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재회(1)
하암.
레온하르트는 오늘따라 유난히 찌부둥한 몸을 쭉쭉 늘여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가 이상하리만치 넓게 느껴졌다.
마법은 제대로 발동된 건가?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묘하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마치 자신이 열다섯 무렵까지 지냈던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풍경에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말도 안 돼....’
정말 마법이 통한 건가? 아니면 어리석은 나를 벌하기 위한 마녀의 저주인가?
레온하르트는 단풍잎처럼 작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응?'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곧게 뻗은 마디 굵은 손가락, 두꺼운 책 세 권은 거뜬히 한 손으로 집을 정도로 커다랗고, 곳곳에 상처 자국이 남은 커다란 손은 어디로 갔지?
눈앞에 있는 건 평생 펜과 책, 어린이 용 목검이나 겨우 잡아 본 것이 분명해보이는 상처 하나 없이 뽀얗고 보들보 들한 손이었다.
'뭐야, 이 하찮은 손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불안한 동작으로 제 볼을 만져보았다.
포동포동, 말랑말랑.
수려하단 말이 잘 어울리던 우아하면서도 제법 단단하던 얼굴선은 어디로 가고 잘 부푼 빵 반죽처럼 말캉하고 부드러운 볼만 손바닥 가득 만져졌다.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 오다 이상할 정도로 낮아진 눈높이에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꼈다.
만약, 정말 마법이 시곗바늘을 돌리는데 성공했다면 분명 협탁 아래에 그만 의 표식이 있을 터였다.
'맙소사...!'
협탁 아래엔 그가 여덟 살 무렵 서툰 솜씨로 죽죽 그어 놓았던 그만의 표식이 남아 있었다.
'정말 마법이 성공한 건가?'
레온하르트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설렁줄을 당겨 보았다. 정말 그녀의 마법이 시곗바늘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면...
"황태자 전하! 기침하셨는지요. 바로 세숫물을 대령하겠습니다.”
그가 정식으로 성인이 되던 날 황태자궁을 떠났던 유모가 한달음에 나타났다.
유모와 시녀들의 손이 익숙하게 그를 씻기고 입히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비단 실타래처럼 가느다랗고 부들부들한 백금빛 머리칼, 그리고 선명한 자색 눈동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린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선이며 이제 겨우 길게 뻗기 시작한 팔다리, 근육이라곤 아직 드러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몸은 그의 기억에서 이미 잊혀진 지 무척 오래된 것들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레온하르트는 입술만 달싹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벌어졌다 다시 앙다물며 느껴진 입술의 감촉 또한 어린아이 특유의 보들보들하고 말캉말캉한 살갗 그대로였다.
1. 황후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후회를 하고
2. 시계탑의 마녀에게 부탁해서
3. 황후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다.
방의 모습과 유모의 존재, 그리고 협탁 아래의 표식 등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열 살 무렵의 어린 시절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그는 황후와 태중에서 맺어진 혼약을 파기해야 했다.
애초에 그녀가 황후가 되지 않는다면 전부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황태자가 아닌 다른 적당히 어울리는 사내를 만나 평범한 귀족 여식들처럼 살면 적어도 나를 대신해 죽을 일도 없을 거고, 어쩌면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
약혼 파기를 위해 선대 황제, 그러니까 지금은 아바마마 되는 이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레온하르트는 시녀가 가져온 예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예복,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이건 뭐지?”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싫으셔도 이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중요한 날?"
전하! 제가 어젯밤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오늘은 전하의 약혼자이시자 후에 황태자비이며 황후가 되실 영애를 처음으로 만나러 가는 날이니... 전하, 영애분의 이름은 기억하고 계시지요? 네?"
"엘리시움 영애?”
레온하르트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황후의 가문을 입에 올렸다.
그의 머리가 핑핑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왜, 왜 하필이면 오늘이지?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녀가 가져온 옷 앞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은 은발에 벽안이야. 이런 색보단... 이 색이 더 나아.”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가 가리킨 것은 짙은 남색 예복이었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제멋대로 황궁을 난장판으로 뒤집어 놓던 황태자 전하셨는데, 어쩐지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시녀는 그가 약혼녀의 이름은 물론 외모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남색 예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유모가 머리를 빗겨 주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고 있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날이라니!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묘소에는 얼씬도 말라는 일스 녀석의 말에 제대로 된 인사조차 못 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됐는데 황후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날이라고?'
“전하. 영애분의 이름이 어떻게 된다 하셨죠?"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잘하셨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애 분의 이름만큼은 꼭, 꼬옥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찌나 간절하던지 유모가 붙잡은 손이 얼얼하게 저릴 지경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이름만큼은 절대 까먹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젯밤 잠을 잘 못 주무시기라도 하셨나요? 어째 우리 전하 얼굴빛이 영 좋지 않아 보이시네....”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내 평생의 반려가 될 사람을 만난다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서 말이야.”
정확하겐 다시 만나는 것이지만. 레온 하르트는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대며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던 날과 그녀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거미줄 같은 머리칼이군."
"네까짓 게 황태자의 약혼녀? 황태자 비? 미래의 황후?"
