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45화 (46/70)

45화

* * *

다미가 자리를 떴음에도 서하는 멍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지금 일어났다가는 그대로 주저앉을 것이 분명했다.

“하…….”

당장이라도 세헌에게 전화를 걸어 다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에게 물었을 때,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서하는 그대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야. 모르는 일이야. 아닐 거야.”

분명 새엄마와 이복 언니는 꾸준히 자신을 괴롭혔다고 했다. 다미의 이질적인 모습 또한 그녀에게 와닿지 않았으나 그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뭐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답답한 마음에 서하가 머리를 잡고는 고개를 떨궜다.

“…제발 떠올려줘.”

간절한 마음에 수십 번을 되뇌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감이 그녀의 목을 옥좼다.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던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헌 씨는 믿어…. 하지만…….”

세헌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봐야 했다.

“…양도민 씨라고 했나.”

도민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자신이 그와 결혼하려고 했던 건지. 설영과 다미가 아닌 제삼자인 그의 말을 듣는다면 엉켜놓은 실타래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서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경호에게 연락을 해서 도민의 휴대폰번호를 물어보려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서하 씨, 저 양도민입니다. 만나고 싶어요. 연락해주세요.]

자신의 정략결혼 상대였던 도민의 메시지였다.

자신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정말로 자신이 결혼을 선택했냐였다.

“잘된 거야. 어차피 물어보려고 했으니까.”

어차피 도민과 만나서 결혼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던 그녀에게 잘된 일이었다.

메시지를 바라보던 서하가 결심한 듯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물어볼 것이 있어요.]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서하가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당장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 시각, 개운한 표정으로 집으로 향하던 설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래, 우리 딸.”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와 함께 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진서하, 그 기집애. 내가 제대로 구워삶았어.

“어머, 그랬니? 어떻게?”

-내가 한 연기 하잖아. 눈물 뚝뚝 흘리면서 결혼할 남자도 있으면서 어떻게 언니 남자를 빼앗을 수 있냐고 그랬더니 엄청 당황하던데? 나중에는 미안한 건지 고개도 들지 못하더라니까?

“잘했어. 엄마도 지금 양도민 씨 만나고 집 가는 길이야.”

-그 남자는 뭐래?!

“뭐라긴, 서하 만나게 해준다니까 냉큼 좋다고 번호 받던데.”

설영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밤, 경호의 휴대폰에 저장된 서하의 번호를 알아낸 설영이었다.

-연락해 본대?

“하겠지? 우리 딸, 너무 고생했어.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혼란스러운 마당에 양도민 씨까지 만나면 서하, 걔는 더는 우 대표랑 같이 못 있을 거야.”

그 말에 다미가 만족한 듯 목소리를 냈다.

-그래야지. 엄마! 기분도 좋은데 우리 오늘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을까?

“그러자꾸나.”

다미와 약속을 잡고는 통화를 마친 설영이 흡족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제야 속이 조금 시원하네.”

그동안 세헌에게 당한 것들을 제대로 설욕해 주겠다고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설영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벼웠다.

* * *

생각에 잠겨 있던 서하의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하 씨.”

그 소리에 고개를 든 서하의 앞에 도민이 섰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후, 오면서도 걱정했어요. 서하 씨가 없으면 어떡하나.”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도 당장 서하 씨를 만나고 싶었던걸요. 갈까요?”

도민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으로 향하더니 차문을 열었다.

“타요.”

“아…. 감사합니다.”

낯설다는 듯 어색하게 조수석에 탄 서하를 흘끗 보고는 도민이 운전석으로 향했다.

“어디가 좋아요? 밥 먹으러 갈래요?”

“아니요. 그냥 조용히 이야기할 곳이면 돼요.”

“그것도 좋겠네요.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도민의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공원 벤치여도 괜찮아요.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면 돼요.”

“공원 벤치요?”

“네.”

분위기 좋은 음식점이나 카페를 생각했던 도민은 잠시 멈칫했다. 공원 벤치라니.

잠시 생각하던 도민이 핸들을 돌렸다. 5분 정도 달렸을까. 도민의 차가 한강 공원 주차장에 멈춰 섰다.

“한강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도민이 안전띠를 풀며 말을 이었다.

“커피 사 올게요. 편하게 있어요.”

