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 *
조용한 카페 안.
경호와 서하는 마주 보고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는 빠르게 식어갔다.
무거운 침묵에 목이 탄 서하가 커피잔을 들던 순간, 경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해서 미안하구나.”
경호의 말에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연락이 오실 줄 알았거든요.”
“내가?”
“네. 새엄마 일로 절 만나자고 하신 거 아닌가요?”
멈칫하며 놀라는 기색을 보이던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엄마가 고소를 당했다.”
고소를 당했다고 말했음에도 서하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 얼굴을 보며 경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너와 관련이 있는 거냐.”
“네.”
서하의 입에서 나온 “네.”라는 소리에 경호는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설영과 다미가 그냥 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서하가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대체 왜, 설마 우 대표가 그러라고…….”
“세헌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선택한 거예요.”
“네가, 선택했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한 경호를 향해 서하가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벗어나고 싶었으니까요. 새엄마와 이복 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경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단 한 번도 서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빠는 모르셨겠죠. 아니, 신경을 안 쓰셨죠. 제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말이에요.”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 단 한 번도 진짜 딸, 동생인 적이 없었어요. 지금까지 차별과 학대를 받으며 자랐으니까요.”
“네 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고…….”
“철저하게 연기를 했으니까요!”
답답한 마음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철없이 백화점에서 돈을 펑펑 써댄다고 생각하셨죠? 쇼핑에 환장한 애로 보이셨겠죠. 그런데 전 단 한 번도 제 옷을 산 적이 없어요. 제가 산 건 모두 다미 언니의 심부름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경호의 기억 속에 서하의 옷은 늘 한결같았다. 항상 같은 가방을 메고 다녔고 옷이나 신발 또한 항상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결혼이요? 그것도 새엄마가 강제로 진행한 거였어요. 진성 건설을 위해서 하라고 했어요. 그때까지는 가족이라고 생각했기에 집안을 위해서 한다고 했어요. 바보같이.”
서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다섯 살이었어요. 제가 새엄마와 다미 언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게. 제가 잘나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다미 언니보다 뛰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 어린 나이에 깨우쳤어요. 내가 잘나면 새엄마는 날 더욱 괴롭힐 테니까.”
울분을 토해내듯 그녀의 입에서 말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노력해도 새엄마나 다미 언니의 마음에 들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깨달았어요. 난 그들에게 가족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철저하게 이용당했음을.”
“…이용이라니?”
“강원도에 있을 때, 새엄마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새벽 비행기로 떠날 테니 알아서 잘살고 있으라고.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빠랑 새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착신이 금지된 번호라고 하더라고요.”
분명 설영은 경호에게 서하가 남고 싶다고 했다고 했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경호를 향해 서하는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바로 본가로 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는 새엄마 빚쟁이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절 붙잡고는 새엄마는 어디 갔냐고 따지셨어요. 그러다 한 분이 절 밀치셔서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는데 일어나보니 병원이었어요. 그때, 기억을 잃은 거예요.”
경호는 충격을 받은 건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새엄마가 세헌 씨한테까지 협박하는 바람에 방법이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빠. 저는 더는 두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마는 서하를 보며 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위로할 수도 없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서하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이 얼마나 독이었는지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경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미안하다” 정도였다. 어떤 말로도 서하의 오랜 상처를 메꿀 수 없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왜 단 한 번도 설영을 의심하지 않은 것인지. 그동안 서하를 위하던 설영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설영에게 모든 잘못을 돌릴 수는 없었다. 서하의 속이 이렇게까지 곪아가고 있었음에도 눈치를 못 챈 자신도 잘못이 있었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서하야.”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겠다는 듯 경호의 고개가 깊숙하게 숙어졌다. 그 후로도 눈물을 훔치던 서하가 자리를 뜰 때까지 경호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당신은 내가 경찰서에 잡혀 있었는데 어딜 그렇게 다녀와요?! 전화도 안 받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들려오는 분노 섞인 설영의 목소리에 경호의 어지러웠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해졌다.
“오늘은 조사만 받고 풀려났지만 언제 또 경찰서에 끌려갈지 모른다고요! 내가 걱정도 안 되는 거예요?!”
“당신…….”
“왜요!”
“서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짓이라니요? 하, 서하한테 물어보려는 말을 지금 나한테 하는 거예요?!”
경호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설영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서하 결혼, 당신이 강제로 시킨 거라며.”
“뭐, 뭐라고요?
“서하가 기억을 잃은 이유도 강원도에서 본가로 돌아왔을 때 당신 찾아온 빚쟁이들 때문에 다친 거라던데.”
설영이 멈칫하자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경호가 다그치듯 말했다.
“이미 다 듣고 왔으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그래요! 내가 시켰어요!”
“허… 뭐?”
“뭐, 어때요? 좋잖아요? 집안 좋은 곳으로 정해 줬으면 감사할 일이지 무슨 강제예요?”
“당신, 정말…!”
이제야 설영의 본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경호의 온몸 가득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서 애를 그렇게 괴롭혔어? 내 앞에서는 그렇게 서하 위하는 척하더니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나한테 다 맡겨놓고 이제 와서 뭐, 아버지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뭐라고?”
설영이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터트렸다.
“엄마 없는 애, 그 정도 키워줬으면 된 거지.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잖아요?”
“당신! 그게 할 소리야?!”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난 당신이 이러는 게 더 괘씸해요! 언제는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왜 딴소리예요?”
“내가 알아서 하라고 했지, 학대하라고 했어?!”
학대라는 말에 설영이 발작하듯 외쳤다.
“어머! 누가 학대예요?!”
“당신이 그동안 서하에게 한 짓 모두! 학대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거슬리는 게 있으면 티만 살짝 냈을 뿐이라고요!”
얼마나 티를 냈으면 서하가 고작 다섯 살 때부터 설영의 눈치를 봤을까 하는 생각에 경호의 가슴이 무너졌다.
“티만 살짝 냈다고…? 고작 다섯 살 애한테 그러고 싶었어?”
“어머, 다섯 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인데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눈치를 줘야 눈치가 생기지.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요. 나 때문에 서하, 그 계집애가 눈치라도 생겼으니.”
이제는 대놓고 서하를 계집애라고 칭하는 설영을 보며 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하는 말 이제는 못 믿겠어. 회사 일도 그렇고 서하 일도 그렇고.”
“다 내 덕인 줄 알아요! 회사가 그만큼 큰 것도, 서하가 그나마 사람 구실 하는 것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옳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설영을 보며 경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더는 설영과 말이 통하지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경호가 자포자기하듯 입을 열었다.
“이혼해.”
그 말에 사색이 된 얼굴로 설영이 말했다.
“지, 지금 나한테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래.”
이혼이라니. 설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못 해요.”
“뭐?”
“절대 못 한다고요, 이혼!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뭐, 이혼이요?! 절대 안 돼!”
두 사람이 크게 격앙된 상태로 언쟁을 하기 시작했다. 경호는 이혼을 요구했고 설영은 이혼만큼은 절대 못 해주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점차 서로를 향해 비난의 수위가 높아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야, 이럴 때!!”
다시금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쿵쿵거리며 현관으로 향한 설영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신데 초인종을…!”
문을 연 채 설영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본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맨 앞에 선 남자는 설영의 조사를 맡았던 담당 수사관이었다.
“홍설영 씨,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수사관이 설영을 향해 종이 하나를 들어 보였다.
“구속영장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