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62화 (63/70)

62화

* * *

일주일 뒤, 자신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서하는 멈칫했다.

“…아빠가 갑자기 전화를?”

경호의 전화에 그녀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혹시나 설영과 다미를 구치소에서 꺼내 달라고 하면 어쩌나였다.

“진짜 그러면 어떡하지.”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받지 않을까도 고민했지만, 어차피 마주해야 할 거면 빨리 마주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야 거절도 할 테고.

“여보세요.”

-서하냐…?

“네, 무슨 일이세요.”

일부러 딱딱하게 그녀가 말을 내뱉었다.

-다름이 아니라…. 바쁘지 않으면 잠시 만나고 싶구나.

“통화로는 하기 어려우신가요?”

-…직접 말하고 싶어서 말이다. 10분이라도 좋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자신을 붙잡는 듯한 경호의 목소리에 서하의 마음이 괜스레 약해졌다.

“10분이면 되는 거죠?”

-그래, 충분해.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때 만났던 카페로 내가 가마. 우 대표 집 앞에 있던 카페 말이야.

카페라는 말에 서하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긴 곳은 모두 카페였기에 트라우마가 생긴 듯했다.

“카페 말고…….”

카페 말고는 마땅히 만날 장소가 없었다. 식당에서 만난다면 같이 점심을 먹어야 했고 그만큼 오래 경호와 함께 있어야 했다.

“네, 거기서 만나요.”

-그래, 고맙다.

그녀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경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빨리 대화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현관을 나섰다.

서하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이미 경호는 커피를 시켜놓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하야.”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경호가 말을 이었다.

“고맙다. 시간 내줘서.”

“아니에요.”

서하가 경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가요.”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딱딱하게 말을 내뱉는 서하를 보며 경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렇게 변한 것은 자신의 탓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너도 잘 알다시피…. 네 엄마…….”

무심결에 튀어나온 엄마라는 단어에 경호가 멈칫하자 괜찮다는 듯 서하가 말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그래…. 그 여자랑 다미는 구치소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다미는 제 엄마보다 더 중형을 받을 것 같아.”

알고 있다는 듯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헌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사기, 금품을 횡령한 설영보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다미가 당연히 죗값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네게…….”

혹시나 경호의 입에서 그 두 사람을 선처해달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무서웠다. 서하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이 늦었겠지만…. 제대로 사과하고 싶구나.”

사과를 하고 싶다고? 서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일은 내 무관심으로 벌어진 일이니까…….”

애초에 자신이 설영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결혼했어도 지속적으로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서하를 돌봤더라면 이렇게까지나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경호는 생각했다.

“내 잘못이야. 그동안 방임하고 방관한 내 잘못이란다.”

고개를 떨군 경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단다. 면목 없지만, 그저 잘못을 구하고 싶었다.”

“…아빠.”

“네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어.”

경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는 서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경호는 울고 있었다. 진심으로 참회하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지했단다…….”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호의 모습에 서하의 마음이 아파져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제가 겪은 일들은 아무리 경호가 진심으로 참회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아빠…. 마음은 알겠어요.”

“서, 서하야…….”

“하지만 지금 당장 용서하지는 못하겠어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마음만 알아주면 그걸로 충분해.”

“아니….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어쩌면 평생 아빠를 용서 못 할지도 몰라요.”

그만큼 상처가 컸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괜찮다. 용서 안 해도 좋아. 그저 마음을 알아준 것만으로도 난 감사하단다.”

경호가 눈물을 훔치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제는 네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더는 상처받지 않고 원하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전부 누리면 좋겠어.”

그가 꺼낸 것은 바로 통장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통장을 내민 경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어릴 적에 만들어둔 통장이야. 이번에 집을 처분하고 정리하면서 생긴 돈을 넣어뒀단다. 내가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저는 돈이 필요…….”

“내 마지막 부탁이다.”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경호를 그녀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서하가 자신의 앞에 놓인 통장을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통장을 연 서하는 큰 액수에 놀라고 말았다.

작은 집 하나는 살 수 있는 금액을 보며 서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경호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통장에 담았다는 사실을.

