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55화 (56/70)

55화

* * *

카페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하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

귓가에 아직도 울렸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설영의 목소리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지 작게 몸을 떠는 그녀를 누군가 감싸 안았다.

“…세헌 씨?”

“잘 끝난 거 같은데.”

“보고 있었어요?”

“아니, 감이야.”

그가 자연스럽게 서하를 차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세헌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앉혔다. 이제야 안전하다고, 편안하다고 느낀 걸까. 그의 차에 타자마자 서하의 어깨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운전석에 탄 세헌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몸 위로 안전띠를 해주며 말했다.

“잘했어.”

잘했어. 고작 세 글자인 말에 서하는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통쾌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했다.

“제가 그렇게 싫었냐고…. 왜 그렇게 괴롭혔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못 물어봤네요.”

그녀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복수라고 해서 꽤 거창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속은 시원해요. 더는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나, 잘했죠?”

“그래.”

세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잘했어.”

다정한 손길이 마치 그녀의 공허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매번 주춤할 때마다 제 옆을 든든히 지켜준 세헌의 존재가 오늘따라 더욱 커 보였다.

서하가 운전석에 앉은 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럴 때는 다른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말?”

의아한 듯 묻는 그녀를 향해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같은 거.”

그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서하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런 건 나중에요…….”

“기대하지.”

이내 두 사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한편, 가방과 지갑을 빚쟁이들한테 빼앗기고 겨우 휴대폰만 들고 카페를 빠져나온 설영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진서하…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서하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게.

“감히…. 감히 나를 속여?”

죄송하다며, 앞으로는 잘하겠다던 서하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다. 오히려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자신의 등에 꽂을 칼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이 홍설영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설영이 으드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복수를 할까. 그년이랑 우 대표 둘 다 나락으로 떨어트릴 방법을 찾아야 해.”

설영의 눈동자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을 개망신을 준 서하에게 복수할 생각만 가득했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생각에 잠겼던 설영의 눈가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서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 대표가 아닌 차라리 TA 그룹 회장을 직접 찾아가서 협박해보자고 했던 말이.

“하하,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왕창 챙겨야 했다. TA 그룹의 우 회장을 만나서 세헌이 한 일을 꼬투리 잡아 협박할 생각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기억을 잃은 내 딸을 강제로 데리고 있으면서 결혼도 못 하게 막았다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도 저절로 갈라지겠지.”

게다가 아무리 서하라도 자신의 친아버지인 경호에게까지 등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 뻔했다.

“난 그 계집애가 다시 빌면서 돌아올 때까지 TA 그룹 돈 받아먹고 살면 돼.”

설영이 낄낄대며 음흉하게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자주 이용했던 흥신소 번호를 찾아낸 그녀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신호음이 가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아이고, 누님. 또 이렇게 연락을 다 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아부가 섞인 남자의 목소리에 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우리 누님이 해달라고 하시는데 다 해드려야죠. 이번엔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TA 그룹 회장님, 만날 기회를 만들어봐.”

-TA 그룹이요? 그 우리나라 대기업 TA 그룹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남자가 말했다.

-저기…. 누님, 아무리 저희라도 TA 그룹 회장님은 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방법을 찾아보라니까? 비서 번호를 알아내든가!”

-비서 번호요? 흐음.

남자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꽤 어려운 일이라 큰 거 한 장 정도는 생각하고 계셔야 합니다.

큰 거 한 장이라는 말에 울컥한 설영이 입을 열려다 꾹 참았다. 원체 천박한 놈들이었으니 그 정도 요구는 어쩌면 당연했다.

‘양아치놈들.’

별다른 방법이 없던 설영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알겠으니까 일 똑바로 처리해.”

-아이고, 누님. 저희가 언제 일 제대로 못 하는 거 봤습니까? 편히 쉬고 계십쇼. 후딱 처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은 설영이 허공을 노려봤다.

“잘못 건드렸어, 이 천하의 홍설영을.”

