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 *
며칠간 설영과 다미는 밥 먹듯이 서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하는 더 이상 그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설영과 다미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담긴 메시지를 보내는가 싶던 두 사람은 이내 협박성이 다분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너 기억 돌아온 거지? 당장 연락하지 않으면 가만 안 둘 거야.]
[계속 연락 안 받으면 쳐들어갈 거야.]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나쁜 것 같으니라고, 당장 연락하지 못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는데.”
서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앞에서 다정한 척하고 울면서 하소연하던 설영과 다미의 드라마틱한 변화에 서하는 크게 놀랐다.
“진짜… 나 집안에서 정말 미움 받고 있었나 봐.”
두 사람이 자신을 괴롭혔다는 세헌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서하는 가방을 챙겼다. 혹시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다미와 설영 때문에 그녀는 며칠간 요리 학원을 가지 못한 채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집에만 있어 답답해하는 서하를 위해 세헌은 회사로 그녀를 초대했다. 같이 점심을 먹자며.
“도윤 씨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시간을 확인하던 서하가 가방 속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도윤 씨?!”
-서하 씨! 내려오세요! 주차장이에요.
“네!”
도윤과 짧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가방 속에 대충 집어넣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도윤을 만난 서하는 반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도윤 씨.”
“하하, 저도요. 갈까요?”
도윤이 뒷좌석의 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타세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서하가 차에 타는 것을 본 도윤이 재빠르게 운전석으로 향했다. 핸들을 잡은 그가 룸미러로 흘끗 서하를 보고는 말했다.
“아침부터 세헌이가 기분이 좋더라고요.”
“세헌 씨가요? 왜요?”
“서하 씨가 회사로 온다고 해서 그런가? 일도 열심히 하고 짜증도 덜 내고요.”
“가끔 찾아가야겠네요.”
“가끔이요? 매주 오셔야 하는데?!”
능청스러운 도윤의 대답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차를 타고 10분 남짓 달렸을까. 서하가 탄 차가 TA 건설 사옥 앞에 도착했다.
“안내데스크 앞에서 세헌이 만나러 왔다고 이름 말하면 안내해줄 거예요.”
“아, 도윤 씨는 같이 안 가요?”
“네, 제가 끼면 저 세헌이한테 욕먹어요.”
호탕하게 웃으며 도윤이 말을 이었다.
“어서 가보세요. 점심 맛있게 드시고요!”
“고마워요, 도윤 씨. 도윤 씨도 점심 맛있게 먹어요!”
차에서 내린 그녀가 정문으로 향했다. 도윤의 말대로 안내데스크 앞으로 가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하를 향해 말을 건넸다.
“혹시, 진서하 님?”
“네, 맞아요.”
“이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대표실은 맨 위층입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와 보는 세헌의 일터라서 그런 걸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일에 몰두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서하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흠, 흠.”
괜스레 헛기침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대표실로 향했다.
“들어가도 되나…?”
서하가 조심스럽게 유리로 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으로는 도윤의 책상이 있었고 안쪽 끝으로 또 다른 문이 보였다.
“저기가 대표실인가?”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까랑까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슬쩍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에 서하는 홀린 듯 다가섰다.
“협박하신 건 홍설영 씨입니다.”
홍설영. 서하의 귓가에 꽂힌 이름에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대체 새엄마가 왜 세헌과 함께 있는 건지. 서하가 생각도 하기 전에 다시금 설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우 대표!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이렇게 말을 바꾸는 게 어디 있나요?!”
“먼저 약속을 어기신 건 홍설영 씨 아닙니까? 제가 분명 진서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어머머! 내가 가고 싶어서 갔어요? 서하 아버지가 걱정된다고 가보라고 해서 간 거지. 아무튼! 약속대로 20억 당장 내놔요.”
설영의 말에 세헌이 단호하게 답했다.
“못 줍니다.”
“뭐라고요?! 약속했잖아요! 진서하 키운 값 주기로!! 뭐, 이제 20억이 아까워지기라도 했어요?!”
‘20억?’
큰 액수에 서하가 절로 숨을 들이마셨다. 당당하게 자신을 키운 값이라며 20억을 요구하는 설영의 모습에 서하가 놀란 것도 잠시 이어지는 세헌의 말은 그녀를 더욱 놀라게 했다.
“설마 제가 20억이 아까워서 이러는 거로 생각하십니까? 서하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깟 20억 따위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왜, 말을 바꾸는 거죠? 우 대표?”
“홍설영 씨가 진서하 앞에 나타나서 그녀를 계속 흔들고 힘들게 하니까요.”
“아니, 그건!”
“지난번에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또다시 그녀를 힘들게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
기가 찬다는 듯 설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요, 우 대표!”
앙칼진 설영의 목소리에 세헌이 싸늘하게 답했다.
“제가 지금 홍설영 씨를 만나는 것은 단지 진서하 때문입니다. 그래도 법적으론 당신이 새어머니니까.”
“그래요, 누가 뭐래도 나 걔 새엄마예요. 그러니까 키운 값 달라니까?”
손이 떨렸다. 이제야 설영의 본모습을 보게 되자 서하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잠시 설영을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음을 실감하던 순간,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
또다시 찾아온 극심한 두통에 그녀가 대표실 문에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쥐어짜는 듯했다. 이내 쥐어짜는 통증은 꼬챙이로 찌르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서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앞에 섰다.
“진서하? 야, 너 진서하 맞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내 연락 무시하더니 여기 있었잖아? 여우 같은 년! 너 기억 다 돌아온 거 맞지?!”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보며 다미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아윽…….”
서하가 비틀거리자 다미가 그녀를 향해 말을 쏟아냈다.
“이게 어디서 연약한 척이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연기하니? 야, 내가 말했지? 너 가만 안 둔다고.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다미가 검지를 세워서는 그녀의 머리를 툭툭 밀었다.
“하, 우세헌이 좋아해 주니까 세상 다 가진 것 같아?! 그게 얼마나 갈 것 같니? 내가 너랑 우세헌이랑 행복해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다미의 목소리가 서하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고통스러운 듯 서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
“뭐가 잠시만이야! 이게!”
다미가 순식간에 서하의 머리채를 잡아채서는 거칠게 흔들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다미의 얼굴은 표독스러움 그 자체였다.
“너만 없었어도! 너만…!!”
온 세상이 흔들렸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와 정신없이 흔들리는 머리에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진서하!”
희미하게 세헌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서하의 의식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서하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털썩하고 쓰러진 서하를 안아 든 세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진서하.”
무겁게 내려앉은 그녀의 눈꺼풀은 미동이 없었다.
“아, 아니…. 갑자기…….”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는 다미를 향해 세헌이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당장 꺼져.”
“세, 세헌 씨!”
“꺼지란 말 안 들리나?”
냉랭한 표정으로 살기를 내뿜는 그를 보며 다미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볼일을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온 도윤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에서 굳었다.
서하와 세헌이 오붓하게 점심을 먹고 있을 줄만 알았던 도윤은 쓰러진 서하를 안고 있는 세헌과 그 앞에선 설영과 다미를 보며 단숨에 표정을 구겼다.
“이게 무슨…!”
“배도윤.”
세헌의 부름에 그가 재빠르게 답했다.
“응, 세헌아.”
“구급차 부르고 당장 이 두 사람, 눈앞에서 치워.”
“알겠어.”
도윤이 경비원들을 부르더니 힘으로 두 모녀를 대표실 밖으로 내보냈다.
설영과 다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세헌의 시선은 오직 서하에게 향해 있었다.
“진서하…….”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그의 눈빛이 뜨겁게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