“이거…. 아빠 전 재산 아니에요?”

“이제는 나한테 필요 없는 돈이야. 다 부질없는 돈이지.”

“저는 이거 못 받아요.”

통장을 내려놓는 서하를 향해 경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부탁이야…. 내 마지막 부탁. 이 돈으로 지난날 못해본 거 다 해보고 원하는 거 다 해봤으면 하는 내 마음이다.”

간절한 경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조용히 통장을 바라보았다.

“…이러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아빠를 용서할 수가…….”

“이걸로 용서받을 생각 없다. 거저 주고 싶었을 뿐이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애꿎은 입술을 꾹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아낸 서하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경호가 말했다.

“그래. 이제 내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어서 가 보거라.”

가보라는 말에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는 경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건강하세요. 잘 지내시고요.”

“그래.”

서하가 자리를 떴다. 카페에 혼자 남은 경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벌을 받는 거지, 나도.”

그렇게 한참을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카페에 앉아있던 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에게 용서를 빈 것만으로도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카페를 나서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진 대표님.”

“우 대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경호를 향해 다가온 세헌이 입을 열었다.

“서하와 이야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네. 우 대표한테도 진즉에 사과해야 했는데…. 그동안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내 불찰이 큽니다.”

“아닙니다.”

경호의 시선이 세헌을 향했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서하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시지 않게끔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헌이라면 진정으로 서하를 아끼고 사랑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맙습니다, 우 대표.”

“그나저나 재산을 다 정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묻는 그를 향해 경호가 말했다.

“아직은 계획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장 관리직 일을 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옛 진성 건설의 동료 분들과요.”

“현장 관리직 말입니까?”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세헌의 배려였다. 늙은 경호가 당장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이렇게나마 자신의 회사에 경호를 데리고 있음으로써 나중에 서하가 마음이 풀린다면 언제든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진 대표님께서 와주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만.”

경호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 세헌이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우 대표.”

자신에게 기회를 준 세헌을 향한 고마움과 서하를 향한 미안함으로 한동안 경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약속도 없이 백화점 가는 건 오랜만이네? 뭐, 서하 씨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도 사려는 거야?”

도윤이 운전을 하며 묻자 세헌이 입을 열었다.

“서프라이즈라면 서프라이즈지.”

“오, 뭐 사려고?”

“반지.”

그의 입에서 간결하게 뱉어진 “반지”라는 단어에 도윤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반지? 반지?! 너 설마, 서하 씨한테 프러포즈라도 하려고?!”

크게 놀라는 도윤을 향해 세헌이 딱딱하게 말했다.

“왜.”

“왜라니! 우세헌이 프러포즈를 한다는데 내가 안 놀라?!”

“네가 왜 놀라는데.”

도윤이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그래도 나 네 오랜 친구고 가장 최측근인 비서인데! 그래서 반지 고르러 가는 거야? 프러포즈용 반지?!”

세헌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갈래! 가서 같이 고르면…….”

“내 여자한테 선물할 걸 네가 왜 같이 골라.”

“아니, 같이 고르면 더 예쁜 걸 고를 수 있잖아? 조언을 해주려는 거지!”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 서운한 듯 도윤이 외쳤다.

“가만히 있으라면서 필요할 때는 그렇게 찾냐!”

“시끄러워, 배 비서.”

“참나. 예, 예. 배 비서는 이만 퇴근하겠으니 혼자서 잘 고르시길 바랍니다.”

장난스럽게 굽신대는 도윤을 향해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는 세헌이 몸을 돌렸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그가 곧장 향한 곳은 명품 액세서리 매장이었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이 진열장 안에서 그를 보며 빛을 냈지만, 세헌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도움 필요하신가요?”

“프러포즈용 반지, 볼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직원이 서둘러 반지들을 꺼내 보였다.

“이 제품은 이번 시즌 신상인 제품이고…. 이 제품은…….”

진열장 위로 즐비하게 꺼내놓은 반지들을 살펴보던 세헌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깔끔한 로즈골드 링에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빛을 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심플한 것이 서하에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세헌이 단번에 손가락으로 그 반지를 가리켰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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