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어머, 도민 씨. 무슨 일인가요? 혹시 서하라도 만났나요?”
설영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도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만났습니다.
“어땠나요? 서하가 좀 기억을 하나요?”
-아니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정략결혼을 한 게 사실이냐고 묻더라고요.
미간을 찌푸리며 설영이 입을 뗐다.
“서하가 그랬다고요?”
-네.
“그래서, 도민 씨는 뭐라고 했어요?”
-솔직하게 말했죠. 그랬더니…….
“그랬더니요?”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딱딱한 도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한테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해달라더군요.
“뭐, 뭐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설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이렇게까지는 안 할 것이었다. 정색하며 설영이 입을 열었다.
“도민 씨는 뭐라고 하셨나요?!”
-아직 답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도민 씨. 우리 서하가 기억을 잃어서 그런 거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네.
도민의 대답에 설영이 말을 멈췄다.
“네?”
-서하 씨 기억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굳어 있던 설영의 표정이 활짝 폈다.
“어머, 그렇죠?! 그럼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계속 생각해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니… 어떤 게…?”
괜스레 긴장한 설영이 귀를 쫑긋 세웠다.
-우세헌 씨를 만났다고 말씀드렸죠? 서하 씨와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네, 들었어요.”
-그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우세헌 씨가 그러더군요. 비리가 터져서 운영과 자금난을 겪은 진성 건설을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인수한 이유가 서하 씨 때문이라고.
세헌이 진성 건설을 인수한 이유가 서하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설영이 알고 있었다는 듯 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우 대표가 우리 서하한테 집착을 하는 것 같아서…….”
-잘 생각해 보세요. 상견례 날짜가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성 건설 비리가 터졌죠? 그리고 우세헌 씨는 기다렸다는 듯 진성 건설을 인수했고요. 과연 우연일까요?
설영의 머릿속이 의아함으로 가득 차던 순간 우민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비리, 우세헌 씨가 터트린 거 아닐까요? 서하 씨를 차지하기 위해서.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설영의 두 눈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비리를…. 우 대표가 터트렸다고?”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술렁거리는 낌새도 없이 갑자기 터진 비리들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타이밍 좋게 연락한 세헌을 떠올리며 설영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그럼 서하, 그 계집애 때문이라는 거네?”
우 대표가 이런 일을 벌인 것도 결국에는 모두 서하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 설영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자신과 다미의 앞길을 이렇게 막을 줄이야. 점차 격양되는 감정에 설영이 몸을 떨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서하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방법을.
* * *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 소리에 모니터에 고정됐던 세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엄청난 소식을 알아 왔는데 들어볼래?”
도윤의 말에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말했다.
“엄청난 소식이 아니면 각오해야 할 텐데.”
“그래서 들을 거야, 말 거야.”
“말해.”
어느새 그의 옆에 선 도윤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홍설영 씨 옆에 사람 붙였잖아. 오늘 보고가 들어왔는데…. 너, 서하 씨가 홍설영이랑 진다미 만난 거 알고 있었어?”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이 놀란 듯 되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럼 서하 씨가 양도민 만난 것은?”
도민을 만났다는 말에 세헌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뭐라고?”
“수도 투자증권 손자면 양도민 맞지? 오늘 서하 씨, 진다미 만나고 난 뒤에 바로 양도민 만난 거 같아.”
“진서하한테도 사람 붙였어?”
“아니, 진다미한테. 혹시 몰라서 홍설영, 그 여자한테 사람 붙이면서 진다미한테도 붙였지. 둘 다 서하 씨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도윤을 보며 그가 잘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진다미한테 붙인 사람이 그러더라고. 혹시나 하고 남아 있었는데 서하 씨가 어딘가로 가더래. 그래서 따라 가봤더니 수도 투자증권 손자를 만났다고 하더라고.”
그러고는 세헌의 눈치를 보며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연락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진서하 씨가 양도민 만났다는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하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나하나 묻고 싶었다. 다미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도민을 만난 건지, 그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건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는 서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세헌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당연한 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서하가 주위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게다가 서하가 설영과 다미를 만났다면 분명 그 둘은 그녀를 흔들어 놓았을 것이었다.
‘혼란스럽겠지.’
지금 당장은 서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기억을 잃은 데다가 어느 게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서하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많은 것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 테니까.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이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어보는 건 그 뒤였다.
“안 서운해?”
도윤의 물음에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안 서운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려주는 것뿐이야.”
“오, 우세헌. 어른이네.”
“배 비서.”
“알겠다, 알겠어.”
두 손을 들고 손바닥을 내보이며 도윤이 항복 포즈를 취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계속 지켜봐?”
세헌의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인내심은 한정적이었다. 오직 서하와 관련된 일에만 참을 수 있었지, 그 밖은 아니었다.
“경고는 해야겠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서하를 설영과 다미가 계속 들쑤시게 만들 수는 없었다. 서하 때문에 참고 참은 세헌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그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세웠다. 그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홍설영, 그 여자 번호가 뭐지.”
“기다려 봐.”
도윤이 휴대폰을 꺼내 뒤적이더니 세헌을 향해 내밀었다.
“자, 번호.”
설영의 휴대폰 번호를 넘긴 도윤이 눈치 빠르게 대표실 밖으로 향했다.
대표실에 혼자 남게 되자 세헌이 기다렸다는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두 번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화기 너머로 그가 듣기 싫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까랑까랑한 설영의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홍설영 씨, 맞으십니까.”
-누구시죠?
“네, 우세헌입니다.”
-어머, 난 또 누군가 했네.
세헌이라는 소리에 설영의 목소리가 단숨에 누그러졌다.
-20억이 벌써 준비가 됐나요?
“아니요.”
-네? 아직도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럼 왜 전화 한 거예요?
날카롭게 묻는 설영을 향해 그가 딱딱하게 말을 내뱉었다.
“약속하셨을 텐데요. 돈 받는 조건으로 진서하 앞에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어머, 그럼요. 그런데 서하가 자꾸 만나자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설영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자 세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그럼 내가 돈도 받으면서 뒤로 수작질한다는 건가요?!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우 대표!
앙칼진 설영의 목소리는 세헌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진서하, 괴롭히지도 말고 흔들지도 마세요.”
-참나. 이봐요, 우 대표.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키겠지만 그래도 걔, 내 딸이에요. 걔가 날 찾으면 어쩔 수 없다고요.
끔찍하게 괴롭힌 데다가 돈까지 요구했으면서 태연하게 딸이라는 말을 해대는 설영이 가증스러웠다.
“그건 홍설영 씨 사정입니다.”
-뭐, 뭐라고요?!
“그럼, 제 할 말은 끝났으니 통화는 이것으로 끝내죠.”
-잠깐! 우 대표, 돈은…!
뚝.
그대로 통화를 끝내버린 세헌이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까지 돈 이야기를 꺼내던 설영의 음성이 그의 신경을 긁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네.”
어떻게 서하는 저런 여자 밑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왔던 건지, 그래서 얼마나 상처를 받은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그런 서하를 더욱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싶다는 생각.
더러운 꼴은 자신만 보면 됐다. 설영이 얼마나 추악한지도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세헌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이 진흙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진서하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해줄 거야.”
그는 누구보다 서하에게 진심이었다. 그리고 제 말대로 그렇게 만들 거라고 세헌은 한참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