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47화 (48/70)

47화

* * *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앞에 보이는 서하의 얼굴을 보며 세헌이 손을 뻗었다.

“일어났어요?”

“응.”

그가 다정하게 서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모르겠어요. 눈이 저절로 떠졌어요.”

“다시 재워줄게, 더 자.”

커다란 손이 서하의 허리를 붙잡고는 끌어당겼다. 자석처럼 그녀의 몸이 이끌려가더니 이내 세헌의 품에 쏙 안겼다.

“세헌 씨, 곧 출근할 시간인데요?”

“상관없어. 조금 늦으면 돼.”

“그래도 회사 대표인데 일찍 출근해야죠.”

“직원들은 내가 늦게 출근하길 원할걸.”

그가 느른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 서하와 눈을 맞췄다.

“내가 어서 출근하기를 바라는 건가.”

“설마요.”

“그럼?”

아이처럼 채근하는 그의 모습에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헌 씨가 있으면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은걸요?”

“계속 있어도 되는데.”

“도윤 씨가 세헌 씨 없어서 난리 피우는 거 보고 싶어요?”

“배도윤은 고생 좀 더 해야 해.”

세헌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요리 학원은 어때.”

그의 물음에 서하는 멈칫했다. 요 며칠 사이, 설영과 다미가 자꾸 찾아오는 탓에 제대로 학원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냥…….”

“그냥? 흥미가 떨어졌나.”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재미있어요. 선생님들도 다들 착하시고 좋으신 분들이에요. 아, 양식 선생님은 화가 많으신 것 같긴 하지만…….”

서하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더 말해 봐.”

“음, 한식이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아요! 그래도 막상 만들고 나면 너무 예쁘고 맛있고…. 아, 선생님들이 칭찬도 많이 해주세요.”

“그래?”

“네. 그래서 더 욕심도 나고. 베이커리 이런 것도 재밌을 거 같은데…….”

들떠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세헌이 말했다.

“다 해.”

“네?”

“다 해봐. 한식이든 베이커리든. 네가 배우고 싶으면 다 배워.”

“그러다가 평생 배우기만 한다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요?”

서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질펀해졌다.

“내 옆에서 평생 있을 생각을 했어?”

“아, 아니. 그게…!”

“좋아. 평생 배워. 난 네가 옆에만 있으면 돼.”

세헌은 항상 직진이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서하는 매번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하기도 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나 좋아해 주면서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서하에게 헌신적이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더욱 세헌에게 고마웠다.

“세헌 씨.”

“응.”

“저녁에 오면…….”

“저녁에?”

서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하고 오면 이야기해 줄 게 있어요.”

가만히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헌은 더 묻지 않았다. 왜 지금 말하지 않는 거냐며 혹은 빨리 말해달라 재촉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기다리겠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서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계속 생각했었는데…. 난, 세헌 씨 만난 게 정말 행운인 거 같아요.”

행운이라니. 세헌이야말로 그녀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일생일대의 딱 한 번 있을 만한 행운. 무미건조했던 자신의 인생에 사랑이란 것을 불어넣어 준 그녀니까.

“내가 할 말인데.”

세헌이 입술을 내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말캉하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서하가 그의 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 어떡하죠?”

“왜.”

“이제는 제가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요.”

“그렇게 귀여운 말 하면 아예 회사를 안 가버릴 수 있는데.”

그러고는 은근하게 제 허리를 문지르는 세헌의 손을 서하가 툭 쳐냈다.

“안 돼요! 어서 출근해요. 나머지는 이따가 퇴근해서 마저 하고요.”

“그래.”

아쉽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내린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욕실로 향하는 세헌의 탄탄한 뒤태를 보며 서하는 조용히 감탄했다.

“조금 더 안고 있을 걸 그랬나…….”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속내에 그녀가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이었다. 세헌은 이미 욕실로 들어간 후였으니까.

이불을 끌어당겨 붉어진 볼을 가린 서하의 입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난 탓이었다.

다미와 도민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서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래…. 혼자 생각만 할 수는 없어.”

혼자 생각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다미와 도민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는 세헌에게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오늘 세헌 씨 퇴근하면…. 같이 이야기해 봐야지.”

부디 다미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면서 서하는 다시금 생각에 깊이 잠겼다.

잠시 후, 세헌이 출근을 하고 난 뒤, 혼자 집에 남은 서하는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청소기를 꺼냈다.

이미 깨끗한 집안이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다.

“아직 학원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청소로 시간을 보내려던 서하는 이내 청소기를 내려놓았다. 이미 깨끗해진 집 안을 청소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학원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가 TV를 켰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잠깐 몰입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정신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휴.”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언니의 남자를 어떻게 빼앗을 수 있냐는 다미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만약에 사실이라면…….”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해 서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 세헌 씨도 그럴 사람이 아니고.”

확실한 것은 단 두 개였다. 무슨 이유에서건 가족들이 자신을 두고 해외로 도피한 것, 그리고 정략결혼은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

“왜 정략결혼을 선택했을까….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아.”

도민이 원하는 배우자는 그의 말에 조건 없이 따르는 조용한 여자였다. 그리고 도민은 서하를 향해 그런 여자라고 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런 성격이었나?”

무조건 순응하는 여자. 생각만 해도 답답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 팍 떠올랐다.

“설마…. 결혼도 그래서 한 거 아닐까?”

자신이 군소리 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한 것도 어쩌면 그런 성격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서하는 생각했다.

지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액정 위에 뜬 모르는 번호에 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내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하니? 엄마다.

* * *

집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설영의 말에 서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턱대고 찾아온 설영의 행동에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두렵다는 것이었다.

대체 또 무슨 말을 해서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려는지 발목에 족쇄를 찬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잠시 후, 긴장감이 어린 얼굴로 서하가 카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설영이 그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서하야!”

목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린 서하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인사를 해?”

설영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뭐 좀 기억나는 건 있니?”

“아니요, 아직 기억은 나질 않아요.”

“그래?”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설영이 입을 열었다.

“서하야.”

설영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서하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네.”

“엄마가 며칠 내내 속이 상해서 한숨도 자질 못했단다. 게다가 어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지. 그래서 바로 네게 이야기하기 위해 달려온 거야.”

충격적인 소식이라니. 서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소식인데요?”

“글세…. 나도 너무 충격을 받아서…. 네 아버지가 알면 쓰러질까 봐 무섭다.”

대체 무슨 말이길래 그러는 건지. 설영을 바라보는 서하의 두 눈에 근심이 서렸다.

“우리 진성 건설, 네 아버지가 한평생 키워낸 거 너도 알고 있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네. 아버지 회사였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럼, 진성 건설 인수한 게 우세헌 대표라는 것도 알고 있니?”

세헌이 진성 건설을 인수했다는 말에 서하는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설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가 갑자기 비리가 있다면서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흔들리게 됐어. 그런데 갑자기 우세헌 대표가 나타나더니 그 투자금 자신이 갚아 주겠다며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했고…. 네 아버지는 마냥 고마워했는데…. 그게, 그게…. 알고 보니…….”

설영이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세헌 대표가 다 꾸민 일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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