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서하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온몸은 근육통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정신만은 또렷했다.
몸을 뒤척이자 하복부가 저릿하게 아파왔다. 지난밤, 세헌은 평소보다 격정적으로 그녀를 한계에 몰아붙였다. 서하 또한 그의 목에 매달려서는 계속해서 교성을 터트렸고.
몇 번의 절정을 맞이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감각들 때문에 실신하듯 잠이 들어버렸으니까.
“어쩌면 좋아…….”
서하가 살짝 고개를 내리자마자 온몸에 낙인이 찍히듯 남아있는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마치 자신의 구역이라도 되는 양 구석구석 찍혀 있는 자국들을 보며 그녀가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제 옆에 잠든 세헌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그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걷어 올리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자는 모습도 멋있네.”
무방비한 모습의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잠든 세헌을 바라보는 그녀가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툭 하고 터져 나온 속내에 서하가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행히 깊게 잠든 것인지 미동 없는 그를 보며 서하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세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가 침대 밑에 떨어진 가운을 챙겨 입고는 창가로 향했다. 아직 새벽녘이라서 그런 건지 어스름한 하늘이었지만 곧 해가 떠오를 것처럼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
서하의 기분은 싱숭생숭했다. 경호는 제게 용서를 빌었고 다미와 설영은 구치소에 있었다. 이제야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난 그녀였지만 마음만큼은 공허했다.
가족. 무척이나 가지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를 옥죄고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단어가 자꾸만 가슴에 맴돌았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그 단어가 야속하면서도 미웠다.
쓸쓸한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서하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따스하게 뒤에서 저를 감싸 안는 세헌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잠에서 깼어요. 세헌 씨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더 자지.”
“네가 옆에 없는데 잠이 올 리가.”
“방금까지 잘 자고 있었던 거 같은데?”
“네가 내 얼굴 보며 잘생겼다고 했을 때부터 깨어 있었는데.”
그 말에 놀란 눈으로 서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깨어 있었어요?”
“아까 그 말에서 하나 더 추가할게. 진서하가 깨면 나도 깨.”
능글맞은 그의 말에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곧 해가 뜰 것 같아요.”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볼을 비비며 답했다.
“그러게. 가끔 이런 것도 좋은데.”
“같이 해 뜨는 거 보는 거요?”
“응.”
세헌이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티 났어요?”
“말해 봐.”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서하가 입을 열었다.
“그냥 공허했어요.”
“공허해?”
“네. 아빠도 사과했고 새엄마랑 언니는 둘 다 벌을 받았고…. 이제 더는 고통 받을 일도 없어서 좋아해야 하는데…….”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쓸쓸하네요. 그토록 내가 원했던 가족이라는 모습이 이런 거였는지.”
“그건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세헌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일방적인 관계였지.”
맞는 말이었다. 설영과 다미를 그녀 혼자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네요.”
“이제는 진짜 가족을 만나면 돼.”
“진짜 가족이요?”
서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세헌 씨?”
최대한 자신답게 서하에게 프러포즈하겠다고 다짐했던 세헌이었다. 그 어떤 수식어나 꾸밈도 필요 없이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면 된다고. 그녀라면 그것을 더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을 그녀 앞에 고백할 시간이었다. 가장 그다운 방법으로.
그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 협탁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세헌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진짜 가족이 어떤 건지 네게 보여주고 싶어. 옆에만 있어도 의지가 되는, 얼마나 든든한 존재인지 네게 알려주고 싶어.”
덤덤하게 내뱉는 그 말이 서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가 천천히 서하의 옆으로 오더니,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네 가족이 될 기회를 줘.”
그가 상자를 열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서하의 마음을 크게 일렁거리게 했다.
“평생, 내가 죽을 때까지 조건 없는, 넘치는 애정이 뭔지 보여줄게.”
서하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덤덤하게 말을 하는 그의 애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게 뭔지 느끼게 해줄 테니까.”
세헌이 하는 말들은 빈말이 아닌 전부 진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정말로 그가 자신이 내뱉은 그대로 실천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
아스라이 토해내는 숨에 세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미 가득 젖어버린 서하의 눈을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줘.”
가족이 될 기회를 달라는 것이 결혼이었다니. 처음 느껴보는 전율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서하의 두 눈 가득 차 있던 눈물이 더는 못 참고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이건 언제 산 거예요…….”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정말.”
“그래서 대답은?”
하지만 온전히 저를 향한 세헌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더는 망설임이 없어졌다.
이 남자라면, 제가 사랑하는 이 남자라면 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그가 그토록 원하던 대답을 뱉어냈다.
“좋아요…. 정말.”
“반지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요. 세헌 씨가 주는 건데.”
조심스럽게 반지를 받아들고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예쁘게 휘는 서하의 모습을 보며 그가 말했다.
“반지 끼워줄까.”
“그런 건…. 물어보지 않고 끼워주는 거예요.”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진서하만 사랑할게.”
“저도 평생 세헌 씨만 사랑할게요.”
그가 서하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마치 원래 서하의 것이었다는 듯 손가락에 예쁘게 들어맞은 반지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데.”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고는 제게 당겼다.
평소와는 다른, 유난히 부드러우면서도 애틋한 키스였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키스에 서하는 애가 탔다. 더 해달라는 듯 그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의 반응에 세헌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짙은 키스를 퍼붓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뗐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 이제야 알 것 같아.”
세헌이 행복하다는 얼굴로 서하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괜스레 부끄러워진 그녀가 말했다.
“거짓말…….”
“보여줄까?”
“행복해서 미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요?”
“응, 행복해서 미친놈은 어떤지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데. 지금 당장 밖에 뛰쳐나가서 진서하랑 결혼한다고 소리칠 수도 있어.”
그 말에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인데.”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더 무서운 거 알아요?”
세헌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원하는 거 다 하면서 살게 해줄게. 그동안 못 했던 거 다 즐기면서 할 수 있도록.”
넘치는 그의 마음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는 말이었다.
서하가 해본 것보다 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자신과 함께라면 그녀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말만 해.”
세헌의 말에 감동한 서하가 손을 올려 그의 목덜미를 쓸었다.
“세헌 씨가 그렇게 다해주면 나는 뭘 해줘야 해요?”
“할 거야 많지.”
“어떤 거요?”
그가 부드럽게 입술 끝을 올리며 말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지금은 진서하가 내 말에 감동해서 키스한다든가.”
그러자 서하가 짧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손에 힘을 줘 그를 끌어당겼다.
“이렇게요?”
속눈썹이 드리운 눈 사이로 세헌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그래, 그렇게.”
조금 전까지 그렇게 붙어있던 입술이 다시 붙었다. 부드럽게 겹쳐진 두 입술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다. 마치 처음 맛보는 달콤한 것을 찾은 것처럼 두 사람의 입술은 한참 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