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 *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새하얀 조리복을 입은 중년 여성의 말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답했다.
“고생하셨어요.”
대여섯 명의 사람 중에는 서하도 있었다. 조리도구를 분주하게 정리하던 그녀를 향해 조리복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
“서하 씨, 이제 본격적으로 제과 제빵 배우기로 했다면서요?”
“네. 지난번에 클래스 듣는 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한식 클래스도 많이 좋아했는데 아쉽지만…. 이젠 하나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그래요. 원데이 클래스도 있으니 언제든 들으러 와요.”
서하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짐을 챙긴 그녀가 상쾌한 표정으로 학원 밖을 나섰다.
지잉. 지잉. 가방에서 울리는 진동에 서하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세헌 씨인가?”
항상 학원이 끝날 때쯤 전화를 걸던 그였기에 그녀가 반가운 마음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다미 언니.]
휴대폰을 쥔 서하의 손이 작게 떨렸다. 평소라면 진즉에 거절을 눌렀을 터였지만 그러질 못했다.
설영이 구치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기도 했고 경호가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더욱 그랬다.
계속해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운 정도 정이기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나 들어보자며 받은 전화였다.
“여보세요.”
-… 진서하.
“네. 말씀하세요.”
-지금 만나. 우세헌 집 앞이니까 나와.
집 앞이라니. 학원을 끝내고 집 가는 길이었던 서하는 꼼짝없이 다미와 맞닥트려야 했다.
‘그래,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못 박아둬야지. 이제는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해.’
더는 만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한 그녀가 답했다.
“기다리세요.”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서하의 눈에 멀리 서 있는 다미가 보였다. 가만히 서 있지 못한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다미는 서하가 코앞에 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왜 부르셨어요.”
서하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다미가 고개를 돌렸다.
“야.”
“네, 말씀하세요.”
“하, 여기서 말하라고? 길바닥에서?”
다미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서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세헌의 집 앞에서 민폐를 끼치기는 싫었다.
“따라오세요.”
“뭐? 야, 야!”
뒤에서 다미가 자신을 불렀지만, 서하는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워낙 소란을 많이 피운 탓에 다미를 데리고 다시 그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언젠가 요리 학원이 끝나고 오는 길에 봐뒀던 작은 카페를 떠올렸다. 아담하지만 2층짜리 카페였다.
“야, 어디까지 가는 거야!”
“다 왔어요.”
카페에 먼저 들어선 서하가 커피 두 잔을 시켰다. 그녀의 뒤에선 다미가 팔짱을 낀 채 카페인을 훑으며 비아냥거렸다.
“지 같은 곳만 골라왔네.”
“먼저 올라가 있으세요. 커피 가지고 갈 테니까.”
잠시 그녀를 위아래로 훑던 다미가 휙 하고 돌아서서는 먼저 2층으로 향했다.
“후…….”
서하는 잠시 후회했다. 괜히 만난 것은 아닌지 하고.
“아니지. 이제는 그 옛날 진서하가 아니야.”
결심한 얼굴로 그녀가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었다. 작은 카페여서 그런지 계단이 가팔랐다. [계단 조심]이라고 적힌 글씨를 보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다미가 보였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서하가 자리에 앉았다. 쟁반 위에 올려진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다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아메리카노야? 아인슈페너 이런 거 없어?!”
가볍게 다미의 말을 무시한 채 서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찾아오신 용건이 뭔가요?”
“야!”
“용건 없으시면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뭐, 뭐?!”
분노로 붉어진 다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너 지금 나한테 감히…….”
“네, 감히 말하는 데 용건 말씀하세요.”
다미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는 예전의 서하가 아니었다. 어딘가 독해진 서하의 모습에 멈칫하던 다미가 한발 물러섰다.
“너, 너! 엄마 구치소 들어간 거 알고 있지? 그거 다 너 때문이잖아. 게다가 아빠는 이혼까지 한다고 난리야. 그동안 엄마가 너한테 해준 게 있는데! 양심이 있으면 가서…!”
“양심?”
누가 누구한테 양심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지. 서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단어는 언니랑 새엄마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뭐?”
“그리고 새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있다고요? 아, 설마 해줬다는 게 정서적인 학대도 포함인 건가요?”
“하, 너 이제 막 나가기로 했나 봐? 왜? 우세헌이 옆에 있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서하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네, 세헌 씨가 옆에 있어서 뵈는 게 없네요. 그래서 부럽기라도 해요? 언니?”
다미의 손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야…….”
“그리고 새엄마가 구치소에 들어간 건 제 탓이 아니라 당신 탓이에요. 그동안 나쁜 짓 하신 죗값을 치르시는 거잖아요.”
“죗값? 너 지금 죗값이라고 했어?!”
“네.”
단호한 그녀의 말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미가 소리를 질렀다.
“야!!”
“소리 지르지 마세요. 여기 공공장소거든요.”
“입 다물어.”
이전과는 180도 바뀌어버린 서하의 모습에 다미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협박도 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 말을 받아치는 서하 때문에 다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이었다.
다미가 핏대를 세운 채 말을 이었다.
“마지막이야. 당장 가서 구치소에서 엄마 꺼내오고, 아빠 이혼 못 하게 해.”
“제가 왜요?”
제게 바짝 엎드려서는 빌어도 모자랄 판에 왜요? 라고 반문하는 서하를 보자 툭 하고 다미의 이성이 끊겼다.
“미친 계집애!”
찰싹.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다미는 씩씩거리며 손을 올리고 있었고 서하의 고개는 돌아가 있었다.
“하…….”
한숨을 내뱉으며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볼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서하가 욱신거리는 볼을 매만지려던 찰나 다미가 거칠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윽!”
“네가 다 망가트렸으니…. 다시 되돌려놔.”
“놔요!”
서하가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다미는 그녀의 머리채를 더욱 힘껏 잡아당겼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우악스럽게 잡고 흔드는 탓에 서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다미의 손아귀에서 서하가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쓸수록 머리만 더 흔들릴 뿐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해놓으라고!!”
“싫어요!”
“싫다고?!”
다미가 이를 악물고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이내 계단 앞까지 서하를 끌고 온 다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죽어. 너만 없으면 다 해결될 테니까.”
죽으라니. 서하가 멈칫하던 그때, 다미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는가 싶더니 있는 힘껏 두 손으로 밀었다.
쿠당탕 탕탕. 서하의 몸이 그대로 가파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실성한 듯 웃던 다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 * *
세헌이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무슨 일이지.”
요리 학원이 끝났을 시간이었지만 서하가 전화를 받질 않았다. 항상 이 시간에 그녀와 통화를 했던 세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대표실에 들어온 도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헌을 보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전화를 안 받아.”
“누가? 서하 씨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뭐 하느라 안 받을 수도 있지. 너 그러다가 나중에 의부증…….”
도윤의 말을 무시한 채 세헌이 휴대폰을 들었다. 도윤의 말처럼 다른 일을 하느라 못 받을 수도 있겠다며 기다리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마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세헌이 다시 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런데 서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세헌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혹시 진서하 씨 보호자 되십니까?
보호자라는 표현의 의아함을 가진 것도 잠시 세헌이 답했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119 구급대원입니다. 진서하 씨가 다치셔서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그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철렁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멈춘 듯했다.
병원 이송 중이라니. 굳은 표정으로 그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어느 병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