그러고는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광기가 넘쳤다.

그로부터 며칠 후.

흥신소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설영은 TA 그룹 우 회장을 만나서 어떻게 돈을 뜯어낼지 궁리만 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어! 뭐 하는 거야, 이것들은.”

자신이 당한 수모를 서하에게 갚아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빚쟁이들의 독촉으로 가지고 있던 돈이 빠르게 줄고 있었기에 어서 한몫 챙겨야 했다.

“엄마!”

초조하게 휴대폰을 바라보던 설영이 자신을 부르는 다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니? 우리 딸?”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진서하, 그년은 아직도 우세헌이랑 같이 있는 거야?!”

“딸, 그게…!”

“엄마만 믿으라며! 왜 진서하가 아직도 우세헌이랑 같이 붙어있는 건데!”

설영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일이 복잡해졌으니까 기다려 봐, 다미야. 엄마가 알아서 하려고 노력하잖니?”

“그러다가 시간 다 가면! 어?!”

“걱정 마,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쇼핑이나 하고 놀고 와. 며칠만 있으면 다 끝나니까.”

“며칠만 더 있음 된다는 거지?”

다미의 물음에 지친 듯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엄마, 엄마 카드 좀 빌려줘.”

“카드? 왜? 카드 잊어버렸어?”

“아니, 한도 초과야.”

한도 초과라니. 다미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편히 터놓을 수도 없던 설영이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다미야, 엄마도 한도 얼마 없으니까 아껴서…….”

“엄마, 지금 나보고 아끼라고 한 거야?”

“엄마도 써야 하잖니.”

“다른 카드 없어?”

설영은 차마 빚쟁이들에게 지갑과 가방을 빼앗겨서 카드가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다시 재발급받을 동안은 그 카드 하나밖에 못 써.”

다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설영의 카드를 대충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다.

“알겠어. 적당히 쓰고 올게. 저녁은 먹고 들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휙 돌아서는 다미를 보던 설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대체! 언제 연락이 오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며 흥신소 욕을 하던 설영은 휴대폰 벨 소리에 발작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다급하게 전화를 받는 그녀의 귓가에 유난히 달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접니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목소리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 알아낸 거야?”

-제가 누굽니까? 하하. 큰 거 한 장 들고 나오세요. 바로 TA 그룹 최측근 비서 번호 넘겨드릴 테니.

“알았어, 기다려!”

서둘러 전화를 끊은 설영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이 갚아줄 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 한 건 크게 터트려 볼까나.”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서는 설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개운했다.

* * *

똑똑. 회장실의 문에서 둔탁하게 나는 노크 소리에 우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게나.”

회장실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우 회장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는 가장 오래된 비서이자 우 회장의 가장 최측근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것이…….”

“무슨 일인데 자네답지 않게 그래?”

의아한 듯 묻는 우 회장을 보며 주춤거리던 비서가 말을 이었다.

“연락을 한 통 받았습니다.”

“연락?”

“네. 제 선에서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회장님께 보고는 드리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비서의 말에 우 회장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홍설영이라는 여자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홍설영?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인데.”

“네, 지금 도련님께서 만나고 있는 여자의 어머니라고 하더군요.”

비서의 말에 우 회장이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알고 있네. 진서하 씨.”

“홍설영 씨 말로는 도련님께서 기억을 잃은 진서하 씨를 세뇌시켰다고 하더군요.”

“세뇌?”

“네. 진서하 씨는 정략결혼 상대도 있었는데 도련님의 이간질로 결혼도 차질이 생기고 가족들과도 멀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듣게 된 사실에 우 회장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

“그래서 홍설영 씨가 원하는 건 뭔가?”

잠시 뜸을 들이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우 회장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냥 일은 아닌 듯하여 다른 비서가 아닌 제 선에서 처리하려고…….”

“아닐세.”

“회장님?”

우 회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홍설영 씨 보고 오시라고 하게.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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