차에 혼자 남은 서하는 심호흡을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우선….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된 건지부터 물어보자.”

초조한 얼굴로 도민을 기다리던 그때,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도민의 말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진지해지면 숨이 막힐 것 같았기에.

조수석에서 내린 서하를 향해 도민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네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벤치. 사람도 없는 데다가 조용해서 이야기 나누기에는 딱 적합한 곳이었다.

서하가 벤치에 앉자마자 도민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아, 아니요. 저도 도민 씨한테 연락하려던 참이었어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던 서하가 자신에게 연락하려고 했다니. 도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다시 기억이라도 난 거예요?”

“아니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거?”

서하가 그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으시다면 솔직하게 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당당하게 묻는 서하의 얼굴을 보며 도민은 살짝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민이 알고 있는 서하는 소극적이었으며 질문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너 번 만나는 동안 서하가 가장 잘하던 말은 “네.” 뿐이었다.

그 변화가 신기한 듯 서하를 빤히 바라보던 도민이 답했다.

“물어보세요, 다 말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서하가 입을 열었다.

“우선, 도민 씨가 제 결혼 상대라는 게 맞나요?”

“네, 맞아요.”

“…어쩌다가요?”

“어쩌다가라니.”

“아, 미안해요. 궁금해서…….”

도민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정한 거였죠. 서로 조건이 맞는 상대를 골라서 만났는데 서하 씨와 제가 너무 잘 맞았던 거예요.”

“어떤 게 맞았다는 거죠?”

“어차피 정략결혼 할 바에는 서로 시간 낭비하는 거 없이 조건에 맞춰서 결혼하자는 거?”

미묘한 이질감이 서하의 신경을 거슬렸다. 시간 낭비하는 거 없이 조건에 맞춰서 결혼이라니.

“제가 동의했다고요? 그 조건에?”

도민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네. 그 후로는 수월하게 진행됐어요. 양가 상견례 날짜도 잡고.”

“상견례까지…. 잡았었다고요?”

“네. 그런데 갑자기 진성 건설이 어려워지더니 서하 씨가 사라졌어요. 그러다가 다시 만났더니….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크게 놀랐죠.”

“아…….”

놀랄 만했다. 사라진 것도 모자라서 기억을 잃었다니. 도민이 이해가 간다는 듯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도민 씨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건 정말 사실인가 보네요.”

“저는 서하 씨가 결혼 상대로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정략결혼이라는 것은 보통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있기 마련인데 서하 씨는 조건 없이 제 말을 받아줬거든요.”

자꾸만 거슬리던 묘한 이질감이 뭔지 서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하 씨와 함께라면 결혼 생활은 순탄할 것 같았어요.”

“그 말은…. 제가 조건 없이 말을 받아줘서 좋았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집에서까지 기 싸움은 하기 싫거든요. 전 얌전히 내조하는 여자를 원했는데 그게 딱 서하 씨였어요.”

서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죠. 지금은 그렇게 못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도민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하를 바라보았다.

“네?”

“그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도민 씨가 원하는 얌전히 내조하는 여자는 못될 것 같아서요.”

“…서하 씨?”

서하가 차분하게 도민을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결혼,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 * *

도민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혼자 차 안에 남고 나서야 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변했어.”

서하를 그토록 원한 것은 제게 딱 맞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가지기보다 조용히 자신을 믿고 군소리 없이 따라와 줄 수 있는 여자. 서하는 딱 그런 여자였다.

“어떻게…….”

기억을 잃어서 성격까지 변해버린 걸까. 도민은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기억이 돌아오면 그녀도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더는 서하 같은 여자를 찾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나저나 지금은 우세헌 씨와 만나는 것 같던데. 기억을 잃은 서하 씨가 가족들과 등지면서까지 우세헌 씨와 만난다고?”

생각에 잠겼던 도민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비리가 터져서 운영과 자금난을 겪은 진성 건설을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인수한 이유가 세헌은 서하 때문이라고 했다.

“딱 상견례를 앞두고 비리가 터졌지. 우세헌은 기다렸다는 듯 진성 건설을 인수했고.”

의심하고 물어도 봤지만 덮어야 했다. 증거가 없었기에.

“증거를 찾으면…?”

도민이 휴대폰을 꺼내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내 철컥하고 끊긴 신호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양도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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