“마음대로 해 봐.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처음으로 황태자 전하를 만났다. 전하께선 내 머리카락이 거미줄 같다며 질색하셨다.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물들이기 위해 마법사를 고용해야 한다며 아버지와 상의하셨다.]
...천하의 인간 말종 같으니!
레온하르트는 유모가 단정하게 빗겨 준 머리를 다시 흐트러트리며 탁자에 이마를 쿵 박았다.
아직 아이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의 힘은 기세 좋게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를 단단한 나무 위로 들이박았고, 유모의 비명 소리 이전에 레온하르트의 울음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공작저로 가는 마차 안에서 시녀들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팔뚝을 꼬집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유모 또한 그간의 내공으로 가까스로 참고 있을 뿐이지 일정한 간격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웃어.”
황태자 전하의 윤허가 떨어졌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조금씩 눈치를 보다 결국 저마다 허리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마에 하얀 반창고를 붙인 어린 황족 앞에서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유모는 그보다 조금 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우리 전하, 많이 아프셨지요? 전하께서... 영애분을 많이 생각하셨나 봅니다. 저희가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여...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리 오세요. 안아 드리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며 유모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대신 황태자의 시야를 가려 버린 유모는 황금빛 마차 천장을 노려보며 소리 없이 꺽꺽 폭소를 터트렸다.
'내 평생의 반려가 될 사람을 만난다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서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녀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이 정녕 전날까지 자식 팔아서 뭘 하려는 거냐 씩씩거리던 어린 황태자 전하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귀에 이어 눈까지 의심해야 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황태자 전하는 단단한 나무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어린이를 위한 책상이어도 그 어린이가 한 나라의 황태자라면 무엇이든 최고급이어야 한다.
따라서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은 무척이나 튼튼했으며, 그런 책상에 있는 힘껏 이마를 박은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기절하지 않은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였다.
시뻘겋게 물든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기껏 올렸던 앞머리를 다시 솜씨 좋게 내려 반창고를 가려 준 시녀들은 여기서 웃었다간 다음 날 해고의 의미로 목이 잘리는 게 아니라 황족 모욕죄로 정말 머리가 붙어 있는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 전부터 서로 옆구리를 꼬집어 주며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계속해서 황후와의 첫만남을 회상하며 후회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거미줄이라고 하면 안 돼. 거미줄이란 말만은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 차라리... 차라리... 뭐라 칭찬하면 좋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거미줄 같다느니 너 따위가 황후? 라며 잔뜩 비웃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유모의 따스한 품에 얼굴을 묻고 있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엔 황실 마차 창문이 그의 머리에 깨져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번에 만나게 된다면 어리석은 짓을 똑같이 반복하는 대신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부터 칭찬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적당히 그녀를 구슬려서 이 약혼을 없던 일로 만들면....
정말로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전하 표정 좀 봐. 아이라고 해도 역시 조금은 기대되시는 걸까?"
“너도 아침에 들었지? 반려라니... 기대가 아니라 설렘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쉿, 전하 깨시겠다. 어쩐지 오늘 같은 모습은 전하를 모신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아.”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 약혼을 없던 일로 한다면 황후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정 그녀를 사랑해 주고, 그녀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야 그는 왜 아바마마가 엘리시움 공작과 태중 혼약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거래를 해야만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황실과 초대 황후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공작위를 가진 가문만큼 한자리에 함께 세워 두면 어색하고 껄끄러운 사이도 없을 터였다.
서로의 눈치만 보며 행동하느니 적어도 표면상으로나마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과 엘리시움은 동맹을 맺었다.
가장 쉽고, 서로에게 아쉬울 것 없는 방법.
바로 황실과 공작가의 혼약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배 속에서부터 하나로 묶어 놨다는 게 막 황위를 이어받은 그에겐 얼마나 우습고 비참하게 느껴지던지.
어쩌면 황후에게 내보인 태도는 그에 대한 애먼 화풀이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아무 죄 없는 황후가 아닌, 황권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지 못한 아바마마와 자신이었다.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레온하르트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유모의 어깨에 비비며 눈을 감았다.
혼약을 파담을 내든 진행을 하든, 일단은 어린아이의 몸에 익숙해지는 일이 가장 급선무일 것 같았다.
완전히 잠들기 직전까지 그는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일 황후가 다시 억지로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황후나 왕비가 된다면?
아니, 아니다. 다 필요 없고.
결국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면?
마지막 질문에서 답을 내리지 못한 그는 계획을 바꿨다.
'확실한 미래를 바꾸자.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황태자비가 되고, 끝내 황후가 될 사람이다. 그 미래를 억지로 바꾸는 대신 내가 변하면 되는 일이야.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면 돼. 다만....’
레온하르트는 작은 심장이 아프게 팔딱거리는 것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떴다.
어른이 되며 사라졌던 양심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가슴 한편이 쿡쿡 찔렸다.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자격이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다시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깜빡이며 마음속으로 이제 곧 만나게 될 황후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무엇이든 하리라 맹세하겠어. 황후, 나의 황후.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이번 생에서만은, 이번 삶만큼은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