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 *
연예인들도 찾는다는 유명 메이크업숍, 그중 VVIP만 이용할 수 있다는 조용한 프라이빗 룸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하였다.
“후.”
세헌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건 고작 서너 달 전이었지만 서하가 승낙을 하자마자 그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세헌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세헌이 결혼하겠다고 하자 당장 결혼하라며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게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배경 때문에 서하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그녀를 배려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하는 결혼 전부터 세헌의 부모님을 무척이나 따르며 좋아했다.
그렇게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드레스를 고르고 사진 촬영을 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세헌과 서하의 결혼식 날이었다.
긴장한 듯한 서하의 옆으로는 여러 명의 스태프가 서 있었다.
얼굴과 머리를 매만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와 달리 서하는 그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신부님, 긴장 많이 되시나 봐요.”
스태프의 말에 그제야 멍했던 정신을 잡은 서하가 답했다.
“아, 티가 많이 나나 봐요.”
“하하, 네. 아무래도 결혼식이니까. 다른 신부님들도 긴장 많아하세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짧게 끝날 줄 알았던 헤어와 메이크업은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제 모습을 거울로 확인한 서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TV에서만 보던 예쁜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 속눈썹은 마치 인형처럼 길어져 있었고 눈가는 반짝였다. 코랄 빛에 입술과 볼은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예쁘게 올려묶은 머리 위에 얹은 티아라는 마치 그녀를 공주처럼 보이게 했다.
“와…….”
그저 탄성만 내지르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뜯어보던 서하를 향해 원장이 말했다.
“너무 예쁘세요! 이따가 드레스 입으시고 나가시면 신랑님이 보고 다시 반하시겠는데요?”
그 말에 민망한 듯 서하가 웃으며 답했다.
“감사해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서하를 향해 원장의 옆에 있던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드레스로 갈아입으시러 가볼게요.”
“네.”
스태프를 따라간 탈의실에는 얼마 전에 세헌과 같이 고른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진서하 신부님이죠? 드레스 입는 거 도와드릴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눈부신 자태의 서하가 나타나자 세헌은 그대로 굳어졌다.
가볍게 틀어 올린 머리와 몸 굴곡에 맞춰 예쁘게 떨어지는 드레스는 마치 동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공주 같았다. 자신을 보며 굳어 있는 세헌을 향해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그가 나직하게 숨을 터트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냈다.
“숨이 멎는 줄 알았어.”
그 말에 부끄러운 듯 서하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는 거죠?”
“아니, 아직.”
“그럼요?”
“구두 신어야지.”
세헌이 새하얀 구두 상자를 가지고 오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 바지 더러워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내가 신을게요.”
“내가 신겨 주고 싶어서.”
그가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서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응, 맞아.”
세헌의 손에 들린 구두는 그녀의 외할머니가 선물해주신 구두였다. 분명 망가져 있었는데 그의 손에 들린 구두는 마치 새것처럼 깨끗했다.
놀란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걸…….”
“소중한 구두인 것 같아서.”
서하가 그 구두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쯤은 세헌도 눈치채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주신 구두예요…. 제가 성인된 기념으로 선물이라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엄마랑 발 사이즈가 똑같았대요…. 망가져서 다시는 못 신을 줄 알았는데…….”
“이제 신어 보면 되겠네.”
덤덤한 얼굴로 그가 서하의 발을 잡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구두 안으로 그녀의 발을 집어넣었다. 딱 알맞게 서하의 발에 들어맞은 구두를 보며 그가 말했다.
“이제야 완벽하네.”
이토록 사랑받을 수가 있을까. 서하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가볍게 입술을 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세헌을 보며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세헌 씨…….”
“그럼, 갈까.”
그가 서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으며 그녀가 젖은 눈으로 웃어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정말…….”
“천만의 말씀을.”
세헌의 손을 잡은 채 그녀가 한발 한발 발을 뗐다. 드디어 새 출발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향한.
* * *
국내 최고의 호텔로 꼽히는 라움 호텔. 서하와 세헌은 조용히 소규모 예식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TA 그룹 회장님의 아드님 결혼식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유명한 정재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게다가 결혼식장은 소규모 예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화려했다. 평소 예식보다 서너 배는 많은 꽃으로 마치 정원처럼 꾸며놓았으며 두 사람이 걸어갈 길목은 꽃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부 대기실도 마찬가지였다. 온통 꽃으로 장식된 곳에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서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
익숙한 얼굴에 서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경호가 손을 내저었다.
“앉아 있어, 그냥 얼굴 보려고 왔단다.”
경호가 쭈뼛거리자 서하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여기 앉으세요.”
“…고맙다.”
자리에 앉은 경호가 서하를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참 예쁘구나. 네 친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무척이나 좋아했겠어.”
그 말에 서하의 가슴이 뭉클해지며 뜨거워졌다. 친엄마. 일찍 돌아가신 탓에 사랑받은 기억은 없었지만, 존재만으로도 서하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감사해요.”
“염치없게 내가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주고 싶었단다. 이제는 부디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구나.”
경호가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혼 축하한다.”
그 말 한마디에 서하는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경호를 아직 용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심을 내보이는 그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다. 억지로 눈물을 참아낸 서하가 경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아빠.”
잠시 후, 사회자의 식이 시작된다는 말과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삼중주로 이루어진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세헌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깔끔한 턱시도는 그의 넓은 어깨와 긴 다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세헌의 모습에 하객들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 옆에 서하가 있었다. 깔끔하게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머리에는 눈부신 티아라가 씌어있었고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내리깔린 눈꺼풀에는 속눈썹이 길게 뻗어 있었다. 게다가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마치 서하와 한 몸처럼 붙어서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결혼 아치에 나란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마치 영화 한 장면의 모습 같았다.
서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래서 소규모로 진행한다고 한 건데.”
“왜요?”
“너무 예쁜 건 나만 보고 싶거든.”
소유욕이 가득한 그 말에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욕심쟁이.”
“이제 알았으면 너무 늦었는데.”
때마침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신랑, 신부 동시 입장하겠습니다!! 신랑, 신부 입장!”
사회자의 말에 세헌이 잡은 서하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평생, 내가 죽을 때까지 네 옆에서 사랑만 줄게.”
“저도요.”
서하를 만나고 난 뒤, 세헌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대하던 그의 가슴에 사랑이란 감정을 심어준 것도 그녀였고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애정을 쏟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도 그녀였다.
“사랑해, 진서하.”
서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존감이라던가 자신감 같은 건 사치였던, 상처를 받은 제 마음을 보듬어주고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세헌이었다. 설영과 다미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서하가 본래의 자신이 모습을 되찾게 만든 것도 모두 세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옆에서 묵묵하게 그리고 한없이 사랑을 쏟아내던 그였다.
세헌은 진정으로 그녀가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세헌을 향해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휘며 말했다.
“사랑해요, 세헌 씨.”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입장하기 시작했다. 아주 행복하다는 얼굴로.
『기억을 먹는 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