말로 기절할지도 몰랐다.
"어머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 아니면 코르셋이라도 푸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제가 울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그럼 울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 어디서 감히 내 핑계를 대려고! 어서 종아리를 대거라! 그 수많은 가르침이 전부 너를 위한 것이란 걸 왜 모르니, 이졸데. 응?"
엘리자베스는 절망한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가 서랍장을 붙잡고 일어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울지만 않으면 숨은 쉴 수 있을 터였다.
이제 겨우 여덟 살. 꽃밭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어린 아가씨에겐 가혹할 정도로 졸라맨 코르셋과 굽 높은 구두, 무거운 드레스.
그 아래 우아한 걸음걸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 대, 두 대씩 더해졌던 회초리 자국이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계곡처럼 깊은 흉터로 남아 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휘익 하며 공기를 찢는 소리는 공기 뿐만아니라 어린 피부마저 갈기갈기 찢어 놓기 시작했다.
"아악!”
"어디서 엄살을 피우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 이졸데!”
“어머니!”
결국 세 대만에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몸에 걸친 무겁고 화려하기만 한 옷가지와 공작 부인이 온 힘을 다해 내려치는 회초리를 여린 몸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공작 부인의 발소리가 엘리자베스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모든 건 다 너를 위해서란다. 너를 때리는 이 어미의 마음이 더 아프단 것을 왜 정녕 모르는 거니....”
“흐윽... 흑... 어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표독스러운 얼굴로 망설임 없이 딸의 종아리를 내리치던 공작 부인은 더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아직 어린 제 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비단 손수건으로 다정한 손길로 부드럽게 닦아 준 공작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느꼈던 그녀의 다정한 손길은 환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다시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옷차림이 그게 뭐니! 늘 단정한 차림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거늘! 너는 아직 교육이 필요해. 황후가 되었을 때 너는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게 될 거야. 응? 이졸데. 일어나거라, 어서!”
“어머니... 흑... 너무 아파요,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그때 두 배로 때리셔도 좋으니 제발...!”
“엄살 피우지 말래도!"
똑똑똑.
엘리자베스와 공작 부인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때는 엘리시움 공작이 직접 그녀를 훈육할 때뿐이었다.
공작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흑단나무 지팡이였으나 속은 납으로 가득 채워져 무척 무거웠다.
그것으로 '교육'을 받았던 날, 어머니는 엘리자베스의 뼈가 부러져 황후가 되는 데 트집이라도 잡히면 어쩔 생각이냐며 처음으로 공작에게 언성을 높였다.
엘리자베스는 제발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제 아버지가 아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부인, 들어가도 되겠소?"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이졸 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이제 막 침대에서 잠들었습니다."
공작 부인이 눈짓과 턱짓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침대로 가라 명령했다.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엘리자베스는 무릎걸음으로 후다닥 기어가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았다.
아버지의 지팡이에 다리가 부러졌던 날 이후, 어머니께서도 차마 아버지의 '교육'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가능하면 그녀의 선에서 끝내려는 편이었다.
제발 아버지께서 납득하시고 물러나길.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럼 잠시 얼굴만 보고 가야겠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더욱 퍼렇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