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61화 (62/70)

61화

* * *

신호등의 빨간불을 보는 세헌의 시선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신호등 색이 바뀌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세헌이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끌어내렸다.

서하가 다쳐서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어떻게 회사에서 나와서 차를 탄 건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제길.”

울컥거리며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서하가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 중인 건지. 왜 자꾸만 그녀가 다치는 일이 생기는 건지 답답했다.

신호등의 불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자 세헌이 거침없이 액셀을 밟았다.

생각은 나중에 해야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서하의 상태였으니까.

이내 세헌의 차가 병원 주차장에 급하게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며 쏜살같이 튀어나온 그가 뛰기 시작했다.

응급실로 뛰어간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호사를 향해 물었다.

“진서하, 진서하 씨 어딨습니까.”

“진서하 씨라면 저쪽에.”

간호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으로 세헌의 발이 움직였다.

칸막이 대신 쳐진 하얀 천을 걷어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서하가 보였다. 머리에는 새하얀 붕대를 댄 모습을 보자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절망적인 얼굴로 세헌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진서하…….”

그의 부름에도 서하는 대답이 없었다.

다행히도 지난번처럼 병실로 바로 옮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세헌의 놀란 심장은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날 피 말리게 하려는 거야.”

대체 그 짧은 찰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렇게 매번 가슴 졸이고 애가 타는 거라면 차라리 서하를 제 옆에 붙여놓고 데리고 다니고 싶었다. 어딜 가든 제 눈이 닿는 곳에 그녀가 있을 수 있도록.

세헌이 일그러진 얼굴로 잠든 그녀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서하는 세헌의 요청에 따라 VIP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에서 서하의 손을 잡은 채 심각한 얼굴로 굳어 있던 세헌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세헌의 뒤를 뒤따라온 도윤은 정신없는 그 대신 담당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서하 씨, 머리가 찢어져서 피가 난 거지 뇌출혈은 아니래. 그리고 가벼운 뇌진탕이랑 손목 골절이라고 하는데…….”

“가벼운 뇌진탕인데 왜 안 깨나는 건데.”

“곧 깨어날 거래. 걱정하지 마. 입원 수속은 다 해놨어.”

도윤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서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모녀가 쌍으로…. 하, 욕이 나오네.”

설영이 구치소에 있기에 다미의 존재는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간과한 것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미친 여자일 줄은 진짜 몰랐어.”

진저리난다는 듯 말하는 도윤을 향해 세헌이 입을 열었다.

“진다미는.”

“몰라, 신고하면서 나도 사람 풀어서 찾아보고 있는데 연락이 없어. 작정하고 숨은 거 같아. 뭐, 피해자가 TA 그룹이랑 관계된 사람이라고 경찰 윗선에 살짝 흘렸으니 금방 잡힐 거야.”

“그래야지.”

조소가 스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모녀끼리 오붓하게 감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네.”

제대로 값을 치르게 할 셈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인미수. 감옥에 있기에는 그게 딱 좋지.”

몇 시간 후, 서하의 옆에서 지쳐 잠이 들었던 세헌은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저기…….”

제 머리 위에서 나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자 언제 일어난 것인지 상체를 반쯤 세운 채 누워 있는 서하가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뭐라고?”

“누구신데…….”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누구세요, 라니. 설마 서하가 다시 기억을 잃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자 세헌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듯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서하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잘생겼지?”

“…뭐?”

엷게 미간을 구긴 채 묻는 세헌을 향해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애인이라서 그런가?”

“…진서하.”

그녀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걱정 많이 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미안해요.”

“사과하라고 한 말 아니야.”

서하가 기억을 잃은 척했다는 것을 깨닫자 그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어디 아픈 곳은?”

“음, 없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요?”

“솔직하게 말해.”

“음…. 그냥 손목이 살짝 욱신거리는 정도?”

서하가 붕대가 감긴 손목을 들어 보이자 그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골절이야. 당분간은 손목 쓰면 안 된대.”

“아…. 그럼 세헌 씨가 다 해주는 거예요?”

뭘 다해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해달라는 건 세헌은 다 해줄 수 있었다.

“말만 해. 뭐든 다 해줄 테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뭐 해 달라고 말할 줄 알고요?”

“뭐든 상관없어.”

“나 버릇 나빠지면 어떻게 해요?”

“오히려 좋은데.”

서하가 손을 뻗어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고마워요.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서.”

희미하게 웃는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세헌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헌이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그동안의 격렬했던 키스와는 다른 부드럽고도 온화한 키스였다.

천천히 입술을 뗀 세헌이 나직하게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퇴원하면 각오해 둬. 지금 키스로 끝내고 남은 거 다 할 거니까.”

* * *

“죽었겠지. 죽었을 거야. 죽었을 건데…….”

쪼그려 앉아 중얼거리는 다미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말하는 그녀는 실성한 사람 같았다.

“애초에 모든 일은 그 계집애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히스테릭한 음성으로 다미가 말을 이었다.

“그년 때문에…. 그래 진서하 그년 때문에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고…!”

서하를 계단에서 밀친 다미는 그대로 도망치듯 카페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집에 들어갈까 고민하던 다미는 덜컥 겁이 났다. 경찰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건 무섭지 않았다. 서하를 다치게 했다는 말이 경호에게 들어가서 돈 한 푼 없이 집에서 내쫓기게 되는 것이 더 무서웠다.

처음에는 호텔로 향했지만 다미가 내민 카드를 보며 직원이 정지된 카드라고 말하자 치욕스러움에 뛰쳐나온 그녀였다.

갈 곳 없던 다미가 가방 속 현금을 탈탈 털어서 향한 곳은 이름은 호텔이었지만 모텔이나 다름없는 숙박 업소였다.

5성급 호텔이 아닌 모텔에는 처음 와 보는 다미였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5성급이 아닌 호텔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카드도 정지가 된다니. 하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다미는 항상 풍족했으며 돈이 없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자신에게 돈이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침대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다미가 중얼거렸다.

“내일 집에 가서 독립하겠다고 하고 돈을 받아야겠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건 다미도 마찬가지였다. 설영이 주는 돈을 쓰기만 할 줄 알았지 직접 돈을 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다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동안 설영이 모아놓은 돈들은 다 빼앗긴 상태였고 우선 자신이 쓸 돈을 확보해야 했다.

“아니, 지금 가서 아빠한테 당장 돈을 달라고 할까? 그 계집애 소식 듣기 전에 돈을 받는 게 좋잖아?”

중얼거리던 다미가 문에서 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진다미 씨?! 문 열어보세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쿵쿵 문을 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다미가 움찔거렸다.

“누, 누구신데 문을 열라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경찰입니다.”

“…경찰, 경찰이요?”

“문 여세요!”

강압적인 말투에 겁에 질린 건지 다미가 뒷걸음질 쳤다. 돈도 받질 않았는데 이대로 경찰에 끌려갈 수는 없었다.

“잘못, 방 잘못 찾았어요!!”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방 잘못 찾으셨다니까요?!”

“저희한테 키가 있습니다. 안 열어주시면 이대로 열겠습니다.”

일순간 다미의 표정이 멍해졌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병원에 있던 세헌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다미가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도주할 우려가 있어서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그가 나직하게 도윤을 불렀다.

“배도윤.”

“왜, 왜. 진다미 잡힌 거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붙일 수 있는 죄는 다 갖다 붙여서 다시는 진서하 주위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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