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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먹는 밤-52화 (53/70)

52화

* * *

“연락도 안 받더니 이제야 연락하는구나. 너 때문에 나랑 다미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니?”

걱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설영의 어조에 가시가 잔뜩 박혀있었다.

-죄송해요…….

서하가 순순하게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자 설영이 멈칫하며 굳어졌다.

“너….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거니?”

-네, 다 돌아왔어요.

“다? 전부?”

-네…….

기억이 전부 돌아왔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설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다시금 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제가 기억만 잃지 않았어도…….

그 말에 설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머, 알긴 아는구나. 너 까짓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 우리 다미는 또 어떻고!”

-그래서 기억을 찾자마자 이렇게 전화하는 거예요…….

설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잔뜩 주눅이 든 서하의 목소리는 확실히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우선 만나자꾸나.”

설영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알겠어요…….

“시간이랑 장소는 메시지로 보낼 테니 늦지 말고.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네, 늦지 않게 갈게요.

할 말을 마친 설영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지?”

설영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예전의 서하라면 자신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을 것이기에 오히려 좋아해야 했지만,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별 이상한 일들이 다 생기니 자꾸만 불안하네. 이게 다 진서하, 이 계집애 때문이지, 쯧.”

서하 때문에 자신과 다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떠올리며 설영이 혀를 찼다.

“뭐, 날 개고생 시킨 값은 제대로 받아내면 그만이지만. 어서 다미한테 말해줘야지.”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영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악독해 보였다.

한편 통화를 마친 서하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청 머리를 굴리고 계시겠지.”

기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말투가 달라지던 설영을 떠올리며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내일 설영을 만나면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이 배신했을 때 배신감은 두 배가 될 것이었다.

서하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고통받았던 것을 배로 갚아줄 것이었다. 복수의 시작이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뜬 서하는 설영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XX 카페, 오전 10시까지.]

굳은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녀의 옆에 세헌이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는 거 잊지 마.”

“알았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지난밤, 서하가 혼자 설영과 만나겠다고 하자 그는 진지하게 그녀를 말렸다. 혹시나 혼자 만나러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작게 숨을 내뱉으며 서하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출근해서도 온통 네 걱정만 할 텐데.”

“나 예전에 진서하 아니라니까요. 복수를 생각할 만큼 나, 변한 거 알잖아요.”

“그래. 알아.”

서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난 세헌 씨가 독해졌다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누가 누굴.”

“세헌 씨가 나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서하와 눈을 맞췄다.

“그럴 일 없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내가 감히 진서하를 싫어할 리가.”

올곧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음껏 독해지려고 하는데.”

“그것도 꽤 매력적이겠는데.”

독해지는 것도 매력적이라니.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나 맹목적으로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낼 수가 있는 건지 서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세헌 씨.”

세헌이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정말 세헌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건 진작에 깨달은 거 아니었나.”

“다시 한번 깨닫는 거죠.”

서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헌은 모를 것이었다. 그는 서하의 변한 성격이 원래 가지고 태어난 성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가 변한 것은 그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바닥을 치던 서하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끌어올린 것도 모두 세헌이었다.

“고마워요.”

수줍게 내뱉은 그 말에 세헌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데려다주게 해줘.”

“어딜요?”

“만나는 장소까지.”

설영과 만나는 곳까지 태워다준다는 그의 말에 서하는 극구 사양했다. 그가 출근 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을 태워다주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에.

“안 돼요. 대표님이 자꾸 지각하면 어떡해요.”

“내 회사라 괜찮아.”

“그래도…….”

“가끔은 늦게 출근해서 배도윤 숨 좀 돌리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능글맞게 말하는 세헌을 보며 서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알았어요.”

이내 집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탔다.

이윽고 설영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차를 멈춘 세헌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안 내키네.”

제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듯한 기분에 그의 미간이 엷게 찌푸려졌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요.”

서하가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자신을 향해 고정하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죠?”

“…걱정은 사라졌는데.”

“응? 다행이네요.”

“다행은 아니고.”

세헌의 얼굴에서 손을 떼던 서하의 손이 그의 손에 잡혔다.

“뽀뽀만 할 거야?”

“네?”

“애도 아닌데.”

나른한 그 목소리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변태…….”

그가 기다렸다는 듯 안전띠를 풀며 서하를 향해 몸을 비틀었다.

“알면 마저 해줘.”

세헌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그리고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슬쩍 보이는 눈동자는 그녀의 입술로 향해 있었다. 서하과 얼굴을 맞댄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서.”

서하의 고개가 마치 자석처럼 그의 얼굴로 이끌렸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쳤다.

그의 손이 움찔거리는 서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제 어깨 위로 올려놓고는 그녀의 허리로 손을 내려 제게 더 끌어당겼다.

서하의 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의 입속에서 조용히 삼켜졌다. 조용한 차 안에는 끈적하게 입술이 맞부딪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 붙어 있던 입술은 세헌의 차 앞 유리에 뿌옇게 김이 서릴 때쯤 떨어졌다.

“잘 다녀와.”

“…이렇게 만들어놓고 뻔뻔해요…….”

“제대로 뻔뻔해질 수도 있는데.”

짓궂은 그의 말에 서하가 장난스럽게 그를 흘기며 차에서 내렸다.

“다녀올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알겠어요. 어서 가요, 회사 늦기 전에.”

세헌을 배웅하고 난 뒤, 붉어진 얼굴을 식힐 틈도 없이 그녀가 카페로 향했다.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카페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투명한 유리문으로 앉아있는 설영의 모습을 보자마자 조금전까지만 해도 바짝 달아올랐던 몸이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

가볍게 심호흡을 한 서하가 결심한 듯 문을 열었다.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에서 소리가 나자 설영의 시선이 들렸다. 서하가 움츠린 모습으로 설영을 향해 다가섰다.

“…저, 왔어요.”

찬찬히 서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설영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앉아.”

“네.”

서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설영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따위 때문에 그동안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죄송해요.”

“너, 우 대표 집에 있는 거지?”

“네.”

“당장 나오도록 해. 양도민 씨랑 결혼은 계속 진행할 거니까…. 잠깐만.”

설영이 멈칫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께름칙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아직은 나오면 안 되겠구나.”

“아직 나오지 말라고요?”

“그래. 그냥 나올 수는 없지. 그동안 힘들었던 대가는 받아야겠어.”

대가를 받는다고? 서하가 의아함을 가지기도 전에 설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들어가면 우 대표한테 돈 달라고 하렴.”

설영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조차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다니. 서하는 기가 차서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녀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설영을 향해 물었다.

“세헌 씨한테요…?”

“그럼 누구한테 달라고 하겠니? 말귀 못 알아먹는 건 여전하구나.”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설영이 말을 이었다.

“가서 기억 잃었을 동안 왜 가족한테 안 보내줬냐고 따지렴. 게다가 결혼할 사람도 있는데 왜 붙잡고 있었냐고, 피해 보상해 달라고 해. 안 그럼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얼마나 달라고 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지난번에 너 키운 값으로 20억 달라니까 덜컥 준다고 하더라. 네가 달라고 하면 20억보다 더 많이 줄지도 몰라.”

번뜩거리는 설영의 눈빛이 마치 뱀 같았다.

“그래, 30억. 30억 달라고 해. 그 정도는 받아내야 그동안 내가 개고생한 걸 보상받지. 안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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