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
1화 어떤 황제 이야기
옛날 옛적, 어떤 황제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으로 자아낸 실처럼 아름다운 금빛이었고, 눈동자 속엔 아주 고귀한 제비꽃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황제님에겐 아름다운 황후님이 있었습니다.
황후님의 피부는 푸른 핏줄이 그림자 아래에서도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으며,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 보드랍고 하얀 비단실 같은 은빛 머리칼과, 여름 햇살 아래 부서지는 바닷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두 사람은 완벽한 한 쌍이었습니다.
그래요, 완벽했지요.
황후는 완벽한 황후였고,
황제는 그런 황후를 완벽하게 혐오를....
혐오? 아니지요.
사랑의 반대말은 혐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던가요.
황제는 황후에게 철저히 무심했습니다.
심지어 그녀가 제 몫의 독을 대신 마시고 죽어 가던 그 순간조차 황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황후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황후였습니까?"
그러나 황후는 유언의 답조차 듣지 못한 채 그렇게 죽었습니다.
모두에게 다정하고 상냥했던 완벽한 황후는 만백성들의 어머니이자 국모였습니다.
백성들은 당연하다는 듯 검은 상복을 입고 거리로 모여 나와 그녀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지요.
평생 그녀에게 무관심했던 황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눈 아래에 검은 재를 바르고 백성들의 앞으로 나타난 황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반려를 잃어 얼마나 슬프고 비통한지 눈물까지 흘리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 다들 그러하듯 백성들 앞에서 아주 껌뻑 넘어갈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평소 그가 황후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는 이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 황제의 그런 모습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황제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가 아끼던 반려견이 죽었을 때보다 무정하고 차가웠습니다.
“아깝게 됐군.”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황제의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것이 정녕 평생 곁에서 완벽하게 황후의 역할을 해낸 이에게 할 법한 말일까요?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깝다니요, 아깝다니요! 황후이기 이전에 폐하의 아내였습니다. 하나뿐인 반려였단 말입니다!"
제국의 재상이자 황제의 절친한 벗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분노했습니다.
"반려?"
황제는 처음 접하는 단어를 들었을 때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황제에게 황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여느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 또한 그토록 황후에게 무정하고 무심했던 황제가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볼까요.
그녀가 마지막 숨을 내뱉기도 전에 황제와의 독대를 청하더니.
"마침 황후마마의 여동생이 딱 혼기가 찬 나이인데....” 라며 파리처럼 손바닥을 연신 비비던 황후의 부모 되는 자.
당장 나라의 국모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자리를 자신의 딸로 채우려 드는 귀족들.
황후, 황비, 후궁전 끄트머리의 어딘가.
어떻게든 황제의 곁에 저들의 딸을 세우고 권력을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욕망 덩어리들 앞에서 황제는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부재를 실감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아주 잘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었거든요.
또 어느 날부터 황제는 서재에만 들어가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증상을 느꼈습니다.
독일까요? 누군가의 저주일까요? 아니면, 황후의 원한일까요?
황제께서 서재에만 들어가시면 두통을 호소하신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황궁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소문이 황궁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제국 전체로 퍼지기 전에 황제는 그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 불려온 제국의 가장 훌륭한 마법사와 사제, 그리고 현자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를 내놓았습니다.
“억울하게 숨을 거두신 황후마마의 원한 섞인 저주가 분명합니다."
황제의 몸에 성수를 끼얹으며 사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때아닌 감기만 걸렸을 뿐 여전히 두통을 느꼈습니다.
“너무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원인이 아닐까요?"
황실의 고문서들을 탐을 내던 현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황제는 현자에게 낡은 책을 주는 대신 아예 새로운 서재를 지어 그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래도 두통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감기가 다 나은 뒤에도요.
마지막으로 시계탑의 마녀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톡 건드리며 말했습니다.
"꽃이 바뀌었네요? 이런 꽃은 예쁘기는 해도 향이 너무 짙어 서재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평소 서재의 꽃은 누가 관리하지?"
"황후마마께서 직접 관리하시던 걸 잊으셨습니까?"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얼핏 지나가는 말로 향이 좋다며 앞으로 황궁의 꽃은 황후가 관리하라 명령을 내렸던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역겨움과 황궁을 가득 채운 지독한 꽃향기에 진저리치던 어느 날, 시종이 낡은 일기장을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황후마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황제는 음울한 표정으로 일기장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곳엔 우아한 글씨체로 적힌 황후의 일부가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황태자 전하를 만났다. 전하께선 내 머리카락이 거미줄 같다며 질색하셨다.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물들이기 위해 마법사를 고용해야 한다며 아버지와 상의하셨다.]
