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59화 (60/70)

59화

* * *

2주일 뒤, 서울 구치소.

“617 홍설영 씨 면회 오신 진다미 씨는 3번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다미가 그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다미가 딱딱한 면회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 내가…. 이런 곳에 올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 건지 다미가 연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철제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소리에 다미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강화유리 너머로 향했다.

“엄…. 엄마?”

낯선 모습으로 교도관과 함께 걸어들어온 설영을 보며 다미가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다미야…. 흐으윽, 내 딸.”

자신을 보자마자 흐느끼는 설영을 보며 다미가 움찔거렸다.

“엄마…. 얼굴이 왜 그래? 머리는 또 왜 그렇고…….”

화장기 없는 얼굴 때문인지 처진 피부와 거멓게 핀 검버섯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게다가 힘없이 늘어지고 푸석한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설영을 10년 정도 더 늙어 보이게 했다.

설영이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너무 끔찍해서 보기 싫어.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메이크업도 못 받고 헤어 스타일링도 못 하고…. 옷도…. 이런 쓰레기 같은 옷만 있단다.”

견디지 못하겠는지 설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니? 응? 다미야, 엄마는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엄마는 지금쯤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호텔에서 티 타임 가져야 하는데.”

절망감과 독기가 뒤섞인 설영의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구치소에 들어왔다니까 사람들 태도가 싹 바뀌는 거 있지?

설영이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모두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서하와 결혼하기 위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도민도 설영이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 후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 망할 계집애. 진서하, 그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모든 걸 다 가지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년 때문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엄마 그렇게 만든 그 계집애…….”

“그래, 다미야. 그년한테 가서 당장 날 꺼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

“응, 내가 오늘 찾아가서 말할 거야. 당장 엄마 꺼내놓으라고!”

그 말에 진정이 된 건지 설영이 조금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 딸. 착하기도 하지. 엄마는 우리 다미만 믿는 거 알지?”

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엄마, 아빠는 왔었어?”

아빠라는 단어에 설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말도 꺼내지 마렴. 여기까지 변호사를 보내서 이혼하겠다고 한 사람이니까.”

“뭐? 아빠가 이혼하겠다고 했어?!”

“그래,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 제 딸 맡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끔찍하게 챙기는 척하더라. 하, 내가 기가 막혀서는.”

다시 생각해도 경호의 태도가 어이가 없는 건지 설영이 중얼거렸다.

“믿을 건 핏줄밖에 없어.”

“아빠가 갑자기 왜 이혼하자고 한 건데?!”

“몰라.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

“엄마. 안 되겠어. 진서하, 그년 만나기 전에 아빠부터 만나야겠어. 만나서 설득하고 올게. 엄마가 구치소에 있는데 이혼이라니 아빠도 너무하잖아.”

설득하겠다는 다미의 말에 설영이 가로막힌 강화유리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럴래? 그래! 다미야. 가서 아빠보고 이혼,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해. 엄마만 한 사람 없지 않냐고.”

“응, 알겠어.”

다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설영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역시 우리 딸이야. 엄마는 다미밖에 없는 거 알지?”

“엄마, 다시 올 때는 꼭 꺼내줄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는 다미를 설영이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아 참, 다미야! 영치금 좀 넣어줄래?”

* * *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다미가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그 계집애가 다 망쳐놨어. 우리 엄마도, 가족도, 모두!”

경호가 이혼을 요구했다니. 다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애교를 피워도 자신과 말을 섞지 않는 경호를 보며 의아해하긴 했지만, 설영이 구치소에 들어가서 우울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혼? 생각할수록 아빠도 너무하네. 엄마가 구치소 들어가자마자 이혼을 해달라고 해? 가뜩이나 힘든 사람을!”

분노와 복수로 감정이 격양된 다미는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

집에 들어서자마자 다미가 경호를 찾기 시작했다.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다미가 안방 문을 벌컥 하고 열었을 때, 경호는 조용히 보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아빠, 왜 집에 있으면서 대답을 안 해요?”

