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48화 (49/70)

48화

* * *

세헌이 꾸민 일이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서하를 향해 설영이 말했다.

“우 대표가 일부러 비리를 터트려서…. 우리 회사 인수한 거야.”

“그러니까…. 세헌 씨가 회사를 인수하려고 일부러 비리를 터트린 거라고요?”

“그래! 잘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우 대표가 우리 회사만 흔들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떨어지는 일은 없었어. 너도 기억을 잃지 않았을 테고!”

믿어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서하의 말에 설영의 눈이 매섭게 찢어졌다.

“너, 정말… 우 대표한테 홀딱 넘어갔구나?! 가족들 말도 못 믿을 정도로!”

“아니, 증거가…….”

“우 대표가 직접 말했단다! 양도민 씨한테!!”

“세헌 씨가… 직접 말했다고요?”

누군가 서하의 머리를 크게 한 대 친 것 같았다.

“양도민 씨한테 직접! 진성 건설을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인수한 이유가 너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했어!”

진성 건설을 인수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니.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설영이 말을 이었다.

“네가 정략결혼을 하니 우 대표가 막으려고 일부러 비리를 터트리고 회사를 인수한 거야! 상견례 날짜가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사가 그렇게 되고, 어떻게 알았는지 우 대표가 인수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억울함이 가득한 설영의 목소리가 서하의 귓가에 왕왕 울렸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너는! 그런 우 대표를 감쌀 수가 있니? 가족들은 이렇게 고통받았는데!!”

절규 어린 음성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서하에게 꽂혔다.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몸을 작게 떨 뿐이었다.

“하…….”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을 지켰던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지도 않았으며 묵묵하게 기다려줬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가족의 회사를 일부러 무너트렸다니. 게다가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니.

서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더는 분간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아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극심한 두통에 서하가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설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게…. 우 대표가 꾸민 거야. 진성 건설 무너트려서 인수한 것도, 우리가 널 버리게 한 것도 다!! 알겠니?!”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서하가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이만 가볼게요.”

“어딜 가려고! 내가 알았냐고 묻잖아?!”

“머리가 아프다고요…!”

서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설영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연락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황급히 밖으로 나온 서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의 심장박동과 똑같은 주기로 관자놀이에 통증이 느껴졌다.

“하…….”

집 앞이었지만 차마 집까지 두통을 참아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진통제 있나요?”

“상비약은 이 앞에 있습니다.”

서하가 서둘러 진통제 하나를 집어 들고는 생수 하나를 꺼냈다. 계산하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약을 꺼내 그대로 입안에 집어넣고는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며 중얼거리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까지도 서하는 두통에 시달렸다. 괜히 몸도 으슬으슬해지는 것 같았다.

침대로 들어간 그녀는 한참을 괴로워하다 스르륵 잠이 들고야 말았다.

* * *

띡띡띡띡. 띠리릭.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진통제 때문일까, 깨질 듯이 아프던 머리는 진정되어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진서하.”

“아, 세헌 씨. 다녀왔어요?”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서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어디 아픈 건가.”

“아까 두통이 있어서 약 먹었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나 봐요.”

“두통?”

미세하게 좁아지는 세헌의 미간을 보며 그녀가 맑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서하의 말에도 그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세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도 서하가 설영을 만났다는 것을. 또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번에는 진통제를 먹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을까 걱정이 됐다.

“세헌 씨.”

서하가 그의 손을 잡아끌자 세헌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게 됐다.

“응.”

“나 할 말 있어요. 물어볼 것도 있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향해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다 말해줄 테니까.”

덤덤하게 답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이상하게 서하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세헌 씨한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랑 언니를 만났어요. 그리고 도민 씨도 만났고요.”

세헌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헌 씨…. 혹시 언니랑 만나던 사이였어요?”

세헌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세헌 씨를 믿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었어요. 전 기억이 없으니까…….”

“진다미가 그러던가?”

“…네.”

혹시나 그의 입에서 맞다고 한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서하는 긴장감 어린 얼굴로 세헌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봐.”

“…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그녀가 두 눈을 깜빡이자 세헌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서하 쫓아다니는 것만도 바쁜데 누가 누굴 만나.”

그러고는 서하와 시선을 맞추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을 거 같은데.”

“아…….”

“더 확실하게 말해줄까.”

“아니…….”

“난 예전에도, 지금도 진서하밖에 눈에 안 차. 다른 여자 따위 들어오지도 않았어.”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진심이라고.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다음 질문은?”

“아, 다음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서하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세헌 씨가 진성 건설 인수한 거 말이에요.”

뜸을 들이던 그녀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설마, 정말로 나 때문이에요?”

“그래.”

서하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하가 다시금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세헌 씨가 정말 일부러 진성 건설 비리를 터트려서 흔들리게 한 다음 인수한 거예요?”

세헌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 닫힌 입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가 일부러 비리를 터트려서 무너트리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다.

“사실로만 이야기하자면 맞다고 해야 할까.”

맞다고 해야 한다고? 놀란 서하의 몸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헌이 조용히 그녀의 떨리는 손 위를 감싸 쥐었다.

“오해하지 마. 진성 건설은 이미 비리가 곪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업계에서는 소문이 났지. 그 여자, 그러니까 네 새엄마가 입찰 수주를 따내기 위해서 금품 수수를 하고 업체들한테 돈을 요구한 것들, 회삿돈을 횡령한 것들은 이미 네 아버지도 알고 있던 사실이야.”

“아버지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요?”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황에서 그 여자는 널 강제로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했고 넌 어쩔 수 없이 하겠다고 했지. 참을 수 없었어. 마지막까지 네가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속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다미와 설영의 말에서 느꼈던 이질감 같은 건 세헌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금 물었다.

“정말…. 일부러 우리 가족을 망가트리려고 인수한 건 아니에요?”

“난 네게 미움 받을 짓은 하지 않아. 물론, 네가 싫다 해도 널 괴롭히는 그 여자와 진다미는 치워 주고 싶었지만.”

세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서하가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다미와 설영에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전부.

“진서하.”

“…네.”

하지만 세헌은 그러지 않았다. 다미와 설영처럼 자신 또한 구질구질하게 이간질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무엇을 믿든 상관없어. 하지만 그 여자, 그러니까 네 새엄마와 진다미는 믿지 말고. 차라리 진 대표님을 믿도록 해.”

서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헌 씨도 믿지 말라는 건가요?”

“강요하지 않아. 네가 믿든 안 믿든 난 네 옆에 있을 거니까.”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이 되질 않았지만…. 알고는 있었어요.”

어느새 젖어버린 그녀의 맑은 눈에 세헌이 비쳤다.

“세헌 씨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새어머니, 언니, 도민 씨를 만나면서 느꼈던 이질감은 세헌 씨한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서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진서하.”

“…기억을 잃었어도 알 수 있어요. 누가 진심으로 날 생각해주는 사람인지는.”

그녀가 손을 뻗어 세헌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게 바로 세헌 씨라는 거.”

서하의 손길을 느끼듯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눈을 덮었다가 다시금 밀려 올라갔다.

“진서하.”

“네?”

“나 지금 네가 미친 듯이 사랑스러운데.”

그의 손이 어느새 서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키스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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