아직 서툰 티가 남아 있는 글씨는 황제와 황후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기를 마저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어린 황후의 기록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황제는 황태자비가 되기 전날 황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황태자비가 된다. 지긋지긋한 공작저도 이제 안녕이다. 전하께선 그동안 어떤 분으로 성장하셨을까? 내가 그분께 부끄럽지 않은 황태자비가 되어야 할 텐데....]
지긋지긋한 공작저. 황제는 저도 모르게 공감했습니다.
바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문제의 공작은 하루라도 빨리 황후의 동생을 후비로 맞는 것이 어떠하냐며 황제를 채근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선 무척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나는 완벽하게 첫 번째 공식 일정을 소화해 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실까? 전하께서도 이런 나를 기특하다 여기실까?]
첫 번째 공식 일정이 뭐였지? 황제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첫 번째 공식 일정이라 해도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황제에겐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황태자비였던 황후에겐 더없이 다행스럽고 기쁜 순간이었나 봅니다.
팔랑팔랑, 계속해서 페이지가 넘어갔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 황후마마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이 황실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던 분을 잃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황후마마에 이어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다. 슬픔에 젖을 새도 없이 나는 황후가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완벽한 황후가 되어야 한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일기를 넘겼습니다. 완벽한 황후라는 단어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완벽한 황후라며 칭송한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다. 이제 황실의 후계자만 낳아 드리면 나는 완벽한 황후가 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라고? 후계자를 낳고, 완벽한 황후가 되고 나면, 그다음엔?
[꽃병의 꽃을 새로 바꿔 보았다. 폐하께서 집중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향이 너무 짙지 않고 은은한 꽃 위주로 골랐다.]
왜?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굳이 한거지? 그런 일은 시녀들을 시켜도 충분한 것을.
[폐하께서 꽃향기가 좋다고 말씀하셨다. 원한다면 계속 꽃을 관리해도 좋다고도 허락하셨다. 조금 더 완벽한 황후에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다.]
대체 그 완벽한 황후가 뭐길래 지독하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폐하께서 직접 에스코트해 주셨다. 폐하의 손은 무척 크고 단단했다. 너무 두근거려 잠이 오질 않는다. 어의를 불러야 할까?]
아냐, 뭔가 아니야. 이건 아니야.
[폐하께 후처를 들이시라고 건의를 드렸다. 나는 괜찮다. 황실에는 후계가 필요하다. 완벽한 황후라면 후궁의 아이라도 포용해야 함이 마땅하다. 나는 괜찮다. 정말, 정말로 괜찮다.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다. 완벽한 황후가 아니어도 좋으니 행복해지고 싶다.]
황제는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했습니다. 일기장 속에 남아 있는 황후는 찌꺼기에 불과했습니다. 완벽한 황후가 되고 남은 인간의 일부 말이죠.
[시계탑의 마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행복해지는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 마법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황제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황후는 말 그대로 완벽한 황후였습니다.
끝없이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다잡고, 또 세뇌해 가며 만들어진 정교한 기계인형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황후가 아닌 그녀 자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어떤 목소리로 울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을 싫어했는지.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몹시 지친 표정으로 황제는 한참 동안이나 마른세수만 반복했습니다.
대체 그는 황후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걸까요?
이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히 풀어내기로 하고, 지금은 늦은 밤 호위 하나 없이 홀로 아무도 몰래 시계탑으로 향하는 황제에게 잠시 집중해 볼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나?"
시계탑의 마녀는 깔깔 웃었습니다. 이 늦은 밤 황제께서 친히 시계탑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 했더니,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코웃음과 함께 마녀는 황제에게 충언을 올렸습니다.
“후회는 이미 되돌릴 수 없기에 후회인 법입니다, 황제 폐하.”
그러나 황제는 다시 한번 시계탑의 마녀에게 애원했습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가능하지 않으냐. 제발, 나를 위해서가 아닌 황후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기회를 다오.”
마녀는 비굴할 정도로 자신의 발아래에서 애걸하는 황제를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노려보며 비웃었습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이 말이 대체 왜 있는 건지 황제께서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황후를 위해서'라는 말에 시계탑의 마녀는 웃음을 멈추고 고뇌했습니다.
“네 작은 행동으로 모든 미래가 바뀌어도 좋아?"
“설령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그녀가 행복하다면.”
“바뀐 미래에서 그녀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아?"
“그렇게 해서 그녀가 진정 행복해진다면.”
“정말로 그녀가 행복하길 원해?"
"대가로 나의 심장을 요구해도 좋다. 남은 내 수명을 전부 가져가도 상관없다. 그녀에게, 그녀가 다시 한번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다오.”
그제야 시계탑의 마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좋아. 대가는 이미 받았어. 리지는 행복해질 거야.”
마녀의 마법에 걸린 황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오랜만에 신을 찾았습니다.
'신이시여. 부디 한 번만 더, 어리석었던 나를 위해서가 아닌 그녀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더, 제발 기회를,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를 허락하소서.'
그리고 시계탑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