경호가 껄끄럽다는 듯 다미의 시선을 피한 채 답했다.

“못 들었어.”

“못 들었다고요? 제 목소리를 정말 못 들으셨다고요?”

그렇게 외치고 다녔는데 못 들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말이 되는 소리냐며 목소리를 높였을 터였지만, 상대가 경호이기에 다미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렀다.

“신문 보시느라 그러셨구나.”

가식적으로 눈꼬리를 휘며 그녀가 경호를 향해 다가섰다.

“무슨 일이냐.”

딱딱하게 묻는 경호의 맞은편에 앉으며 다미가 입을 열었다.

“오늘 구치소를 다녀왔어요. 가서 엄마 만나고 왔어요.”

“…그래.”

“엄마가 너무 딱한 거 있죠? 고작 며칠 구치소에 있었다고 얼굴도 푸석푸석해지고 바짝 마른 것 같아요…….”

다미가 흘끗 경호를 곁눈질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설영의 이야기에 꽤 동요하는 듯했다.

“아빠…. 저 들었어요. 엄마랑 이혼하신다고 하셨다면서요. 대체 왜요? 엄마 구치소 들어갔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미가 말을 이었다.

“엄마가 집안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빠도 잘 아시잖아요…. 맨날 아빠랑 서하만 생각하던 엄마였는데…….”

그 말에 경호가 탁한 숨을 내뱉었다.

“…네 엄마가 서하를 생각했다고?”

“그럼요! 엄마가 서하를 딸처럼 얼마나 예뻐했는데요.”

순식간에 경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다미가 서하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설영이 구치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그런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던 경호였다. 하지만 설영이 서하를 딸처럼 아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경호는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다미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정말 딸처럼 아꼈다고 생각하는 거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다미를 향해 경호가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그래서 너도 서하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서 그렇게 심부름을 시킨 거고?”

“…네?”

“다 알고 있다. 네 엄마와 네가 서하에게 한 짓을.”

경호의 말에 다미의 두 눈이 커지더니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몰라서 물어?”

“아빠? 그게 아니라…….”

“네가 그동안 서하를 시켜서 쇼핑하고 괴롭혔다는 거, 내가 평생 모를 거로 생각한 거냐.”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다미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하가 그래요? 하하, 아빠 서하랑 오해가 있었나 봐요. 저는…….”

경호가 딱 잘라 말했다.

“네 엄마도 인정했다.”

“…엄마가 인정했다고요?!”

“그래.”

다미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주먹이 쥐어졌다.

“엄마가 오해가…….”

“됐다. 더는 이야기 하기 싫다. 네 엄마랑은 이혼할 거다.”

“…아빠!”

“이 집 팔고 독립할 돈 마련해 줄 테니.”

“지금… 저보고 나가라는 소리세요?!”

그 물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경호를 보며 다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그래. 더는 내가 견디기 힘들구나. 이제는 너도 성인이고 혼자 살 수 있으니 잘살아 보아라.”

다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 안 나가요. 엄마랑 아빠 이혼도 못 하게 할 거고요.”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로 다미가 말을 이었다.

“아빠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동안 엄마한테 다 맡겨놓고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예요?! 고작 서하 말만 듣고 이러는 거예요?!”

“고작 서하 말이라니! 그동안 네 엄마가 한 짓을 보고도 몰라?!”

“그건…!”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다미는 정확하게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런 다미를 보며 경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할 말 없으니 나가 보거라.”

송장처럼 서 있던 다미가 입술을 꾹 문 채 몸을 돌렸다. 방에서 나온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설영이 구치소를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서 이혼까지 당할 줄은. 행복하던 모든 일상이 다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서하라고 생각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다 망가트렸어…. 그 계집애가.”

섬뜩하게 뜨는 눈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죽여버릴 거야, 진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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