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 *
조용한 카페 안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창가에 앉아있던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두 남자의 고개를 들었다.
구두의 주인이 설영이라는 것을 안 두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는 입에 발린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누님은 어떻게 매번 볼 때마다 젊어지십니까.”
뻔한 소리였지만 싫지는 않은 듯 설영이 입을 열었다.
“왜 이래, 어서 앉아.”
“누님부터 앉으세요. 레이디 퍼스트 아닙니까?”
경박스럽게 과장된 몸짓으로 앉으라는 손짓을 하는 남자들을 보며 설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켰던 일은?”
“아우, 누님. 이번 일은 너무 싱거웠습니다.”
두 남자 중 하나가 거들먹거리며 품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를 낚아채듯 받아든 설영이 말했다.
“보고해 봐.”
“그 우세헌 대표 집 주소는 거기 적혀 있고요. 사흘 동안 지켜봤는데 우세헌 대표 출근하면 점심쯤 진서하 씨가 집에서 나와서 학원을 가더라고요.”
“학원?!”
“네. 요리 학원인가? 그렇던데.”
그 말에 설영이 코웃음을 쳤다.
“요리 학원? 하,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지만 팔자가 폈지? 아주. 그래서?!”
“아무튼 점심쯤 나가서 서너 시쯤 집으로 돌아오더라고요.”
남자들이 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훑어보던 설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그만 가 봐.”
그러자 두 남자가 서로를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에이, 누님. 우세헌 대표면 A급이 아니라 S급 정보인데, 이 정도 잘 정리해 왔으면 용돈 좀 더 주셔야죠.”
설영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원체 천박하다지만 이 정도로 천박할 줄이야. 돈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돌변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든 설영이 두 남자를 향해 내밀었다.
“어서 받고 가버려.”
남자 하나가 냉큼 돈을 받고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우리 누님, 항상 후해서 좋다니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저희는 갑니다!”
마지막까지 껄렁거리며 떠나는 두 남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설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지금은 저런 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흥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설영이 남자들이 준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가만히 있어 보자, 우 대표 집이 여기서 얼마나 걸리려나?”
* * *
띠리리링.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나갈 준비를 하던 서하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늦으면 안 되지.”
요리 학원에 갈 준비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집에서 나온 서하가 건물에서 나와 밖으로 향하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진서하!”
날카로운 음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를 향해 설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하야?!”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 설영을 보자마자 서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어? 강원도에서 언제 올라왔어?!”
설영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서하가 입을 뗐다.
“저기…….”
“저기?!”
“…누구세요?”
눈을 깜빡거리던 설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얘 좀 봐. 누구? 지금 나한테 누구세요라고 했니?”
“죄송해요. 기억이 나질 않아서…. 혹시 절 아시나요?”
“뭐?”
설영은 기가 막힌 듯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니?”
“제가 다쳐서 기억을 잃었거든요.”
“기억을 잃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설영이 그녀를 위아래를 훑었다. 확실히 믿기 어려웠다. 갑자기 기억을 잃어버렸다니.
“네, 혹시 누구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묻는 서하를 보며 설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서하는 자신과 말할 때면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어?”
“네.”
설영은 한참을 서하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달라진 서하의 모습이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에 신빙성을 더하는 듯했다.
“저기… 아주머니.”
“아주머니라니!”
설영이 발끈하며 외쳤다.
“나 네 새엄마야.”
“네?”
“네 새엄마라고. 어때, 기억이 좀 나니?”
서하는 당황한 얼굴로 설영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자신을 버리고 해외로 도망갔다던 새엄마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외… 로 갔다고 들었는데.”
“며칠 전에 돌아왔다. 네가 걱정돼서.”
“제가 걱정됐다고요?”
이상했다. 분명 세헌과 도윤의 말로는 새엄마는 자신의 걱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이복 언니도 마찬가지였고.
“그래! 네 아버지도 엄청 걱정하시는데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걱정하신다고요?”
“그래!”
쌀쌀맞게 설영이 쏘아붙이자 서하가 물었다.
“걱정하셨다면서 왜 절 혼자 두고 해외로 가신 거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기억을 잃었기에 어느 게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서하를 혼자 한국에 놔두고 가족들이 해외로 떠났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멈칫하던 설영이 입을 열었다.
“어머,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니? 아니면 지금 기억이라도 난 거야?”
“아니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서하를 보는 설영의 표정이 점차 구겨졌다. 예전의 서하였더라면 무조건 “네”라고 답했지, 지금처럼 말대꾸하지 않았으니까.
설마 하던 의심도 사라졌다. 설영이 알고 있는 서하는 기억을 잃은 척 연기를 할 만큼 영악한 아이는 아니었다.
“정말 기억을 잃었다고?”
“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네.”
한참을 서하를 빤히 바라보던 설영이 혀를 찼다. 그녀를 끌고 갈 생각이었지만 기억을 잃었다는 소리에 설영 또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는 건 소용없는 것 같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내일요?”
“그래. 내일 이 시간에 저기 앞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네 아버지 데리고 올 테니까. 우 대표한테는 말하지 말고.”
“잠깐만요!”
제 할 말만 하고 휙 돌아서는 설영을 붙잡으며 서하가 말을 이었다.
“아직 대답 안 해주셨어요. 절 왜 혼자 두고 다 떠나신 건지.”
설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얘는 진짜, 기억을 잃어도 눈치는 그대로네. 지금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이야기하자고 했으면 내일까지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설영은 제 팔을 잡은 서하의 손을 뿌리치며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서하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짚었다.
“대체… 뭐야, 정말.”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는 정작 중요한 것은 내일 이야기하자니.
설영을 떠올리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설영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세헌과 도윤이 한 말이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새엄마와 이복 언니가 자신을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말이.
아무리 새엄마라도 자신을 아꼈더라면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괜찮냐며 걱정을 했었을 텐데 설영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아버지와 함께 온다던 설영의 말을 떠올리며 서하는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선 내일 한 번 더 만나봐야겠어.”
* * *
호텔로 돌아온 설영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태연한 척했지만 설영 또한 많이 놀란 상태였다. 서하가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럼,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는 거겠지? 나조차도 기억을 못 했으니.”
심각한 표정으로 설영이 생각에 잠겼다.
당장 서하를 끌고 오려던 생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니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게다가 내성적인 데다가 항상 주눅 들어있던, 자신의 말에는 무조건 따르던 그 옛날의 진서하가 아니었다.
“기억을 잃어서 그런지 성격도 좀 바뀐 것 같고.”
설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건 좋은 기회잖아? 착한 엄마였던 척 연기해도 괜찮고 말이야.”
어차피 기억하지 못한다면 서하에게 착한 엄마였던 척 연기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야 지금 기억을 잃은 서하가 자신을 믿고 따를 거라고 설영은 생각했다.
“예전처럼 막 대했다가는 우 대표한테 바짝 붙어버릴 수도 있으니.”
설영이 음흉한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호텔 방문이 열리며 경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집도 구해야 하고 서하도 찾아야 하는데.”
“어머, 내가 놀러 다닌 줄 알아요?! 서하 만나고 왔거든요?”
서하의 이름에 경호가 놀란 듯 황급히 입을 뗐다.
“서하? 서하 만나고 왔어?”
“네.”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대? 지금 우 대표랑 같이 있는 거지?”
평소라면 무덤덤해야 할 경호가 말을 쏟아내자 못마땅한 듯 설영이 새침하게 답했다.
“네, 뭐.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던 설영이 조금 전과 달리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하가… 우리 서하가 기억을 잃었대요.”