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57화 (58/70)

57화

* * *

“왔어요?”

잠옷을 입은 채 현관으로 뛰어온 서하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그가 입을 뗐다.

“왜 안 잤어.”

“세헌 씨가 안 왔는데 내가 어떻게 자요.”

“그 말 들으니까 꼭 결혼한 부부 같은데.”

“아니…. 그게…….”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세헌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진서하.”

“응? 본가 가서 나쁜 이야기라도 들은 거예요?”

“응.”

“무슨 이야기인데요…?”

끌어안았던 서하의 몸을 천천히 떼어낸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놀라지 마.”

“…놀라지 않을게요.”

“듣고 상처받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 말에 서하의 두 눈이 엷게 진동했다. 자신을 향해 상처받지도 말고 미안해하지 말라는 것은 지금 세헌이 할 이야기가 서하와 관련됐다는 말이었으니까.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이리 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세헌이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그가 서하를 제 옆에 앉히고는 말했다.

“오늘, 아버지가 그 여자를 만났대.”

그 여자. 서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설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서하는 그대로 굳어졌다.

“정말로, 새엄마가… 우 회장님을 찾아갔었다고요?”

“그래.”

“가서… 뭐라고 했대요? 우 회장님께…. 이번에는 대체 뭐라고…….”

혹시나 또 저를 들먹이며 돈을 요구했을까, 아니면 거짓말로 자신을 깎아내렸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건지.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숨이 턱하고 막혔다.

대체 설영이 어디까지 하려는 건지. 소름이 끼치다 못해 이제는 무서워졌다.

엄마라는 호칭도 더는 붙이기 싫었다. 설영은 더는 서하에게 가족이 아니었다.

“정말 소름 끼치는 사람이네요.”

복수했다고 생각했었다. 채권자를 불러서 겁을 주고 더는 자신이 설영에 손에 휘둘리지 않겠다며 당당하게 선포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에 끝날 줄 알았던 서하의 생각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서하가 생각한 것만큼 설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며 상식이 통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서하가 시선을 떨궜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세헌 씨. 나 때문에…….”

“진서하.”

“제가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하죠? 회장님께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뵙고 죄송하다고…….”

덜덜 떨리는 가녀린 어깨를 세헌이 양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나 봐.”

바닥으로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맑고 예뻤던 두 눈은 혼란에 잠겨서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세헌 씨. 나 정말… 어떻게…….”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얼굴이던 서하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니까.”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세헌이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허락해 줘. 내가 그 여자를 벌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왔을 뿐이었다. 설영이 단지 그녀의 새어머니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하를 계속해서 벼랑으로 몰아가는 설영의 행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요?”

“법으로 처리할 거야. 진성 건설일 때, 그 여자가 배임과 횡령을 했다던 증거가 나한테 아직 남아있거든.”

“그러면…….”

“경찰 수사를 받고 징역을 살 수도 있겠지.”

징역. 무거운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설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돼요?”

“넌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이 해결할 것을 세헌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나 서하가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네가 힘들어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그의 진심이 서하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잘 알고 있는 서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채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단체로 소송을 진행할 거야. 투자금을 받아놓고 다른 곳에 썼으니까 사기죄가 성립되겠지.”

“아…….”

“내가 가지고 있던 증거들은 경찰에 넘길 거고.”

“증거요?”

“진성 건설을 인수하려고 했을 때, 찾아놓은 증거들이야. 그 여자는 입찰 건을 따기 위해서 금품을 제공했고 업체들에는 돈을 받았지.”

이미 들은 이야기였지만 자세하게 듣게 된 건 처음이었다. 듣고 보니 더 심각한 상황에 서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그때는 간단하게 조사를 받고 끝냈겠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한테 그 모든 증거가 있으니까.”

도윤과 함께 이 잡듯 증거를 찾아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서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각오는?”

그의 물음에 서하가 결심한 듯 목소리를 냈다.

“준비됐어요.”

* * *

조용했던 집안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설영이 몸을 일으켰다.

“어서 빨리 아줌마 하나 구해야지, 귀찮아서 원.”

현관으로 향한 설영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홍설영 씨 계십니까?”

“누구신데요?”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경찰서라는 말에 설영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경찰서에서? 경찰에서 왜…?”

설영이 현관문을 열자 서너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멈칫하며 뒷걸음질 치는 설영을 향해 그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홍설영 씨, 경찰서까지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내가, 왜요?! 무슨 일로?!”

눈을 부릅뜨며 말하는 설영을 향해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잘 아실 텐데요?”

잠시 후, 설영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경호와 다미에게 알려졌다.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득달같이 경찰서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결백을 주장하는 설영을 만날 수가 있었다.

“난 아무 잘못 없다니까요?! 내가 피해자예요, 내가!”

“홍설영 씨, 증거가 있는데 자꾸 거짓말하실 겁니까?”

“증거?! 그거 다 가짜야. 가짜라고!”

악을 쓰는 설영에게 다가간 경호가 입을 열었다.

“당신, 이게…. 무슨 일이야.”

“여보…!!”

설영이 억울하다는 듯 울부짖으며 경호를 향해 말했다.

“서하랑 우 대표가 서로 짜고 나를…. 나를…!”

“서하? 서하가 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설영이 답답한지 경호가 앞에 있는 수사관을 향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홍설영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배우자입니다.”

그 말에 수사관이 딱딱하게 답했다.

“홍설영 씨는 현재 고소당한 상태입니다. 횡령, 배임, 공정거래법 위반, 사기 등 총 7개의 혐의가 있어요. 지난번에 조사는 받으신 것 같은데?”

그제야 경호는 진성 건설이 인수되기 전 비리 건으로 설영이 조사를 받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당시 벌금을 내고 합의를 보며 무마했던 것 같은데 다시금 떠오른 사건에 경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는 흐지부지하게 끝난 거 같은데 이번에는 증거도 많고 고소인들도 있어서 제대로 수사 들어갈 겁니다.”

“고소인들이라면…. 한두 명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네. 아직 조사 중이니 자세한 건 변호인을 통해 들으세요.”

“잠깐만…!”

경호가 수사관을 불렀지만, 그는 매몰차게 돌아설 뿐이었다. 옆에 있던 다미가 경호를 향해 울먹이며 말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빠? 우리 엄마가 왜 조사를 받아요?”

“나도 알아봐야겠다. 무슨 일인지…. 지난번 일은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고소를 당했다니…….”

다미가 독기를 품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 계집애…. 아니, 서하. 서하 때문일 거예요.”

“서하?”

“아까 엄마가 말했잖아요. 서하랑 우세헌이 짜고 엄마를 고소하고 조사받게 한 거예요!”

경찰서에 들어왔을 때, 설영이 울먹이며 자신을 보고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는 다미를 보며 경호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서하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다는 거냐.”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는 경호를 향해 다미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앙심을 품었겠죠.”

“그러니까 서하가 왜 앙심을 품어.”

“그건…. 아! 우리가 자꾸 우세헌이랑 만나지 말라고 하니까. 아니면 우세헌이 시킨 일일 수도 있고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빠! 빨리 서하한테 연락해서 엄마 꺼내 달라고 말해요!”

다그치듯 말하는 다미의 등쌀에 경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뭐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설영의 입에서 서하 이름이 나온 만큼 물어는 봐야 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신호음이 들리더니 이내 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면 만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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