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다미야!!”
뒤에서 들려오는 설영의 목소리에 다미의 두 발이 우뚝 멈췄다.
“엄마.”
휙 돌아선 다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서하의 입에서 세헌과 만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서하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지만, 경호가 같이 있다는 사실에 꾹 참고 나온 다미였다.
“감히 내 앞에서 우세헌이랑 만난다고 이야기해? 어떻게 꼬리를 쳐서…….”
분노로 떨리는 다미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다미야, 그래도 참았어야지. 아버지도 있는데.”
“어떻게 참아!”
바락 소리를 지르며 다미가 눈을 치켜떴다.
“그 계집애가 그딴 소리를 하는데!”
이미 질투로 눈이 먼 다미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모든 것을 손쉽게 가졌던 그녀였다. 돈도, 사랑도, 남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항상 쟁취했었다.
그런데 딱 하나, 우세헌만큼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서하라니.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다미야, 엄마가 그냥 가만히 둘 것 같니?”
설영의 목소리에 일그러진 얼굴로 다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우리 딸, 마음 아픈 건 엄마가 못 보지.”
설영이 붉게 칠한 입술을 휘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렴. 그 계집애 때문에 우리 예쁜 딸 얼굴이 이게 뭐니?”
다미의 볼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는 그녀의 눈빛이 섬뜩했다.
“서하는 양도민이랑 결혼해야지. 어떻게서든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엄마만 믿으렴.”
“어떻게? 그 년이랑 우세헌이랑 같이 사는데 어떻게 결혼을 시켜?”
“양도민을 찾아갈 거야. 이대로 결혼 밀어붙이자고.”
자신의 딸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것만큼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서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설영이었다.
애초에 서하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할 뿐이었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차 없이 버려도 될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 서하 때문에 자신의 딸이 힘들어하다니. 설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딸은 서하, 그 계집애를 만나고 오렴. 가서 최대한 불쌍하게 우 대표가 원래 너랑 만나고 있었다고 해.”
“뻔한 거짓말을 하라고?”
“혼란스럽게만 만들면 돼.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기억을 잃었더라면 흔들리기 십상이니.”
설영의 빼뚤어진 입꼬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흔들다 보면 틈이 생길 것이고 그 틈을 벌려놓으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화나도 참아야 해. 그래야 서하를 구워삶을 수 있어. 알겠지? 우리 딸?”
달래듯 말하는 설영을 향해 다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세헌은 묘하게 차분해진 서하를 보며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그녀가 이상하다는 것을.
“진서하.”
“네, 네? 나 불렀어요?”
“이리 와.”
세헌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무슨 일일까.”
“…뭐가요?”
“무슨 일이길래 진서하 표정이 그런 건지 말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오늘 가족들을 만나서 따지고 묻고 생각들을 정리한 다음 세헌에게 말하려고 했던 서하는 차마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정리되질 않아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웠다. 설영과 다미의 모순적인 모습들과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경호의 행동까지.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아요. 뭐가 진짜인지.”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세헌과 시선을 맞췄다.
“사실은 저, 오늘 가족들을 만났어요.”
놀랄 줄 알았지만, 세헌의 표정은 차분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먼저 찾아온 건가?”
그의 물음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어머니…. 라는 분이 먼저 찾아오셨거든요. 제가 기억을 잃었다니까 처음에는 안 믿으시더니 오늘 아버지라는 분이랑 언니랑 함께 찾아왔어요.”
세헌이 작게 혀를 찼다. 돈만 받고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네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어?”
“아니요, 오히려 언니는 친절했는데.”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절했다니.
“연기하기로 작정했군.”
“네?”
“아니야. 계속 말해 봐.”
“음, 친절했는데…. 이상하게도 좋지 않았어요.”
학대받았다는 것을 몸은 기억하는 걸까. 서하는 무의식적으로 가족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음,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천천히 바닥으로 향하는 서하의 시선을 보며 그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뇨, 갑자기 언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서…. 흐지부지하게 끝났어요.”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복잡스러웠는데 더 복잡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작 알아낸 건 하나도 없어요. 아, 아버지 휴대폰 번호는 받았네요.”
“그래.”
세헌이 다정하게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런 그를 흘끗 쳐다보며 서하가 입을 열었다.
“왜, 미리 말 안 했냐고 안 물어봐요?”
“응.”
“왜요?”
“너도 말하려고 했을 테니까. 단지 지금 혼란스러워서 말하기가 어려웠던 거니. 난 기다릴 수 있어.”
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서하의 두 눈동자가 엷게 진동했다.
“세헌 씨는 어쩜…. 사람이 그래요.”
“뭐가.”
“다정하고… 속도 깊고…….”
다정하다라. 평소의 그와 전혀 관련 없는 말이었다.
“네게만 이래.”
그가 턱을 들어 올렸다. 강인하면서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다른 손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서는 부드럽게 끌어내렸다.
입술이 닿기 무섭게 세헌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열기로 가득한 그녀의 입안을 침범해서는 제 것처럼 휘저었다.
맞닿은 입술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 때문일까. 아득해지는 정신은 마치 술에 취한 듯 그녀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으응…….”
서하의 목에서 삼켜진 신음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골반을 잡고는 은근하게 문지르던 세헌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
잔뜩 풀어진 눈으로 아쉽다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하를 그대로 두기에는 세헌의 이성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서하를 번쩍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소중한 듯 안고 있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으며 그가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했지.”
세헌이 느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생각, 다 날려 줄게.”
* * *
다음 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세헌이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들었다. 도윤의 자리로 전화를 건 그가 대표실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부진 체격 때문에 꽉 낀 정장 재킷을 풀어 헤치며 도윤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배도윤. 그 여자가 진서하를 찾아왔어.”
세헌이 정색을 하면서 그 여자라고 지칭할 만한 사람이라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여자? 설마, 홍설영 말하는 거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세헌을 보며 도윤이 표정을 굳혔다.
“와, 그 여자가 왜? 진서하 씨한테 뭐라고 했대?”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그 여자랑 진다미, 두 사람 다 진서하에게 친절했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윤이 되물었다.
“친절? 서하 씨한테 친절하게 대했다고? 그 두 여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착한 척하려는 모양인데 그냥 둘 수는 없지.”
“맞아. 그 두 여자가 갑자기 착한 척할 리가 없지! 근데 홍설영 그 여자는 돈 받고 서하 씨 다시는 안 본다고 했잖아.”
“생각해보니 20억이 부족했나.”
헛웃음을 터트리는 세헌을 보며 도윤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욕심이 끝도 없는 사람이네. 우세헌, 너. 벌써 돈 준 건 아니지?”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돈 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랑 진다미가 대체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지 사람 시켜서 알아봐.”
“좋아, 잘 생각했어! 위치부터 바로 확인할게. 무슨 짓 하는지 탈탈 털어봐야지.”
“그래.”
설영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세헌을 건드려버렸다.
“돈만 받고 끝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헌이 돈을 주고 끝내려고 했을 때, 설영은 그만했어야 했다.
서하가 그동안 당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그였기에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깨끗하게 치워 줘야겠네.”
그녀의 인생에서 홍설영이라는 이름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